▲ 조우석 문화평론가 |
서울 상과대 졸업 이후 은행 등 직장생활 16년을 거쳐 작가로 변신했던 늦깍이였다. 그런 그가 유명세를 넘어 악명을 얻은 건 영어 공용어 제안이 아니었을까? 1998년, 그때 사람들이 발칵 했다. 민족문화의 핵심인 모국어를 망가뜨리는 신성모독의 용납 못할 발언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언론-출판 분야 등 우리 지식사회의 암묵적 합의를 두 단어로 압축하면 민족주의와 민중주의인데, 이 도그마에 도전한 대역죄였다. 이단아 복거일은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지금까지 오해와 왕따 속의 인물로 남아왔다.
누가 문제일까? 문제제기를 한 복거일? 한쪽으로 크게 기울어진 운동장인 지식사회의 풍토? 논란 속의 그는 일부에게는 문화영웅이라는 것도 함께 기억해두자. 문학평론가 이동하는 “복거일은 순수한 찬탄을 금할 수 없는 희귀한 문인”이라고 찬탄했다. 서울 수색의 그의 오래된 아파트를 찾아간 인터뷰어인 나도 경의(敬意)를 먼저 표했다. 그게 우리시대 지적 거인에 대한 합당한 예의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식사회 주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분. 외롭겠지만, 여전히 빛나는 존재가 복거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와의 4시간 대화는 복거일이란 암호 해독에 온전히 집중된다. 그가 어떻게 성장을 했고, 문제의식의 출발이 무엇인지가 중요하다. 그걸 알아야 <비명을 찾아서>는 물론, <높은 땅 낮은 이야기>, <캠프 세네카의 기지촌> 등 주요작품이 이해된다. 그는 시장경제의 전도사로도 유명하고, 좌우 이념논쟁의 대표 논객인데, 왜 여기에 뛰어들었는지의 배경도 가늠된다. 이번 대화에서 그런 주제는 잠시 밀쳐뒀다. 다음에 기회가 또 있을테니까.
-출세작 <비명을 찾아서>는 지난 30년 가까이 얼마나 팔린 겁니까?
“제가 그런 걸 잘 체크하는 스타일이 아니라서요. 한 10만 부 정도?”
-그것밖에 안 되나요? 제가 4년 전에 새로 구입한 상하 권을 보니 초판 29쇄(1993년), 재판 8쇄(1997년), 3판 16쇄(2010년)로 돼있어 꾸준하던데요.
“한 쇄에 그만큼 조금씩 찍어내는 겁니다. 아무래도 지식인 소설이라서 베스트셀러가 되진 않습니다. 제 체질도 다분히 귀족적인데, 그래서 대중성이 없습니다. 소설 외에 산문집, 시집, 희곡집, 과학평론집도 있고, 사회평론집만도 10권인데, 저는 남이 하는 걸 되풀이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 분야의 전문가들을 위한 서적을 펴내는 게 아니라면 왜 굳이 책을 펴내야 합니까?”
-전업작가보다는 대학 교수 생활이 더 잘 어울리실 법도 한데요.
“그걸 하지 않은 것도 남이 아는 걸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서였죠. 막상 해보니까 가르치는 보람도 아주 없진 않더라구요. 얼마 전 세종대 석좌교수로 3년 강의했거든요. 신입생을 위한 교양강좌인데, 제가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뉴욕타임스의 국제판)하고 영국 이코노미스트 두 신문 잡지의 영문 기사와 사설 등을 강의교재로 사용한 겁니다. 이런 게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신문 잡지이고, 최고 지성의 글이니 함께 읽자고 제안했습니다. 국어 실력도 시원치 않은데, 그게 가능하겠느나며 새파랗게 질리던 아이들이 의외로 곧잘 따라왔고, 저도 또 다른 재미를 느꼈던 계기였죠.”
▲ 암투병중인 복거일 선생과 조우석 문화평론가가 계단에 앉아 인터뷰를 하고 있다. |
-한 학기가 끝난 뒤 정신의 키가 부쩍 크는 학생도 간혹 있었을 겁니다.
“물론이죠. 강의를 다시 한 번 듣겠다는 학생도 종종 있던데, 문제는 강의평가가 좋진 않았어요. 학교 측 자료를 받아보니 과제가 많다, 학점이 짜다, 왜 하필 어려운 영어냐는 학생들 지적이 많더라구요. 어쨌거나 저는 대중성이 떨어집니다. 자유기업센터에서 강의할 때도 관찰해보니까 제 강의는 30분이 지나면 수강생들이 지루하다며 몸을 비비 꼬고 주리를 틉니다.”
