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동건 기자] '써니'(2011), '수상한 그녀들'(2014)의 연이은 성공 이후 영화계에서는 부쩍 심은경의 브랜드를 내세운 작품이 많아졌다. 심은경이라는 배우가 가진 에너지야 관객들도 기대하는 보증수표가 됐고, 로봇·좀비·해커 등 생물·무생물을 가리지 않는 캐릭터 연기에 본인도 적극적이었다.
그런 그가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에 물음표가 따라붙을 수도 있겠지만 '염력'은 심은경의 연기적 성숙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캐릭터가 가진 무게감이 느껴졌기 때문에 독특한 캐릭터성을 내밀면 오히려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루미는 드라마를 담당하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이야기와 함께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는 캐릭터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저도 캐릭터성을 미는 연기보다 자연스럽게 영화 안에 스며드는, 동화가 되는, 사실감 있는 캐릭터를 연기해보고 싶었는데 루미가 적합했던 것 같아요."
지난 24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영화 '염력'(감독 연상호)으로 돌아온 배우 심은경을 만났다. 지난해 2월 '조작된 도시' 천재 해커 여울 역의 강렬한 잔상은 온데간데없고, 청년 사장 루미를 닮은 듯 밝고 차분한 표정이 대신 자리하고 있었다.
'염력'의 배우 심은경이 미디어펜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매니지먼트AND
'염력'은 갑자기 초능력이 생긴 아빠 석헌(류승룡)과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빠진 딸 루미(심은경)가 세상에 맞서 상상초월 능력을 펼치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 부녀의 드라마가 작품의 정서를 지배하는 만큼 가슴이 아릿한 부분도 있었을 텐데, 전날 언론시사회를 통해 처음 출연 작품을 접한 심은경은 촬영 당시가 떠올라 마냥 즐겁기만 했단다.
"전 되게 재밌게 봤어요. 감성 신에서조차 촬영 때가 떠올라서 키득키득 웃었어요. 당시 류승룡 선배님의 초능력 연기를 보면서 감정 연기를 하기가 어려웠거던요. 앞에서 박정민 배우님과 스태프들은 자꾸 웃고 애를 먹었어요. 다들 '슬픈 장면인데 어떡하나' 하면서 웃었죠."
화기애애했던 촬영장이지만 촬영 초반에는 '걱정 병'이 심했다. 어느덧 데뷔 15년 차를 맞았지만 현장 인터뷰를 할 때면 늘 연기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던 심은경. '써니'·'수상한 그녀'로 진가를 톡톡히 증명하고 '최연소 흥행퀸'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뒤에도 혼란이 컸다. 늘 자신의 연기를 의심하고 고민했다. 오랜 기간 활동에도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나면 배우들이 겪는 성장통일 테다.
"내가 연기를 잘할 수 있을까, 내가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지극히 저에 대한 걱정이 컸는데, 감독님이 해주셨던 말씀이 큰 힘이 됐어요. '새로운 모습이 꼭 배우의 필모그래피에 중요할까'라면서 '심은경만이 가진 것과 잘할 수 있는 연기 톤을 적극적으로 응용해서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그 말이 오히려 새롭게 다가왔고, 감독님을 더 믿고 작품에 참여하게 됐죠."
'염력'은 '부산행' 촬영 당시 연상호 감독이 심은경에게 출연을 제안했던 작품이다. 심은경은 "'감독님, 작품에서 더 길게 만나 뵙고 싶어요' 했더니 감독님이 제가 주연작인 작품이 있다고 하더라. 아빠와 딸의 이야기라며 조만간 시나리오를 주겠다고 하셨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이후 시나리오와 함께 정식 제의를 받고 흔쾌히 출연을 결정하게 됐어요. 그렇지만 초능력이라는 소재가 어떻게 구현될까 쉽게 상상이 되진 않았죠. 감독님의 생각과 세계관을 온전히 이해하고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감독님이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부터 배우들의 톤 앤 매너, 연기 하나하나를 어떻게 그려낼지 모두 생각하셨더라고요."
연상호 감독이 하나부터 열까지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덕분에 배우들도 순조롭게 촬영에 임할 수 있었다. 여기에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서울역' 더빙으로 한 차례 호흡을 맞췄던 류승룡까지 합세해 더욱 마음이 놓였다.
"(류승룡)선배님이 한다고 할 때 마음이 많이 놓였고요. 역시나 호흡이 잘 맞았던 것 같아요. 미묘한 부녀관계도 끈끈하게 잘 표현된 것 같고. 류승룡 선배님은 제가 편하게 연기할 원동력이 돼주셨어요. 조언도 많이 해주시고 너무 따뜻하셔서 나도 이렇게 후배들을 챙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류승룡 선배님이 '은경이가 좋아하는 거 하면서 더 여유로워졌으면 좋겠다. 너무 잘하고 있다'고 격려해주셨는데, 그 말이 참 힘이 되더라고요."
