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석명 기자] 최민정이 1500m 금메달을 따낼 때, 속이 후련했다. 기다리던 금메달 소식을 안겨줘서 그랬지만, 경쟁자들을 저 멀리 따돌리고 독주를 하며 압도적인 차이로 시원스럽게 결승선을 통과해 더 그랬다.
더군다나 최민정은 마음의 상처를 안고 17일 열린 1500m 경기에 나섰다. 앞서 13일 열렸던 500m 결승에서 최민정은 2위로 골인하고도 실격 당해 손안에 들어왔던 메달을 놓쳤다.
당시 최민정의 실격 판정은 논란을 낳았다. 레이스 도중 킴 부탱(캐나다)과 순위다툼 과정에서 왼손으로 진로방해를 했다는 것이 실격 이유였지만, 리플레이 장면을 확인해도 '꼭 실격이어야만 했나' 의문이 남았다.
막상 실격 판정을 받았던 최민정의 마음은 어땠을까. 레이스를 마쳤을 때 전혀 실격을 당할 줄 몰랐던 그는 야속한 판정에 아쉬움의 눈물을 내비쳤다.
1500m 출전 준비를 하면서 최민정은 "손 짚으면 실격이니 안 짚고 나가겠다"고 했다. 어떤 각오로 그런 말을 했는지 짐작은 가지만, 쇼트트랙 종목의 특성상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선수들끼리 서로 엉켜 치열한 자리 다툼을 하면서 급격한 코너링을 하는데 손을 안 짚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최민정은 1500m 결승에서 실제 자신이 한 말 그대로 손 안짚고 아웃 코너를 엄청난 스피드로 돌며 앞 선수들을 추월했다. 그리고 선두로 나선 다음에는 폭풍 질주를 이어가 크게 거리를 벌린 채 1위로 골인했다.
최민정의 이런 주행법에 전 세계가 놀랐다. 엄청난 체력과 스피드를 갖추지 않으면 하기 힘든 기술을 최민정이 시연해 보이며 (보기에는) 가볍게 금메달을 따낸 것이다.
이어 열린 남자 1000m 결승에 나섰던 서이라 임효준은 최민정과 달랐다. 5명이 출전한 결승에서 둘은 3, 4위로 달리다 선두로 치고 나갈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헝가리의 샤오린 산도르 류가 둘 사이로 무리한 추월을 시도하다 넘어지며 연쇄적으로 임효준과 서이라도 걸려 넘어지고 만 것이다. 산도르 류는 실격 당했고, 다시 일어나 뒤늦게 들어온 서이라는 동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이번 대회 쇼트트랙에서는 선수들이 실격을 당하거나 서로 신체 접촉에 의해 넘어지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 국가별 실력차가 줄어들고, 경쟁이 더 치열해지다 보니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쇼트트랙 최강국 한국 대표팀이 이런 것을 모를 리도 없고, 평소 훈련을 통해 많은 대비를 하지만, 실전에서 벌어지는 돌발 상황이 워낙 많다. 최민정이 500m에서 실격 당하고, 서이라 임효준이 1000m에서 미끄러진 것도 그런 예다.
그렇기 때문에 최민정이 1500m에서 금메달을 따낸 주행법이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만일의 사고(실격이나 접촉에 의한 미끄러짐)를 피할 가장 확실한 방법이 바로 아웃코스 추월이다. 오로지 스스로의 스피드와 체력으로 변수를 최대한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전 종목 세계랭킹 1위인 최민정이니까 가능한 주행법일 수 있다. 그러나 올림픽에 출전해 메달을 다툴 정도의 수준급 선수들이라면 충분히 시도해볼 수 있는 주행법이다. 인코스로 주행하면서 몸싸움을 벌이고, 행여 있을지 모르는 실격 등을 신경쓰며 레이스를 펼치는 것도 체력적·정신적으로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최민정은 1000m와 계주를 남겨두고 있다. 다관왕이 유력한 최민정이 앞으로도 아웃코스 추월 역주로 시원스럽게 메달을 따내는 모습이 기대된다. 최민정의 1500m 레이스를 유심히 지켜본 경쟁자들이 또 어떤 대비책을 들고 나올지도 관전 포인트다.
최민정이 선보인 '아웃코스 추월'은 세계 쇼트트랙 흐름을 좌우할 새로운 주류 기술이 될 지도 모르겠다. 마치 한국 선수들이 처음 시도해 신 기술로 정착된 '스케이트 날 내밀기' 처럼.
1992 알베르빌 올림픽 남자 5000m 계주에서 마지막 주자로 나섰던 김기훈이 결승선 통과 직전 날 내밀기 기술을 처음 선보이며 기적같은 뒤집기 우승을 했다. 이후 1994 릴레함메르 대회에서 채지훈, 1998 나가노 대회에서 김동성과 전이경도 날 내밀기로 막판 역전극으로 금메달을 따냈다. 이 날 내밀기는 지금 모든 나라 쇼트트랙 선수들이 시도하는 일반적인 기술이 됐다.
[미디어펜=석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