-저는 말씀이 재미있어서 이렇게 경청하는데 말이죠.(웃음)
“그때 강의를 함께 했던 경제학자 홍익대 김종석 교수나, 팟캐스트 ‘정규재 TV’로 유명한 한국경제신문 정규재 논설실장을 보면 확실히 저와 달라요. 강의할 때 웃음이 떠나지 않는 환한 얼굴이 보기에도 좋고, 어려운 걸 쉽게 전달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습니다. 저도 재주가 없진 않는데, 쉬운 걸 엄청 어렵게 말하는 데는 당대 제일이죠. 그 점에 어떤 자부심마저 느낍니다.”(웃음)
-태생적으로 많이 진지하신 거죠 뭐.
“제가 정말 싫어하는 게 쓸데없는 잡담을 늘어놓는 겁니다. 옛날 유행했던 참새 시리즈, 사오정 시리즈나, 또 유머랍시고 하는 음담패설을 본능적으로 꺼려합니다. 1960년대 말 군 장교생활 때도 그랬는데, ‘그렇게 낄낄 댄다고 너희들 인생에 남는 게 뭐냐?’고 인상을 북북 쓰곤 했습니다. 그랬더니 ‘복 소위 같은 순수파는 빠져!’ 하면서 자기들끼리 속닥대더라구요.”
-얼마 전에 펴내신 책 <나는 왜 자유주의자가 되었나>(에프케이아이 펴냄)를 보니 초급장교 시절 고생했던 이야기가 등장하던데요.
“젊은 시절 전방에서 죽지 않을만큼 하는, 사서 하는 고생은 좋다는 게 제 지론입니다. 자유주의자답지 않다고 지적할 분도 있을까요? 어쨌거나 군대는 책 읽는 것, 지식을 싫어하는 집단이 아닙니까? 제가 근무했던 포병부대의 대대장은 야전교범 외에는 책을 읽지 말라고 지시했을 정도인데 저는 도저히 그럴 수야 없었습니다. 포 사격이 끝나고 나면 견인차가 올 때까지 마냥 기다릴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 전 책을 봤습니다. 그것도 하필 영어책만 들여다보니까 동료들이 저를 슬금슬금 피합니다. ‘우린 동양화 볼테니 복 소위는 공부나 해’하면서 자기들끼리 화투를 하더라구요.”
-그럼 주변에 사람이 안 꼬였던 겁니까?
“그건 아니예요. 관측장교로 훌륭했지, 부대 내 각종 경연대회에 나가 1등을 도맡으니까 누구도 절 무시 못했죠. 16년 회사생활을 할 때도 그랬습니다. 나쁜 관행 따위를 뜯어고치자며 앞장 서 선동하는데 거의 선수였더랬습니다. 업무처리에도 잘하니까 주변에 사람들이 꼬여서 제가 언제나 구심점이었죠. 마지막 직장에서 얻었던 별명이 야당 당수였다니까요?”
-고지식할 것도 같은데, 뜻밖입니다.
“그때 제가 가장 잘 했던 말이 사장 등 임원을 찾아가 ‘그건 부도덕인 일입니다’하고 대놓고 따지는 거였습니다. 조리있고 당당하게 나서면 대부분 움찔합니다. 그건 국제무대에서도 통합니다. 북한인권에 눈감는 중국에게 한국정부가 눈치만 보지 말고 ‘그건 부도덕하다’고 딱부러지게 말하면 됩니다. ”
-책 얘기로 돌아갑니다.
“업무가 끝나면 책을 끼고 살았습니다. 도서구입비도 엄청 났구요. 세상 돌아가는 걸 알려면 지식정보를 습득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송탄 등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영어책 구해 읽었죠. 1970년대 말 영국 런던에 출장 갔는데, 가장 큰 서점을 찾아가니 말로만 듣던 클라크, 하인라인 등의 쓴 SF 고전이 즐비한 겁니다. 그걸 욕심껏 구입하니 저를 대하던 여점원의 표정이 잠깐새 바뀌던 걸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그때 <이코노미스트>와 <뉴스위크>를 정기구독했고, 미국잡지 <아틀랜틱>이나 <플레이보이>를 전부 읽었습니다. 일부는 시커멓게 먹칠돼 있기 십상이던 시절이었으니까요.”
-1987년 6·29선언 전까지 그랬더랬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도색잡지인 <플레이보이>인가 하고 의아해할 수도 있을텐데요.
“그 잡지야말로 히피문화를 가장 잘 전달하던 매체였습니다. 원고료를 서너 배 주니까 노벨상을 받은 솔 벨로우나, 언더 클락 등의 좋은 영어를 접했던 것도 이 잡지였습니다. 사실 저는 기본적으로 히피세대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기질이 폭발했던 게 1969년인데, 미 아폴로 우주선이 달나라에 착륙하고, 반전과 평화를 노래하는 우드스탁 페스티발 열기가 후끈했죠. ‘내가 그렇게는 못 살더라고 여기에서 이렇게 썩을쏘냐?’하는 생각이 컸더랬죠. 16년 했던 직장생활을 접었던 것도 그런 배경일 겁니다.”