'염력'의 배우 심은경이 미디어펜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매니지먼트AND
'염력'의 배우 심은경이 미디어펜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매니지먼트AND
그간 캐릭터 연기를 전면에 내세우거나 작품의 키 캐릭터로 등장, 짙은 인상을 남겼던 심은경이기에 루미라는 캐릭터는 지나치게 평범해 보인다. 하지만 심은경이 자신의 강점을 내려놓고 연기한 루미는 도리어 더 무게감 있게 다가온다는 게 평단의 공통된 의견이다. 이를 언급하자 심은경은 "연기를 하며 새롭게 다가왔던 부분은 있다"며 입을 열었다.
"현실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기존에 맡았던 캐릭터와는 반대되지만, 제 기존 연기와 차별화되진 않았을 거에요. 그렇지만 기존의 연기를 한 번 더 비틀고 응용했다는 게 연기하는 입장에서 너무 기뻤고 재밌었어요. 희열을 많이 느꼈죠. 그간 보여드리지 못했던 부분도 몇몇 있었고… 그런 것들이 새롭게 다가오긴 했지만 결국 판단은 관객분들의 몫인 것 같아요. 재밌게 찍었고, 즐기며 촬영했다는 게 고스란히 전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연기 고민은 아직도 여전하지만 마음가짐만은 크게 달라졌다. 그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 더욱 만족하기 어려운 것 같다"며 "아직도 잘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물음을 갖긴 하지만, 욕심을 많이 누르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제 재능을 한없이 의심하고 돌아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 일을 계속 해왔고, 현장에 있을 때 신나고, 연기를 하는 게 좋은데 이것만 갖고도 일을 이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그게 오히려 연기를 더 즐길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어서 부담감을 많이 내려놓으려고 하고 있고, 많은 걸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생각을 너무 많이 갖고 있었기 때문에 연기가 복잡했던 것 같기도 하고… 오히려 단순하게 바라보니까 진심을 담아 연기하게 되더라고요. 순간의 감정을 바라보게 되니까. 여백의 미라는 게 그냥 나오는 말은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연기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데 있어서도 그런 마음으로 임하고 있어요."
'염력'의 배우 심은경이 미디어펜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매니지먼트AND
과거에는 매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면 이젠 열심히 산 하루에 만족하고, 편하게 웃으며 걸어간다는 심은경이다. 지난 2016년 참여했던 독립영화 '걷기왕'처럼 '최고가 아니어도 괜찮고, 천천히 걸어가는 당신이 자랑스럽다'는 메시지를 자신에게도 끊임없이 던지고 있다. "포기는 나쁜 단어가 아니다. 긍정적인 걸음의 출발이라고 생각한다. 내려놓다 보면 다른 걸 얻게 되지 않나"라는 심은경의 말은 또래 청년들에게도 큰 힘이 될 것 같다.
"지난날의 저를 돌아보면 참 열심히 한 것 같아요. 열심히 안 하면 안 된다는 강박이 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내가 하는 일에는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이왕이면 더 즐겁게 하는 방식도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조금 더 즐기면서 할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아쉬움이 남아요. 전 경력이 많을 뿐이지 연기적으로, 인간적으로 많이 쌓여있는 상태는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고 생각하는데, 조급하게 가고 싶진 않아요. 천천히 즐기면서 가고 싶어요. 맛있는 거 먹고 좋아하는 거 하면서 재밌게 살아갈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염력'의 배우 심은경이 미디어펜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매니지먼트AND
심은경이 하루하루를 즐기는 방법은 그야말로 소탈하다. 작품 활동이 없는 기간에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묻자 그는 개그맨 고장환의 유행어를 몸소 선보였다. "잘 모르겠어요. 저의 실생활 최초 공개할게요."… 최초 공개된 사생활이 너무나도 단출해 웃음이 터졌다.
"동네 카페에 가서 2시간 정도 앉아있다가 와요. 음악 듣고 차 마시면서. 그러다가 연락 오면 메시지도 주고받고, 전화도 받고. 바람 쐬러 나와서 가만히 있다가 오는 것 같아요. 멀리 가긴 체력적으로 힘들고 날씨도 춥다 보니까… 친한 사람들과 있으면 정말 액티브한데, 저도 절 잘 모르겠어요. (웃음) 그렇게 액티브한 건 아니네요."
'염력'의 배우 심은경이 미디어펜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매니지먼트AND
류승룡·심은경의 부녀 케미가 돋보이는 '염력'은 오늘(31일) 국내 개봉하고 이후 넷플릭스에서도 방영될 예정이다. 미국 영화매체가 "'부산행'에 잠깐 등장했던 심은경, '동주'의 박정민 등이 출연한다"고 '염력'을 소개한 사실을 전하자 그는 "그 얘기는 처음 들었다"고 반색하며 해외 관객들에게도 많은 기대를 부탁했다.
"미국에서도 '부산행'의 심은경을 기억해주신다니 '땡큐'고요. 제가 말해놓고도 좀 그렇네요. (웃음) 너무 감사한 일이에요. 전세계 관객분들에게도 '염력'의 이야기가 통했으면 좋겠고. 아무쪼록 잘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와우, 판타스틱' 이랬으면 좋겠어요."
[미디어펜=이동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