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시끄럽다'는 것이다. 북한 중국 등 일당 독재국가의 당대회를 보면 일사불란하다. 안건을 회부하는 과정에 대해 찬반을 물으면 '100% 찬성'이다. 반면에, 현대 민주주의의 산실이라고 하는 영국 의회의 회의 과정을 보면 의원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 의견을 내는 데 정말 시끄럽고 소란스럽다.
민주주의가 이렇게 시끄러운 이유는 사회의 온갖 정치집단 이익집단은 물론 일개 개인까지 '내 말을 들어봐!'라고 외치기 때문이다. 사회가 여러가지 이익집단이나 결사체로 이뤄져 있으며 국정은 '권력을 잡은 사람 즉 권력엘리트' 뿐만 아니라 다양한 집단의 경쟁 갈등 협력에 의해 민주주의적으로 운영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상이 다원주의(pluralism, 多元主義)다.
다원주의자들에 따르면 사회는 오히려 여러 상충되는 목표를 가진 수많은 이익집단들로 구성되거나 특별한 문제를 중심으로 일시적으로 연합하는 변화무쌍한 연합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 정치학자인 알렉시 드 토크빌은 "민주주의는 정치체제가 아닌, 조건의 평등을 핵심으로 하는 사회적 상태다. 조건의 평등은 자유로운 사회에서 수많은 결사체를 낳아 다원적 사회구조를 창출하고, 그렇게 다원화된 권력과 사회경제적 자원이 다시금 개인 자유의 공감을 확대한다"는 식으로 해석했다.
다원주의가 무작정 민주주의의 실현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다원주의는 단순한 다양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원주의가 제대로 작동되려면 이익집단과 결사체 간에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내는 화학적 결합이 이뤄져야 한다.
하버드대의 다원주의 프로젝트는 자신들의 웹사이트에서 "다원주의는 단순히 다양성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며, 실제로 서로 마주치면서도 관계를 맺지 않는 단순한 다양성은 우리 사회에서 갈수록 많은 긴장을 낳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원주의 프로젝트는 이어 "다원주의는 고립된 상태가 아니라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한 다원주의는 대화와 호혜관계, 비판과 자기비판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며 대화는 말하는 것과 듣는 것 둘 다를 의미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의 뉴욕, 영국의 런던, 싱가포르 등 국제적으로 유명세를 떨치면서 강한 경쟁력을 갖고 있는 도시를 가보면 수많은 국가, 수많은 인종을 만날 수 있다. 세계 각국의 사람과 문화가 모여들어 그 도시의 경쟁력을 만들어낸다.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28일 서울 성북구청에서 '자치분권과 국민성장'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면서 "문 대통령을 지지하는 많은 분들에게 부탁드리고 싶다. 이견의 논쟁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는 발언을 놓고 문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안희정 지사를 향해 '적폐세력, 친일매국노, 꼰대'라는 표현으로 매도했다. /사진=연합뉴스
한국은 그럼 어떤가?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28일 서울 성북구청에서 '자치분권과 국민성장'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면서 "문 대통령을 지지하는 많은 분들에게 부탁드리고 싶다. 이견의 논쟁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이 하겠다고 하는데 네가 왜 문제제기를 하느냐는 애기를 하면 우리의 공론의 장이 무너진다. 도전과 토론을 허용하는 좀 더 고품격 지지자들의 교묘한 지지운동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그랬더니 문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안희정 지사를 향해 '적폐세력, 친일매국노, 꼰대'라는 표현으로 매도했다. "안희정 지사는 당장 정치를 그만둬야 한다"는 극언도 달렸다. 대한민국에 적폐세력이 또 늘어난 셈이다. 그만큼 적폐세력이 늘었으면 적폐가 아닌 '정말 도덕적이고 깨끗하며 정의로운 세력'은 크게 줄었을 터인데, 그럼 대한민국의 미래는 더욱 암울해지는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진보좌파의 사상적 스승이라고 일컬어지며 문재인 대통령과 진보언론이 크게 존경한다는 리영희 선생은 1974년 <전환시대의 논리>에 대해 자료 접근의 어려움과 정신주의에 과도하게 빠져 중국 문화혁명을 높이 평가한 대목은 오류였다고 고백했다. 1991년엔 사회주의의 공산주의의 실패를 예견하지 못한 것은 잘못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그렇게 '미안하다'고 외치면 그동안 그가 뿌려놓은 사상적 잘못은 용서받는 것일까?
하기야 지식인이나 일반 대중의 말에 대한 무책임과 편향적 사고는 대한민국만의 현상은 아니라는 점에서 위안을 찾을 수 있겠다.
영국의 철학자인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1930년대에 히틀러가 독일을 재무장시키고 있는 동안에도 영국의 일방적인 군비 축소를 옹호했다. 러셀은 육군 해군 공군의 해체를 요구할 정도였다. (이 대목에서 북핵과 미사일 위기 속에서도 평화를 추구한다면 사드 반대와 미군 철수를 외치는 사람들이 연상된다.) 미국의 문학평론가인 에드먼드 윌슨(Edmund Wilson) 은 미국인들에게 1932년 선거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찍으라고 촉구했다.
영국의 극작가인 조지 버나드 쇼는 1933년 미국을 방문해 '미국인들은 독재를 너무 두려워한다. 독재야말로 정부가 모든 것을 성취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인데도, 타락한 민주주의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라. 그런데, 왜 미국인들은 독재를 무서워하는가?'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들의 '헛소리, 헛주장'은 지금까지 그들의 명성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했다.
어떤 언론의 표현처럼 '당장의 정의는 칼을 쥔 자가 정의'할 수 있다. 역사의 정의는 세상의 진실이 정의하게 된다. 칼을 쥔 자들이 칼을 놓은 다음에도 자기들의 '정의의 사도'라고 외칠 수 있을까? 그때 가서야 뒤늦게나마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편향적이고 폐쇄적인 사고에 미안하다'고 한마디 하면 면죄를 받게 되는 것인가? /김필재 정치평론가
[김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