복거일은 은근히 보헤미언 히피였고, 동시에 못 말리는 책벌레였다. 군대 시절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사건 등으로 남북관계가 초긴장으로 치달을 때 비무장지대 관측소에 들어갈 때도 그의 손에는 영락없이 책이 들려있었다. 매튜 아놀드의 시집과 <포켓 옥스퍼드 영영사전> 두 권이 그것인데, 영영사전은 그가 대학에 입학하던 해인 1963년 서울 종로에서 구입한 것이다. ‘내 인생의 책’ 첫 권으로 <소월시집>과 함께 그 사전을 꼽을 정도였는데, 온통 손때가 타고 줄이 쳐져 있었다. 어학사전이지만, 그 자체로 작품으로 평가 받는데, 그래서 중국의 린위탕(林語堂)도 찬사를 보냈던 문제의 책이다. 직장생활 할 때도 복거일은 엄청난 지식광(狂)이었다. “나는 알기를 열망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당신은?(I am he that aspired to know:and thou?)”이 그의 좌우명이었다. 그건 영국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의 극시 <파라켈수스>(1835)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어지는 대화야말로 작가 복거일, 지식인 복거일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전해준다.
-가히 경이로운데, 그러면 왜 학위를 하지 않으신 겁니까? 석좌교수도 석박사 학위 없이 경력으로 임용되셨을텐데….
“학위란 게 내가 목적으로 하는 지식을 얻는데 하등의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했던 겁니다. 장사하는 걸 배우는 상과대에 속해있으면서도 저는 역사와 문학에, 보다 크게는 지식 전체를 추구하는데 온통 관심을 뒀습니다. 경제학원론 대신 문학원론을 읽고, 문학서와 탐정소설도 엄청 읽어치웠습니다. 그때 생각에 학위란 안정된 사회에서나 필요한 것이라고 봤고, 당시 저는 감히 총체적 지식의 추구를 목표로 하고 있었던 거죠.”
-언제부터 그런 꿈을 꾸셨던 겁니까?
“대학 입학하던 그 해였습니다. 그게…”
-잠깐만요. 65학번이세요? 제가 75학번인데, 선생님이 저보다 꼭 10살 위이시거든요.
“아뇨. 다른 아이들보다 두 해 먼저 초등학교에 들어갔으니 저는 63학번입니다. 만 열일곱 살 되던 그때 우리 한국사회란 일제 식민지 체험을 포함해 결국 정복당한 문명이라는 자각을 새삼 했던 것입니다. ‘정복당한 문명의 후예인 나는 정복 문명인 근대 서양의 압도적인 지식과 문명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 그걸 위해서는 총체적 공부 밖에 길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겁니다. 그러기 위해 영어부터 제대로 알자는 작심을 한 거죠.”
-듣고 보니 무시무시하네요.
“학교도서관에 들어가 내팽겨쳐뒀던 대학입시용 영어참고서를 꺼내 새로 잡고 읽기 시작했는데, 그런 모습을 본 제 친구들이 모두 ‘쟤, 왜 저래?’ 하는 표정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영어 공부를 거쳐 저는 동시에 서양문명의 지식 흡수를 시작했습니다. 저에게 한국어가 생모(生母)라면, 영어는 유모(乳母)이죠. 영어에 대한 저의 애착은 좀 남다릅니다. 저를 지식인으로 만들어준 언어 아닙니까?”
-훗날 영어 공용화론은 그래서 나온 것일까요?
“아니죠. 두 문제는 직접 관련은 없습니다. 영어에 좀 능숙하다는 이유로 한국어와 함께 영어를 공용언어로 하자고 제안하는 건 아니잖아요? 영어 공용화는 나중에 다시 얘기하고 지식인 얘기 계속할까 합니다.”
-좋습니다. 심하게 기울어진 지식사회 풍토와 상관없는 큰 문제의식은 10대 후반부터 생긴 셈이네요? 앎을 추구하던 청년 복거일의 모습이 생생합니다. 의문은 그럼 왜 장사 배우는 상과대로 진학했던 겁니까?
“상고를 졸업했으니까 상과대에 진학한 것이니 대단한 뜻은 없죠. 그건 다분히 우연이기도 하구요.”(웃음)
-그럼 그 전에 왜 상고에 진학한 겁니까? 대전상고 졸업, 맞나요?
“맞습니다. 장학금을 탈 수 있겠다고 판단해서 들어간 겁니다. 생긴 지 얼마되지 않는 학교라서 그때 깡패학교 소리를 들었더랬죠. 야간부도 있었는데, 밤 업소에 나가서 색소폰을 불던 친구들도 있었으니까요. 사실 우리 정치사에서 상고는 중요한데, 대통령 세 명을 내리 배출하지 않았던가요? 김대중-노무현-이명박, 모두 상고 출신입니다.”
-말씀 듣고 보니 그러네요.
