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없는 헌신, 오직 대한민국의 수호와 영광을 위하여". 국가정보원의 원훈이다. 국정원은 대한민국 안보와 직결된 정보를 다루며 음지에서 일한다. "보안을 목숨같이 여기고 직무상 비밀은 끝까지 엄수한다"는 문구는 직원헌장에 나오는 행동 강령이다.
그런 국정원이 만신창이가 되고 있다. 박근혜 정부에서 국정원장을 지낸 남재준(73), 이병호(77), 이병기(70) 국정원장에 대해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전 정권의 국정원장 3명 모두가 교도소에 갈 상황이다. 한 정권의 정보기관 수장이 줄줄이 포승에 묶이는 건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일이다.
검찰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시로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청와대에 전달한 혐의로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국고손실과 뇌물 공여 및 국정원법 위반혐의를 공통으로 적용했다. 적폐청산이라는 과거와의 전쟁이 국가안보를 위험수위로 내몰고 있다.
국정원 핵심 서버의 특수정보비까지 뒤져 전직 국정원장은 물론 전직 대통령을 향해 검찰의 칼끝이 겨눠지고 있다. 국가정보는 정권이 바뀌었다고 정당성과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각에서는 '현대판 사화'의 피바람이 불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조선시대 정치적 반대파의 공격에 의해 화를 당하던 선비들의 흑역사를 빗댄 것이다.
전직 국정원장들의 수난과 몰락은 착잡함을 넘어서 우려를 자아내게 한다. 오직하면 검찰 안팎에서도 "정보수장들은 청와대 지시로 일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데 모두 엄벌하려는 건 무리"라는 지적이 나올까. 공무원은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 상관의 지시나 요구가 부당하거나 위법하다는 것을 일일이 가려 업무를 수행하기에는 쉽지 않다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특활비 상납' 의혹과 관련해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된 이병호 전 국정원장은 지난 10일 검찰에 출석해 "국정원 강화가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고 밝혔다./사진=연합뉴스
공직자들 대부분은 권력과 정권의 부침에 따라 권력자에 의해 기용돼 그 자리에 앉는다. 문재인 정부도 캠코더 인사라는 항간의 비난을 받는 이유다. 헌데 그런 이유만으로, 또는 관행을 이겨내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싸잡아 법적 책임을 묻는 건 법적 편의주의지 법치가 아니다.
성역없는 수사는 당연하다. 그러나 성역은 있다. 조선시대 왕도 사초를 들여다 볼 수는 없었다. 그걸 무시한 왕은 결국 불명예 퇴진했다. 권력은 한 순간이지만 역사는 기억하고 반추한다. 국정원의 정보는 국가 안위와 밀접하다. 이 정부의 과거 헤집기는 조선시대 사초를 들여다보면서 부관참시를 불러온 잘못된 역사의 수레바퀴를 연상케 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가정보기관의 수장이 처벌받거나 수사 대상에 오르는 일이 반복될까 걱정된다. 국가기밀이 적폐청산이라는 미명하에 무차별적으로 누설된다면 그 부작용은 엄청나다. 조직의 기능 마비는 필연적일 테고 누가 능동적으로 일할까. 대한민국 국정원이 무너지는 건 외부 정보기관과의 단절을 뜻한다. 대한민국의 현 국정원이 털리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 CIA가 고급 정보를 줄 리가 없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카오스 공작활동이나 FBI의 코인텔프로(COINTELPRO)는 악명 높은 인권유린의 정보활동이었지만 형사처벌로 단죄되지 않았다.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무차별 감시, 위장 침입과 불법 수색, 혐의 조작, 거짓 통신은 준 군사작전은 연상할 만큼 혀를 내두를 만했다. 그러나 진상을 조사한 의회 처치위원회(Church Committee)는 목적의 정당성과 애국심이라는 정보기관의 특수성을 인정해 제도 개선으로 마무리했다.
