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는 다양한 원인이 작용한다. 인류 역사상 태초 전쟁이 식량의 문제였다면 이후에는 자원 즉 에너지의 전쟁이라고 불릴 만하다. 일본 우익은 1941년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 것은 에너지 확보를 위한 전쟁이었다고 주장한다. 미국이 석유 수출을 금지하자 생존을 위해 전쟁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1990년 8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시작된 걸프전의 이유도 석유였다. 물론 그 이면에는 다양한 요인들이 작용했겠지만 그만큼 세계는 에너지 확보를 위한 전쟁터임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북한의 핵 도발에 대한 대북제재의 가장 효과적 방법 역시 석유 공급로 차단이다. 에너지가 곧 국가 안전 보장의 필수요건임을 증명하는 역사적 사실들이다.
한국의 원전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자화자찬이 아니라 미국·유럽의 인증기구가 거듭 확인시켜 주고 있다. 한국 표준형 원전 'APR-1400'의 유럽 수출형 모델인 'EU-APR' 표준설계가 유럽사업자요건(EUR) 인증 본심사를 통과했다. 프랑스·러시아·미국·일본에 이어 다섯 번째다. 원전 기술이 한국의 미래 자원임을 세계가 인정한 것이다.
2002년 개발된 APR-1400은 2009년 아랍에미리트(UAE)에 수출한 바카라 원전, 공사 중단된 신고리 5, 6호기의 모델이다. 앞서 APR-1400은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 설계인증 심사 3단계를 통과했다. 원전 강국 일본은 신청 10년이 지나도록 겨우 1단계를 넘었다. 프랑스는 중도에 포기했다. 그야말로 '바늘구멍' 통과를 한국이 눈앞에 두고 있다.
원전 업계는 향후 30년간 원전 시장 규모는 600조원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문제는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이다. 전문가들은 "탈원전은 세계 최고 경쟁력을 갖추고도 600조원 규모 원전 시장을 우리 스스로 걷어차는 격"이라고 꼬집는다.
신고리 원전 5,6호기의 건설 중단에 대한 공론을 도출할 공론화위원회는 7월24일 출범한지 석달만인 10월20일 최종 권고안을 발표한다. 사진은 현대건설이 시공한 신고리 원전 1,2호기 전경./사진=한국수력원자력 제공
한국원자력산업회의에 따르면 한국 원전 산업은 매출 2015년 기준 26조6000억 원에 투자 규모는 8조 원이 넘는다. 종사하는 인력도 3만5000여명에 이른다. 수출과 일자리 모두를 잡는 두 토끼 산업이다. 탈원전 정책은 일자리와 혁신성장을 부르짖는 문재인 정부의 이중행보이자 역주행이다.
9일 한수원은 유럽 수출형 원전인 EU-APR가 유럽 사업자 요건 인증 본심사를 통과하는 쾌거를 이뤘다며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반면 하루가 지나도 산업통상자원부는 공식적인 견해조차 내놓지 않았다.
따가운 눈초리를 의식했음일까 10일 산업부는 백운규 장관 주재로 원전 공기업·수출금융기관·건설사 등 17개 기관이 참여하는 '원전수출전략협의회'를 개최하고 "국익에 절대적으로 도움이 되는 원전 수출 사업은 지속한다"고 밝혔다.
탈원전을 선언하고 자국에서는 짓지 않겠다는 원전을 어느 나라가 발주할까. 원전 수입국 입장이라면 불신감을 씻을 수 없다. 탈원전과 별개로 원전 수출은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힌 것은 그야말로 '이율배반'이라는 지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원전 수출은 국가적 사업이고 역대 정부가 선도적으로 사업을 추진해왔다. 세계 최고 수준의 원전 기술 보유국임을 세계가 인정하고 있지만 우리 정부만 애써 외면하고 있다. 한국 정부의 탈원전 정책이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내치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잇따른다.
지금 유럽에선 영국·체코·폴란드·스웨덴 등에서 원전 발주를 추진하거나 검토 중이다. 영국이 추진 중인 원전 사업비만 21조원에 달한다. 경제성장을 위해 대규모 전력을 필요로 하는 중국·중동·아프리카 등에서 원전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우리 정부로서는 호기다. 하지만 정부의 탈원전 정책이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높다.
2009년 우리나라는 독자 개발한 차세대 원전 모델(APR 1400) 4기를 186억 달러(한화 약 21조 원)에 UAE로 수출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수출 규모는 중형 승용차 100만대, 초대형 유조선 180척을 수출하는 것과 맞먹는 금액이었다. 원전 수출 경험이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7국 정도에 불과하다. 서방 원전업체들이 위기를 겪으면서 중국·러시아·한국 등이 각축을 벌이고 있다.
부가가치도 크다. 한전은 지난해 10월 UAE에서 바라카 원전 운영·관리와 전기 판매를 통해 60년간 494억 달러(56조 원) 매출을 올리는 계약을 따냈다. UAE 원전 건설 사업 수주액(186억 달러)보다 훨씬 큰 규모다. 한국은 원전 건설부터 운영·관리까지 아우르는 '풀 패키지 사업 모델'을 구축해 기존 원전 강국과 차별화된 수출 경쟁력을 확보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러시아는 작년 말 현재 원전 20기, 1330억 달러(약 149조 원) 규모의 수출 계약을 맺거나 계약 체결을 앞두고 있다. 가장 늦게 원전 기술을 도입한 중국은 2015년 개발한 3세대 원자로 '화룽 1호'를 주력 수출 원전으로 삼고 있다.
중국은 향후 1조 위안(약 166조 원) 수출을 예상하고 있다. 미국과 EU, 일본의 퇴장과 경쟁력에서 뒤처진 프랑스를 제외하면 세계 원전 시장은 한국 러시아 중국의 삼파전이다. 탈원전 정책으로 한국이 빠지면 러시아와 중국의 독무대가 된다.
원전은 핵 안보 치원에서도 중요하다. 때문에 탈원전 정책은 산업적 측면뿐만 아니라 군사적·외교적 잠재력을 스스로 버리는 행위라는 비난도 나오고 있다. 더욱이 세계에서 안보가 가장 위태로운 나라에서 원자력 선진 기술과 인력을 사멸시키는 건 자해행위나 다름없다는 지적이다.
이번 주말이면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위원회 논의 가닥이 잡힌다. 건설 중단 쪽으로 결론이 나면 그동안 쌓아 온 국내 원전산업 기반은 한순간 무너진다. 수출도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세계가 인정한 최고의 기술이 국내에서만 찬밥 신세다.
문재인 정부는 이제라도 탈원전 정책을 되짚어 봐야 한다. 공론화위원회라는 비전문가들의 목소리보다는 전문가와 국회에 넘겨 에너지 백년대계와 함께 장기적 안보 측면에서 다뤄야 한다. 안보를 위태롭게 하고 경제를 위축시키는 정책보다 더 큰 적폐는 없다. 오늘의 책임 없는 잘못된 정책이 곧 내일의 적폐다.
[미디어펜=편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