“다시 지식공부로 돌아오자면, 그렇게 총체적 지식공부를 다짐한 저에게 확신을 심어준 건 역설적이지만, 그 이후 읽었던 불교책이었습니다. ‘불립문자 직지인심(不立文字 直指人心)’…. 문자를 거치지 않고 깨침을 얻는다는 선불교의 뜻을 왜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그걸 읽는 순간 저는 ‘그럼 나는 우리시대의 문자를 세우겠노라’고 서원 아닌 서원을 했습니다. 지식정보 재구축 없이 우리가 원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경제발전이니, 이념이나 한일관계 문제도 결국 이 큰 덩어리를 둘러싼 방법론이거나, 의견차이가 아닙니까?”
-일제가 우릴 문명화해줬다고 보는 식민지근대화론이 맞느냐, 수탈해 간 게 맞느냐 하는 논쟁도 그 맥락이겠죠? 정복당한 문명쪽은 수탈이라고 우기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죠. 그럼 대학원 진학은 왜 안 한겁니까?
“교수님이 그렇게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마케팅 학문을 세우려면 자네 같은 사람이 필요해’라면서요. 당시 이미 저는 기업은행에 취직했습니다. 그래서 ‘돈 벌어 동생들 학비를 대야 합니다’고 말씀 드렸죠. 사실 저는 대학원 진학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왜냐구요? 제가 원하는 지식 추구에, 진짜 공부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했던 겁니다. 놀라운 건 저와 똑 같은 생각을 했던 사람이 저 말고도 또 있다는 겁니다.”
-그런 괴물 같은 사람이 또 있었다…. 누구죠?
“SF작가 프레데릭 폴이란 사람입니다. 진짜 천재죠. 저도 좀 재능이 있다고들 하지만 그 사람은 차원이 다른데, 그런 폴은 고교 졸업 뒤 ‘대학 안 간다’고 부모에게 감히 선언합니다. 교수의 지도에 따라 표준화된 코스의 하나에 불과한 학위라는 걸 따고, 틀에 맞춘 논문을 만드는데 시간을 바쳐야 한다고 판단한 겁니다.
폴이나 저 같은 사람이 보기엔 그런 건 큰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이 할 일이 아닙니다.”(프레데릭 폴?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수상한 작가로 1993년 미국과학소설가협회가 선정한 그랜드마스터라는 것 외에 정보가 별로 없다. 아직도 우리는 정보격차가 크다. 참고로 그의 대표작으로 <우주 상인>과 <게이트웨이> 등이 있는데,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작가인 SF 문학의 거장 아서 클라크와 함께 책을 쓰기도 했다.)
-자, 그래서 군대 생활, 직장생활을 하면서 계속 지식추구를 한 겁니까?
“그렇게 하는데 나이 서른 살이 되던 어느 날 갑자기 제 눈이 밝아진 듯하고, 세상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 ‘세상의 모든 지식은 결국 하나다’라는 걸 발견한 것이죠.”
이쯤에서 고백하자. 그날 대화는 기대 이상이었고, 느낌이 왔지만, 인터뷰 다음 날 녹취록을 정리하면서 더욱 짜릿했다. 천하의 복거일이 들려준 얘기를 재음미해보고, 미처 못 알아들었던 행간까지를 더듬어보는 복기 과정이었는데, 그 맛은 해본 이만이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시대의 숨은 지성 복거일을 파악하기 위한 블랙박스에 접근한 느낌이라서 지적 흥분 내지 고양(高揚)된 기분이 게속됐다. 친구들과 만날 때도 나는 복거일빠라고 고백했다. 이런 맛에 인터뷰를 하지만, 복거일의 증언은 지금부터다.
-대단합니다. 나이 17세에 서원(誓願)한 뒤 13년만에 뭔가가 보인 것입니다.
“글쎄요. 알고 보니 저의 깨달음이란 정복당한 주변부 문명권 지식인의 현주소에 불과하다는 걸 공부를 더 하며 깨달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지식이란 하나로 모아진다는 건 진화생물학에서 이미 정리됐던 얘기더라구요. 과학-종교-예술을 지식의 관점에서 통합한다는 걸 저는 거칠고 초보적 형태로 깨달았지만, 저들은 정교하고 차원 높게 이미 규명을 끝낸 상태였었습니다. 서구의 엘리트는 그걸 전제로 나이 서른 살이면 노벨상의 기초를 잡고 저만큼 출발합니다. 제가 만일 충청도가 아닌 뉴욕에서 태어났더라면 저도 그 대열에 합류했을 겁니다. 안타깝게도 변두리 지식인이니까 저 혼자 작은 발견에 도달한 것에 불과한 겁니다. ”
▲ 복거일선생은 당대 최고의 천재이자, 모든 학문을 두루 섭렵한 문인이지만, 말하는 재주는 없단다. "쉬운 것을 엄청 어렵게 말하는데는 당대 제일"이라고 스스로 말한다. |
-저도 <통섭>을 쓴 에드워드 윌슨, <만들어진 신>을 쓴 리처드 도킨스 등 진화생물학의 거장들을 좋아합니다만, 그런 건 잘 모릅니다.