다시 한 번 돌아보자. 우리 정치 구조에서 대통령 지시를 거부할 수 있는 국정원장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적폐청산을 부르짖는 지금 여당이나 청와대 공직자 누구를 붙잡고 물어봐도 그렇다고 못 할 것이다. 지금의 적폐청산이 미래의 적폐청산 대상이 되지 않으리라곤 누구도 자신할 수 없다. 그게 역사다.
잘못은 바로잡는 게 맞다. 그러나 이 정도 혐의를 갖고 국정원장들과 안보실장들을 싸잡아 감옥에 넣겠다고 하는 것이 과연 정상인가. 더구나 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각각 합참의장, 국방장관, 안보실장을 지낸 김관진 전 실장의 포승줄에 묶인 모습은 절망을 넘어 남북 대치상황에서 정상인가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김관진 전 실장은 북한 김씨 왕조가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대한민국 군인이다. 지난 13일 중국 국영 CCTV가 포승줄에 묶인 김 전 실장의 사진을 배경으로 '사드 배치의 주역이 구속됐다'고 보도했다. 그걸 지켜보는 김정은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할까.
한반도는 지금 신냉전 시대에 돌입했다. 북핵·미사일 위기가 고조되고 중국은 사드보복으로, 미국은 군사동맹을 위심하고 있다. 한반도 주변 정세 변화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정보전을 요구하고 있다. 날로 급증하는 사이버 공격 위협과 국제 테러 조직의 움직임에도 안전지대가 아니다.
대공·방첩 책무는 날로 중요해 지고 있다. 사이버 테러 방지법 제정 등 국정원이 일할 수 있는 여건의 발목을 잡은 건 현 집권세력이다. 야당 때부터 반대해 온 오래된 과제다. 특수활동비가 잘못 사용된 부분이 있다면 시정돼야 한다. 하지만 국가 안위와 관련된 정보활동을 이렇듯 쓰레기통으로 처박아야 할 만큼 몰아치는 것에는 의문이 남는다.
노무현 정부 시절 김만복 국정원장은 2007년 12월 17대 대통령 선거 하루 전에 '기념 식수 표지석'을 설치한다는 이유로 방북했다. 후에 북한 통일전선부장과의 대화록 등을 언론에 유출했다. 지금과 같은 엄밀한 잣대를 들이대면 적지 않은 불법적인 행위와 자금 유용이 있었겠지만 김 전 원장은 처벌을 받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다. 보이는 군사력보다 보이지 않는 정보력이 중요한 때다. 적폐 청산이란 이름하에 조선시대에도 있을 수 없었던 사초를 입맛에 따라 흘리는 건 자만이자 오만이다. 안보의 첨병에 있었던 이들이 가진 정보는 그야말로 '탑 시크릿'이다. 이걸 쇠고랑 채우는 행위는 그야말로 자해행위다.
대한민국 최고의 정보수장에 있었던 사람들을 싹쓸이 하듯 포승에 묶는 것이 과연 문재인 정부의 정의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현 정권은 과거 얼마나 이들보다 정의롭고 투명했는지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들 수 없다. 적폐청산이라는 이름하에 칼을 휘두르는 검찰은 과연 정권의 눈치를 보는 정치 검찰, 권력의 시녀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를 돌아봐야 한다.
국정원장이나 국가안보실장은 대한민국 안보를 최일선에서 책임졌던 사람이다. 이들을 모조리 감옥에 보내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이 상황은 대체 무엇인가. 상상을 초월하는 검찰공화국 대한민국에 안보는 안 보인다. 안보가 수갑을 찼다.
우려스럽다. 안보를 검찰이 책임질 건가. 적폐 청산이라는 이름으로 무소불위의 칼을 휘두르는 이들은 과연 또 다른 적폐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 아닌지 우려스럽다. 교각살우의 두려움이 엄습한다. 적폐청산으로 역사는 사라지지 않는다. 역사는 기억되고 남는 것이며 공과는 또 다른 역사가 평가한다. 포승줄만 기억하는 5년 후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미디어펜=편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