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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의 깃발' 우린 스스로 내릴 것인가

2018-01-17 10:20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조우석 언론인

지난 글에서 <대한민국의 설계자들-학병세대와 한국 우익의 기원> 저자 김건우와, 그 책을 띄운 매체를 전면 비판했던 건 나로선 불가피했다. 그런 책이 멀쩡한 양서로 둔갑해 읽힌다는 것 자체가 극히 유해한 지식환경이란 판단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 책 등장이 상징하듯 자유민주주의 퇴조가 우리 시대의 대세인양 등장한 느낌이고, 그래서 큰일이다.

언론-출판계만 아니라 정치권도 그렇다. 얼마 전 자유민주주의란 용어에서 '자유'를 떼 낸 개헌안 초안을 국회 헌법개정특위 자문위가 만들었다는데, 냉정하게 말하자. 나는 "올 것이 왔다"는 느낌부터 들었다. 사회민주주의로 나라를 바꿔도 되고, 인민민주주의식 통일도 괜찮다는 인식이 그만큼 보편화됐고, 이제 어떤 임계점에 막 도달한 셈이다.

국체(國體)를 바꾸려는 이 따위 소동에 난들 왜 분노하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미처 몰랐다"는 식으로 호들갑 떠는 언론과 야당의 반응도 개운했던 건 아니었음을 밝혀둔다. 지난 십수 년 세상이 그쪽 방향으로 흘러왔는데, 뒤늦게 개탄하는 척하는 모습이 무책임하거나 위선적으로 느껴졌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색깔 논쟁합니까?"
 
쉽게 말하자. 14년 전 북한 조선노동당출판사에서 발행했던 대외비 문서의 다음 대목을 음미해보라. "(6.15선언 이후) 이제 남조선에서 반공보수 세력에 비해 친북 연공(聯共)세력이 우세하다." 그건 대남 선전용 문건이 아니다. 반공을 누르고 친북 용공이 역전승했다는 게 오래 전 저들의 내부 판단이다. 이념의 운동장이 기운 건 벌써 20년 전후나 된다.

그 무렵인 16대 총선(2000년), 17대 총선(2004년)에 출마했던 당시 허화평 의원은 주변에서 이런 말을 귀 따갑게 들어야 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색깔이고 이념입니까? 그런 말을 할수록 젊은이 표가 떨어집니다." 그의 출마 지역은 포항이었다.

인구 50만에 평균 학력도 높아 서울의 축소판으로 불리던 고장이다. 근데 그때 이후 우린 무얼 했지? 없다. 무책임하게도 대한민국을 이 모양으로 방치해왔을 뿐이다. 그 결과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의 저자 김건우 같은 이들이 우익은 유죄이며, 중도-좌익만이 선하다는 도착된 사고를 학문의 이름 아래 거리낌 없이 강의실과 책 속에서 표출한다.

그리고 그런 책을 조중동 등 주류매체가 '올해의 책', '올해의 저자'로 선정하고, 우린 그저 희희낙락하며 산다.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을 읽어보며 놀란 것은 그런 책들이 생각 이상으로 세련됐다는 점이다. 적당히 현학적이고 글이 좋아서 젊은 먹물들의 마음을 훔치기에 썩 훌륭했다.

어디 그뿐인가? 요즘 거론 중인 국정원 개혁 문제도 마찬가지다. 국정원은 대공수사 기능을 상실하고 명칭도 바뀐다지만, 검찰의 대공 기능도 함께 마비될 판이다. 여기에 국방부 직할 기무사 해체까지 되면, 3대 공안기관의 대공 방첩기능이 궤멸된다. 그런데 포인트는 우리 마음속의 대공 방첩 기능 붕괴 현상은 예전부터 기정사실이란 점이다.
 

'자유'를 떼 낸 개헌안 초안을 국회 헌법개정특위 자문위가 만든 것은 임계점에 도달했음을 드러낸 것이다. 지난 15일 국회 본청에서 열린 헌법개정 및 정치개혁 특별위원회 첫 회의에서 김재경 위원장이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MB 중도실용 노선도 한나라당의 자책골
 
개헌안 통과와 상관없이, 국정원-검찰-국방부의 대공 방첩기능 궤멸 여부와 무관하게 '이념의 낙동강 전선'을 이미 무너졌다고 봐야 한다. 그게 2018년 초 우리네 현주소다. 얘기 하나 더 하자. 허화평 얘기는 지나가는 말이 아니라 그의 11년 전 책 <이념의 날개가 아니다>에 나온다.

이 흥미로운 책을 읽다가 놀랐던 건 따로 있었다. 흔히 이명박 전 대통령이 표방했던 이념인 중도실용주의 노선이 얼마나 싸구려인가를 말하고, 그것이야말로 자멸하는 보수우파의 현주소라고 지적해왔다. 흠칫 놀랐던 건 중도실용이란 모토가 당시 한나라당에서 짜낸 전략이고, 그걸 이명박이 받아들인 결과란 점이다. 허화평 책에 이런 인용이 등장한다.

"우리 사회의 중도와 진보의 합이 3분의 2를 넘어서 보수만으로 과반의 지지가 불가능하다. 중도실용주의 노선을 선점해야 한다." (여의도연구소 펴냄 <2007년 집권전략 보고서>). 당시 당 서열 3위 사무총장은 이런 미친 발언을 거침없이 했다. "그간 보수층 지지를 의식해 변화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보수란 표현을 아예 쓰지 말아야 한다."

반복한다. 이념의 낙동강 전선이 무너진 건 운동권 세력과, 운동권의 비선 실세인 김정은 세력이 잘했다기보다는 그걸 막아내고 수비해야 하는 입장인 우리가 잘못한 결과다. 자업자득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나도 낙관을 말하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하지만 근거 없이 그런 말을 하는 건 사기꾼의 행위일 뿐이다.

차제에 사상 논쟁의 큰 그림을 그리고 재정비를 할 판인데, 얼마 전 돌아가신 서울법대 박세일 교수가 이런 경고를 한 적이 있다. "사상전에서 이기지 못하면 집권할 수 없다. 국내 정당은 이익집단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건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을 향한 경고였지만, 지금 내 귀엔 그게 대한민국 전체를 향한 경고음으로 들린다.

"사상전에서 이기지 못하면 나라를 유지할 수 없다. 시민교육을 받은 바 없고, 촛불에 미친 대한민국 국민들은 국민 이전 수준에 머물러 있다." 지난 칼럼에서 나는 이렇게 밝혔다. "이민을 떠나거나, 아니면 대권을 잡아 이 나라를 바로 잡거나…. 요즘 나는 그걸 검토 중이다." 맞다. 그래서 근래 밤잠을 설친다는 사실도 함께 전해드린다. /조우석 언론인

[조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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