“그 직후 혼자서 끙끙댔습니다. ‘이젠 어떻게 할 거냐?’ 제 결론은 문학으로 방향을 틀자는 것이었습니다. 총체적 지식과 새 문명을 탐색하는 주변부 지식인의 모습을 문학작품으로 다룬다면 저만의 유니크한 무엇이 나올 수 있다고 판단한 겁니다. 훗날 <비명을 찾아서>를 발표한 것은 그 맥락이고, 후속으로 <높은 땅 낮은 이야기>, <보이지 않는 손> 등도 썼구요.”(그의 말은 <비명을 찾아서>를 새로 읽는데 많은 암시를 준다.
주인공인 기노시다 히데요는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본래 이름이 박영세라는 걸 알고,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게 그 소설의 줄거리이다. 사람들은 그걸 민족의식의 자각으로만 해석하지만, 실은 중심부-주변부에 대한 예민한 자각이 먼저다. 그게 포인트다. 기노시다 자신이 차별받는 식민지의 지식인이라는 것, 일본 역시 서양문명의 주변부라는 인식 속에 새로운 길을 떠난다고 해석해야 옳다.)
-1980년대 민중-민족문학 상황에서 다른 길을 선택한 배경이 좀 이해됩니다. 그래도 남는 의문은 <비명을 찾아서> 주제는 결국 민족주의 아닙니까?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1980년대 권위주의 정부에 대한 비판이 먼저였습니다. 그리고 민족의식이란 게 식민지 상황에서는 긍정적 에너지이지만, 독립 이후 잘못하면 눈먼 민족주의로 발전합니다. 얼마 전 문제가 됐던 역사교과서 문제도 그렀습니다. 친북 반미의 그 교과서는 민족주의 정서가 짙게 깔려있습니다. 그걸 비판하는 우파 쪽 사람도 혹시 민족주의를 바탕에 깐 채로 저들을 공격하는 건 아닌지를 잘 점검해야 합니다.”
-공감합니다. 우리시대 최대문제는 과잉 민족주의라고 저도 보는데, 그건 다음 기회에 다시 다루고 문학 얘기로 돌아갑니다.
“그 시대 메이저 라이터, 즉 주요 작가란 게 뭡니까? 그건 태어나 살고 있는 그 사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는 사람을 뜻합니다. 찰스 디킨스가 그 예입니다. 산업혁명 시기 영국의 움직임을 가장 기민하게 다루는데 성공했거든요.”(실은 조지 오웰도 그러했다. 20세기 초중반 인류 삶을 전방위에서 옥죄는 전체주의 체제가 등장했을 때 그걸 정면에서 다룬 게 <동물농장>과 <1984> 아니던가? 복거일은 자신도 오웰의 군더더기 없는 에세이의 글 스타일에서 많은 걸 배웠다고 말했다.)
-우리 문단에서 그런 작업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저에 앞서서 주변부 문명권인 한국사회의 문제를 인식했고, 성공적으로 문학작품에 담았던 분이 <광장>과 <회색인>의 최인훈 선생이죠. 저는 그 분을 위대한 작가로 아무런 조건이 없이 인정합니다. 최인훈 선생도 그렇고 저도 결국 같은 걸 보았던 겁니다. 그건 기자 출신 평론가 고종석씨도 그건 마찬가지이겠구요. 그런 이유로 저는 최인훈 선생의 그늘에 가리겠지만, 복거일도 우리시대 주요 작가의 하나로 꼽힐 것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최인훈 선생을 누가 감히 폄하하겠습니까? 단 저는 그 정도로 높이 평가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는 좀 유보적입니다.
“아니예요. 우리시대 그분만큼 다차원의 층위를 가진 작가는 없습니다. 그 분이 프랑스에서 태어났더라면 장 폴 사르트르 이상 가는 작가로 자리매김됐을 겁니다. 지식인 소설의 전형이지만, 스토리텔링도 뛰어나세요. 그 생경한 관념을 그 정도로 우려낼 수 있는 솜씨는 저는 도저히 못 따라갑니다. 특히 <회색인>이 중요한 작품이라고 저는 봅니다.”
-그럼 <광장>은 상대적으로 떨어집니까?
“왜 우리 시골에서 장남을 보고 문열이라고 하잖아요. 문을 열고 나오느라고 키가 작습니다. <광장>은 권위주의 정부인 이승만 정부가 붕괴된 직후 등장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억압 속에 만들어졌다면, <회색인>은 그런 게 없습니다. <광장>이 프랑스어로 번역돼 서구에 소개됐지만, 실은 <회색인>이 더 큰 보편성을 가졌을 것이라는 게 제 소견입니다.”
