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지수 책 <트럼프를 당선시킨 PC의 정체> 서평 <상>
동서 냉전이 끝날 무렵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자기 책 <역사의 종말>을 통해 자유민주주의가 인류역사의 종착역이라고 선언했다. 이데올로기 대결에서 공산주의가 패배했으며, 자유민주주의에 도전할 이념은 더 이상 없다는 확신이었다. 유감천만이다. 그게 섣부른 오판(誤判)이며, 좌우익의 전쟁은 더 교묘한 방식으로 전개 중이라는 게 지난 십수 년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이후 공산주의 악령은 음험한 얼굴을 숨긴 채 정치투쟁 대신 문화투쟁으로 전환했다. 문화의 가면을 걸친 채 등장해 극단적 상대주의로 세상을 혼돈의 늪으로 몰아넣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비롯해 여전한 위력적인 네오마르크시즘, 립스틱 바른 마르크시즘인 페미니즘 등이 그것이다.
사회해체를 노리는 동성애, 교활하기 짝이 없는 다문화주의도 공산주의의 새로운 얼굴이다. 미국-유럽의 대학-교회-언론-여성계를 포함해 사회 전 부문이 그것의 악마적 위력 앞에 무릎 꿇거나 황폐화된 지 오래다. 여성 저술가 홍지수의 첫 책 <트럼프를 당선시킨 PC의 정체>(북앤피플 펴냄)는 이 전체 모습을 드러내주는 흔치 않은 보고서다.
서구문명이 노동자계급 눈을 가리고 있다?
피아(彼我) 구분조차 쉽지 않은 지금 올바른 사상의 나침반이 되어줄 텍스트의 출현이 더 없이 반가운데, 무엇보다 '얼굴을 바꾼 공산주의 악령'의 족보를 꿰어주고 있다. 그런 저자에 따르면, 서구는 지난 세기 공산주의 몰락이란 부전승(不戰勝)에 도취한 나머지 '또 다른 전쟁'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때 좌익은 정치투쟁이란 지상전에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해 대학-교육-문화의 영공을 공략하는 공중전으로 냉큼 전략을 바꿨다. 그게 이른바 문화투쟁인데, 냉전시대 이전부터 활약했던 루카치, 그람시 등이야말로 그들의 시조다. 20세기 초 벌써 루카치는 이런 질문을 했다.
유사시 혁명의 주체인 노동자 계급이 들고 일어나 좌익혁명을 일으킨다는 마르크스 예언은 왜 틀렸을까? 예언이 틀린 게 아니라면, 서구문명이 노동자 계급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다고 봐야 하는 건 아닐까? 그래서 그는 서구문명을 떠받치는 가족제도와 교회를 거부하는 문화테러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아동들의 성적 윤리관을 훼손시켜 가족-교회에 타격을 입히자는 생각 아래 급진적 성교육 프로그램을 학교에 도입하기도 했다.
진지전을 언급했던 그람시도 그 맥락이다. 혁명투쟁을 벌일 새 장소는 문화영역이며, 거길 진지로 삼아야 한다고 본 것이다. 직후 바통을 이어 받은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문화투쟁을 전면전으로 확전시켰다. 그들은 서구문명의 토대인 가족-교회는 물론 자본주의-도덕-애국심 모두를 거부했다.
요즘 난리인 동성애-페미니즘-다문화주의의 물꼬가 터진 게 그때다. 그래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스타인 마르쿠제가 1968년 혁명 때 마르크스-마오쩌둥과 함께 '3M'의 하나로 추앙 받았지만, 반세기 뒤인 지금 대학-교육-문화에서 더 무서운 괴력을 발휘하고 있는 게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이다. 그건 인문사회과학 전체의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았다.
성경도 폭력-위선으로 가득하다며 낙인찍어
서구근대를 떠받쳐온 이성적 사고와 진리에 대한 확신을 버린 건 물론 서구근대 자체를 터부시한다. 그게 폭력적이며, 탐욕에 물든 자본주의 문명이라며 미국-유럽의 지식인들은 스스로를 매도하는 것이다. 서구근대를 상징하는 그리스-로마문명과 기독교까지도 해체의 대상이다.
그런 걸 긍정적으로 언급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 정도(正道, Political Correctness)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론 인종 차별적 행동으로 취급하는 게 요즘 서구의 괴상한 분위기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극단적 상대주의로 변질되고 급기야 거대한 자해(自害)에 몰입하는 꼴이다. 일테면 기독교 성경은 가부장제와 폭력과 위선으로 가득 찬 책으로 낙인 찍혔다.