-최인훈은 1980년대 이후 민족문학 민중문학으로 흘러간 문단 상황 속에서 저평가됐고, 지금은 더욱 그런 느낌입니다.
“맞아요. 현실변혁에 복무하는 리얼리즘 문학에 너무 경도된 탓입니다. 사실 그 분이 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보세요. 소설가 박태원의 소설을 패러디한 작품인데, 큰 사건이나 드라마도 없으면서도 독자를 빨아들이잖아요. 희곡은 또 어떻습니까?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등은 걸작입니다. 도대체 그 분이 손대지 않은 게 없으니 제가 농담 삼아 말하곤 합니다. ‘저주 받을진저! 나보다 먼저 태어나 내가 할 일을 미리 모두 해낸 사람이여!’”(웃음)
-최인훈이나 복 선생님의 작품에 정면에서 다루는 평론가도 요즘 드물죠?
“사실이죠. 최인훈 선생은 그 분을 열렬하게 옹호했던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의 덕을 크게 봤죠. 저의 <비명을 찾아서>가 빛을 본 것도 그 분 덕입니다. 완전히 무명의 작가 지망생이던 저를 동격(同格)의 지식인으로 기꺼이 받아준 것도 그 분이요.”
-최인훈-복거일 저평가 분위기는 지식사회 전반이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변화된 탓도 큽니다. 어느 때인데 민중문학-민족문학의 힘이 여전합니다. 특히 백낙청이 주도하는 창비 진영의 헤게모니가 문제입니다.
“제가 등단한 1980년대 후반부터 그런 기운이 강했습니다. 창비 진영도 그랬지만 무크지 <실천문학>이 더 맹렬했죠. 타계한 문학평론가 채광석의 목청이 그중 높았는데, 그들은 문학은 현실변혁에 복무해야 한다고 외쳤더랬습니다. 그런 민중문학은 소비에트의 레닌이 주창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변형에 불과하잖아요? 그래서 제가 중앙일보에서 펴내는 문학잡지 <문예중앙>에 ‘문인이 자존심도 없는가, 문학은 자율적인 영역이다’라고 연신 주창했던 겁니다. 물론 그 때문에 저는 미운털이 더 박혔을 겁니다.”
-저는 창비 진영의 자기 쇄신이 없고서는 우리문학의 풍토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보는 쪽입니다. 너무 오래 고이면 결국 썩는 거 아닙니까?
“백 선생과 관련된 재미있는 얘기 하나 더 할까요? 시인 김수영의 유명한 작품 ‘거대한 뿌리’는 알고 보면 창비 진영 특유의 국수주의 이념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한 번은 백 선생 앞에서 김수영을 대놓고 비판했어요. ‘말년에 그런 시를 쓴 김수영은 사상적으로 파산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랬더니 백 선생이 ‘그 비판은 내가 못 참겠네’하면서 반론하시더라구요. 어떻합니까? 대꾸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서 참고 말았죠. 어쨌거나 창비와 한국사회는 국수주의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합니다.”
-사실 1970년대 이후 문학권력을 휘둘러왔고, 문단이 반(反)지성주의로 타락하는데, 백낙청이야말로 책임을 져야 할 사람입니다.
“글쎄요. 제가 어떤 잡지 인터뷰에서 젊은 작가들에게 들려주는 말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총 쏘는 솜씨는 좋아졌지만, 막상 그들이 손에 쥔 것은 새총에 불과한 게 아니냐?’ 제 눈엔 그들의 문제의식의 크기가, 민족주의와 만중주의로 갇혀있는 그들의 시야가 만족스럽지 않은 겁니다.”
-매우 함축적입니다. 그건 그렇고 문단의 구조 때문에 외롭진 않으세요?
“사회적 소수가 분명하지만 생각만큼 외롭거나 힘들지 않습니다. 글만 써서 먹고 살아왔으니 외려 영광이죠. 얼마 전 한 30대 여성작가 한 분이 저에게 ‘선생님을 극복하는 게 제 문학의 목표입니다’라고 하더군요. 제 작품을 꼼꼼히 읽어왔다는 얘긴데, 그 역시 고마운 일입니다.”(그 말은 절반만 맞는 소리다. 간혹 그가 한국사회에서의 자기 위상을 망명객에 비유했던 걸 선명하게 기억하기 때문이다. 지식생태계의 균형에도 좋지 않은 상황이 분명하다.)
-혹시 제가 선생님의 문학과 사회평론, 과학 평론 등을 통틀어 본 결과 복거일은 지적 거인, 흔한 말로 천재라고 한다면 기분이 어떠세요.
“얘기가 여기까지 온 상황에서 팔스 모디스티(false modesty), 즉 괜히 겸손한 척하진 않겠습니다. 제가 뛰어나다는 걸 저 스스로 압니다. 교만해서 그런 게 아닌데, 젊을 적 문자를 세우자는 결심 이후 저는 정말 많이 압니다. 물론 뭘 잘 모르는 이들이 뭐라고 떠들어도 저는 그냥 웃어넘깁니다. 단 정말 친한 친구들이 ‘사람 능력이란 게 결국은 그게 그거 아니야?’라고 말하면 저는 준열하게 따집니다. 야구 천재 양준혁의 진가를 알려면 적어도 프로야구 선수쯤은 되야 한다고 일러주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 아세요? 역설인데, 진정 뛰어난 사람은 세상과 사람 앞에서 정말 겸손합니다.”
-흥미롭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느 때가 그렇습니까?
“진짜 강자를 만날 때 겸손해집니다. 그 앞에서 누구나 절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왜 저를 이렇게 평범한 인간으로 만들었습니까?’하고 하늘을 향해 원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 마주하는 겁니다. 저의 경우 지식을 추구하고, 문자를 세우는 과정에서 두 명의 걸출한 천재를 만났다는 걸 고백합니다. 그 한 분이 존 폴 노이만이란 수학자입니다. 노이만은 모든 디지털 컴퓨터가 채택하고 있는 기본틀을 마련했던, 실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전 이름도 처음 들어봅니다. 그런데 또 한 분은 누구죠?
“그게 진정 위대한 경제학자이자, 제가 자유주의의 영원한 챔피언이라고 이름 붙인 루드비히 폰 미제스입니다. 우리 사회에 재벌-대기업만큼 부정적인 단어도 없지만, 그건 약간의 지적(知的)투자를 할 경우 자본주의에 대한 편견에 불과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걸 알려준 사람인 미제스는 1917년 레닌의 소비에트 체제가 채 만들어지기도 전에 대예언을 합니다. 시장경제가 없는 경제시스템은 결코 존속할 수 없고 망한다는 것이죠. 시장이라는 메카니즘이 없으니 정보처리도 안 되고, 부의 축적이 불가능하다는 논리입니다.”
-진정 놀라운 겁니다. 코앞의 체제에 대한 분석도 쉽지 않잖아요. 어떻게 미제스는 탄생 직전의 소비에트체제에 대해 역사적 예언을 하죠?
“그러니까 저 같은 평범한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거인이 그 분입니다. 어쨌거나 저는 정말 절친한 친구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좀 많이 아니까 거꾸로 겸손할 수밖에 없더라’라구요. 잘난 사람만이 겸손하다는 역설은 그래서 나옵니다. 물론 저는 사람 차별을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차이란 저 높은 차원에서 보면 실로 아무 것도 아니거든요.”
▲ 복거일선생은 <소월시집>과 <포콧 옥스퍼드 영영사전>외에 폴 새무얼슨의 <경제학>이 ‘내 인생의 책’ 세 권이라고 말했다. 그는 진짜 강자를 만났을 때, ‘하나님, 왜 저를 이렇게 평범한 인간으로 만들었습니까?’라며 하늘을 향해 원망한다고 했다. |
우리 대화는 일단 여기까지다. 인터뷰 직후 그를 좀 안다고 생각했던 오만을 접고 그의 주요 책을 추가로 구입했다. 원고 정리를 하면서도 자주 그에게 전화했다. 대화 중 못 알아들은 걸 확인하는 작업이자, 새로운 걸 접하는 또 한 번의 즐거움을 맛보았는데, 그중 인상 깊은 게 평론가 김현과의 유대감 표명이다. “김현 선생도 토종 학자 아닙니까? 유학 간 게 아닌 그 분도 야심이 아주 컸어요. 태어난 곳은 주변주 문화권이지만, 중심부로 나가야 하고, 그걸 위해 각자의 재능을 활용하자고까지 말했을 정도였습니다.”
인터뷰 직후 자전소설 <보이지 않는 손>을 읽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는 자신의 문학의 스승인 김현에게 이 책을 헌정했다. 그 책 뒤에서 김현의 다음 발언을 발견했다. 소설가 최인훈에 바쳐진 김현 스타일의 멋진 찬사였다.
“최인훈은 (프랑스 사상가) 줄리앙 방다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적 성직자’이다. 성직자에겐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하는 게 예의이다.”(278쪽) 이걸 패러디해 나는 이렇게 말하려 한다. “복거일 역시 지식의 성직자가 맞다. 세상의 홀대에도 불구하도 나는 기꺼이 모자를 벗는다.”
사실 우리사회 문제를 큰 시선으로 보려했던 스케일 큰 사람들은 조선시대에도 없지 않았다. 백호 임제(林悌 1549~1587)가 그랬다. 죽을 때 그는 말했다. “세상에 스스로 황제를 칭하지 않은 나라가 없는데 유독 우리만 그러지 못하니, 욕된 나라에서 태어나 죽는 게 뭐가 아까운가? 곡을 하지 말라.” 헌헌장부의 그 한마디가 복거일의 목소리와 섞여 귓전에 왕왕댄다. 참고로 임제는 황진이 무덤 앞에서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가 누웠는가” 시조를 지었던 상남자이다.