요즘 종교학자 십중팔구가 포스트모더니즘-페미니즘으로 완전 무장한 탓이다 (126쪽). 셰익스피어와 랩 음악의 가사는 똑 같은 텍스트로 취급당하고, 대학은 옛 소련의 전체주의처럼 사상과 표현을 검열하는 공간으로 변질된 채 포스트모더니즘-페미니즘-다문화주의만을 허용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심할 경우 그건 XX, XY 염색체라는 생물학적 진실, 즉 남녀의 구분조차 개무시한다. 인간은 남녀 구분 없이 평등하게 백지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에 레즈비언-게이-양성애-트랜스젠더 등 이른바 성적 지향성이란 무제한 허용되어야 한다고 그들은 우긴다. 그게 오래 전 서구의 현실로 등장했는데, 지금 우리도 그걸 따라가고 있는 중이다.
일테면 2년 전 뉴욕시 인권위원회는 시민들에게 31개의 젠더 정체성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하며, 그걸 존중하지 않는 기업에는 성차별 추징금 10만 달러를 부과하니 세상이 미친 것이다. 신간 <트럼프를 당선시킨 PC의 정체>는 여기에서 한 걸음을 더 나간다.
즉 포스트모더니즘, 네오마르크시즘, 페미니즘, 동성애, 다문화주의의 뿌리엔 정치적 정도(PC)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게 이 책의 시각이다. 놀랍게도 PC란 말은 네오마르크시스트가 만든 게 아니라 레닌이 만들었다. 러시아혁명 초기 레닌은 공산혁명 성공을 위해 노동자계급의 이익에 충실한 논리만을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선포했다.
바꿔 말해 이전까지의 지식-진실이란 노동자 착취를 위해 만든 브르주아의 편견이라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것인데, 그런 편협한 태도가 지금 서구사회를 옥죄는 PC로 그렇게 깊게 뿌리 내릴 줄은 아무도 몰랐다. 좌빨에 동조하면 정치적으로 올바른 좋은 논리요, 반대하면 낙인을 찍는 것이 이렇게 무한 진화에 성공하다니….
PC, 그렇게 간단치 않다. 위키백과는 "용어에서 인종·민족·종교·성차별의 편견이 포함되지 않도록 조심하자는 주장"이라고 설명한다. 애꾸를 시각장애자로 바꾸고, 아메리카 인디언 대신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형제라고 번역된 성경 용어를 형제자매로 고치자는 식이다. 하지만 그 이상이다. PC는 실제론 전체주의로 치닫는 속성이 있다는 게 이 책의 주장이다.
홍지수의 저서 '트럼프를 당선시킨 PC의 정체'는 얼굴을 바꾼 공산주의 악령에 대한 종합 리포트이다. 평범한 미 국민들은 언론이 과도하게 강조하는 PC라는 것의 이중성-위선에 너무도 화나고 답답했고, 그래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게 트럼프 당선의 배경이다. /사진=연합뉴스
트럼프 당선은 PC의 위선에 유권자가 화난 탓
몇몇 반역행위를 다스리는 잣대를 넘어 공산주의 이념에 따른 교육, 윤리, 인간 행동 모두를 통제하는 전방위의 지침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비에트 체제에선 PC를 벗어난 사람을 정신질환자로 규정했다. 저들만 그러했나? "정치적 올바름이 없는 사람은 영혼이 없다"는 게 마오쩌둥의 말이니 좌빨은 인종-나라의 구분 없이 모두가 같다.
때문에 이 책은 얼굴을 바꾼 공산주의 악령에 대한 종합 리포트인데, 책 제목도 <공산주의의 또 다른 악령 PC> 혹은
정도가 알맞다는 게 필자인 나의 판단이다. 단 <트럼프를 당선시킨 PC의 정체>란 제목도 아주 나쁘진 않다.
트럼프는 미국 사회에 깊게 똬리를 튼 PC라는 병리현상 때문에 당선되었다는 역설을 지적한 내용이 책에 없지 않기 때문인데, 실제 2016년 미 대선에서 PC가 만연한 언론-학계-연예계가 똘똘 뭉쳐 트럼프에 맞섰다. 공화당 내에서도 "트럼프만은 안 돼!(Never Trump!)"라는 정서가 팽배했다. 그런데도 왜 트럼프가 당선됐을까?
평범한 미 국민들은 언론이 과도하게 강조하는 PC라는 것의 이중성-위선에 너무도 화나고 답답했고, 그래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게 트럼프 당선의 배경이다. 희한하게도 미국과 한국의 주류 언론만은 지금도 그 맥락을 잘 모르고 있는데, 그 얘기는 다음 번 후속 서평에서 다루기로 하자.
어쨌거나 <트럼프를 당선시킨 PC의 정체>란 책의 등장 자체가 출판계 풍토에선 이례적이다. 저자도 관심이다. 그는 연세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KBS에서 아나운서로 활동했다. 하버드대 케네디행정대학원 등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여성이면서도 남성적인 글을 쓰고 우익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는 점도 듬직한 일이다. 그런 궁금증은 후속 서평에서 다룬다. /조우석 언론인
[조우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