이런 메시지에서 많은 암시를 받고, 복거일마저 넘어설 야심찬 젊은이를 나는 기다린다. 그렇게 자식을 키워내고 싶은 담대한 젊은 엄마들도 함께 기다린다. 아니 복거일이란 거울을 통해 우리의 앎과 삶을 비춰볼 멋쟁이들을 나는 원한다. 실은 복거일의 지식여행을 따라가느라 숨이 벅차서 <소월시집>과 <포콧 옥스퍼드 영영사전>외에 ‘내 인생의 책’ 세 권을 미처 언급 못했다. 폴 세뮤얼슨의 <이코노믹스>(경제학)가 세 번째이다.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경제학 교과서이기 때문이고, 이 책을 통해 학문하는 틀을 배웠다. 네 번째가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 좀 뜻밖이다.
“작가가 정직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무엇보다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걸 배웠다”고 함축적으로 말했다. 작가 노만 메일러가 “나는 이걸 읽고 성(性)문제에서 자유로와졌다”고 했다는 말도 전해줬다. 마지막이 진화생물학의 대중화에 이바지한 로렌 아이슬리의 책 <광대한 여행>이다.
<미니박스> "영어의 벽을 넘어야 우리 미래가 보인다?"
-여전히 뜨거운 감자 복거일의 영어 공용화론
복거일을 만나기 전 시인 문정희 선생과 통화할 일이 있었다. 지나가는 말로 “요즘 복거일 선생의 책을 읽으며 전에 없이 심취해있다”고 말했더니 그가 반색했다. 범속하기 이를 데 없는 한국문단에 그 같은 분이 있다는 것 자체가 위안이라고 했다. 영어 공용화론에 대해서도 찬성이었다. 모국어를 신앙처럼 섬겨야 할 시인의 입에서 뜻밖의 지원사격이다. “많은 분들이 착각하는데, 외국어 하나 정도를 구사하는 건 시 쓰는 데에도 훨씬 유리해요. 1998년 영어공용화론 논쟁 때 TV토론에 나가 제 소신을 밝힌 뒤 엄청난 항의와 욕설이 쏟아지더라구요. 그래도 제 생각은 변함없죠.”
그만큼 영어공용화론은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복거일빠’인 나야 당연히 그걸 지지한다. 그가 16년 전 이 문제를 들고 나온 배경도 이젠 다 알 듯하다. 우릴 정복한 문명과의 지식정보 격차가 아직도 어마어마한 마당에, 그래서 한국의 국제경쟁력이 떨어지는 국면에 호랑이굴에 뛰어들어 정면승부를 하자는 전략적 노림수가 영어공용화론이다. 사실 효율적인 영어를 구사하지 못해 우리가 받는 사회적 손해는 어마어마하다. 젊은 엄마들이 아이들 영어교육에 목매는 것도, 기를 쓰고 유학을 보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 자식은 피해가 없도록 하자”는 심리인데, 그것 자체가 잘못일 리는 없다. 복거일이 쓴 <영어를 공용어로 삼자>를 보니 국제어인 영어를 못해 당하는 사례가 흥미롭다.
예전 빅리거 박찬호가 그랬다. 한 번은 코치가 그에게 “흥분을 좀 다스려!(Control your emotion!)” 했다. 그걸 듣고 박찬호는 엉뚱하게 투구 동작을 바꾸기 시작했다. “동작을 바꿔!(Control your motion!)로 잘못 알아들은 탓이다. IMF 때도 그랬다. 영어 좀 하는 이로 뽑았던 우리정부 대표단은 현지에 가서 회의할 때 용어와 개념을 몰라 허둥댔고, 그래서 미국인변호사를 투입해야 했다. 영어를 몰라 입는 피해는 개인과 사회 전체다. 결정적으로 선진국과 우리 사이의 정보격차는 여전히 까마득하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영어공용화론은 꺼내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운 일로 치부된다. 모국어인 한국어가 상대적으로 밀리게 되고, 민족문화의 맥이 끊긴다고 난리다.
복거일은 말한다. 한글이 다소 밀리게 되겠지만, 민족문화가 끊기거나 위축되는 일은 거의 없다. 그건 기우에 불과하다. 일테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서 받는 감동은 원어인 러시아로 읽어도 되고, 우리말이나 영어 번역으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한국현대사에 관한 좋은 영어책이 없어서 국제무대에서 한국이 당하는 서러움도 많은데, 영어 공용화는 이런 장애를 없애주니 장점은 더 많다. 사실 싱가포르가 일찍이 영어를 공용화해서 국가경쟁력을 올렸다. 일본은 1999년 영어를 제2공용어로 하자는 ‘21세기 일본의 구상’ 보고서가 나온 뒤 논의가 진행 중이다. 우리도 이 문제를 진지하고 전략적으로 다시 생각해볼 시점이 지금이다. /조우석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