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임꺽정>을 쓴 벽초(碧初) 홍명희(1888~1968)의 자필 편지 4통이 경북 안동에서 발견됐다고 중앙일보를 포함한 몇몇 매체가 전한 게 엊그제다. 월북한 홍명희는 북한의 초대 부수상을 지냈지만, 일제시대 문학적 업적도 있고 또 민족주의 성향도 무시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안고 가야하는 작가가 맞기는 하다.
의아한 건 그 보도를 한 매체들이 무슨 생각에서인지 김일성과 홍명희가 함께 뱃놀이하는 사진을 빠짐없이 싣고 있다는 점이다. "1958년 나룻배 위에서"라고 친절한 설명까지 달았는데, 사진이 증언하는 김일성의 추악한 흑역사를 과연 알고나 그럴까? 안다면 그 사진을 결코 못 올리기 때문인데, 평양 조선혁명박물관에서는 그걸 이렇게 버젓하게 알린다.
"홍명희 선생과 민족의 화해와 대단합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시는 민족의 태양 김일성 동지"
결론부터 알리자면 그 사진은 협잡과 위선의 끝판왕을 보여주는 최악의 증거물에 다름 아니다. 짐승에 가까운 김일성의 뒷모습을 알려주는 건 물론 김일성보다 24세나 많았던 연장자임에도 권력 앞에 취약했던 홍명희의 처신에도 문제가 없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앞뒤 상황은 이렇다. 문제의 사진은 1958년 석암호수가 배경이다.
석암호수는 평안남도 평원군에 있는 저수지로 추정되는데, 그곳에서 뱃놀이를 하게 된 앞뒤 맥락이 흥미롭다. 홍명희의 맏아들로 김일성종합대 교수로 있던 홍기문의 증언에 따르면, 그건 "당시 김일성이 아버지(홍명희)를 위로하기 위해 만든 자리"였다. 그때 대체 무슨 위로가 필요했던 것일까?
홍명희의 딸이자, 홍기문의 여동생인 홍귀원의 혼전 임신과, 뜻하지 않는 출산 중에 산모와 자식이 함께 사망하는 사고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당시 김일성이 둘째 아내 김성애의 개인비서 홍귀원을 건드려 그만 임신을 시켜버린 것이다.
당시 김일성 나이 40대 초중반. 그런 그가 아내의 여비서에게 손댔다는 것도 파렴치하지만, 죄질이 안 좋은 건 당시 김성애가 막내아들을 임신 중이었다는 점 때문이다. 그 일로 당시 수상 김일성은 김성애에게 면목 없게 됐지만, 홍명희와의 관계도 어색해진 꼴을 자초했다. 그 일로 김일성이 괴로워했다는 증거는 현재로선 없다.
정작 코너에 몰렸던 건 명색이 처녀인 홍귀원 쪽이다. 당시까지 북한 내에서 평판 좋았던 아버지의 얼굴에 먹칠을 했다는 판단 때문에 임신 기간 내내 그녀는 우울증에 시달렸다. 아버지를 볼 면목이 없다며 출산 전까지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출산 당일 변고를 당하고 만 것이다.
평안남도 평원군에 있는 저수지로 추정되는 석암호수에서 김일성과 홍명희가 함께 뱃놀이를 하고 있다.
이 스토리는 황장엽과 함께 망명을 했던 김덕홍(1939년 생)의 회고록에 나온다. <나는 자유주의자이다>(2015년)에 두세 페이지 정도 등장하는데(그걸 인용해 한국의 인터넷 백과사전에도 일부 나옴), 이 얘기는 김덕홍이 홍기문으로부터 직접 전해 들었다. 당시 김덕홍은 김일성대학 교무부 지도원으로 있었는데 대학 사택의 이웃이 홍기문이었다.
60년대 말, 70년대 초반 무렵 당시 홍기문은 고전문학과 강좌장(학과장 정도로 추정됨)이었는데, 자신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그 사택에 가보니 문제의 김일성-홍명희 뱃놀이 사진이 척 하니 걸려있었다. 반주를 곁들인 그 자리에서 눈가의 눈물을 닦으면서 홍기문이 들려줬던 얘기가 앞에 소개한 김일성의 파렴치한 행위였다. 책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홍기문은) 그 사진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저 사진은 수령님이 그때 아버지를 위로하기 위해 뱃놀이를 하자면서 석암호수에 데리고 나갔다가 찍은 사진이야.'"(90쪽)
홍기문은 이런 말도 했다. "그 애(홍귀원)도 불쌍하고…. 슬픔도 크면 빨리 늙는다고 했던가? 아버지도 그 일을 겪은 뒤부터는 폭삭 늙더라." 어떠신지. 뭔가가 이상하지 않은가? 홍기문 자체가 김일성보다 9살 연상이다. 자신의 여동생을 성폭행해 임신 중 사망에 이르게 한 범죄자 김일성의 비위행위를 제3자에게 전하는 자리에서 "수령님" 운운하다니….
그게 전체주의 사회의 분위기가 아니면 뭘까? 더 의아한 건 홍명희 쪽이다. 자기 딸을 그렇게 죽음으로 몰고 간 최고 권력자가 자신을 위로한답시고 뱃놀이를 청한다고 덜렁 따라가 헛웃음은 날려야 했다니…. 일제시대 3대 천재의 한 명으로 불렸던 홍명희의 추락이 못내 가슴 아프다. 실제로 김덕홍은 그 책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그것을(뱃놀이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사망해서까지도 김일성 우상화에 이용당하는 홍명희 선생이 심히 측은해 보였다. 그냥 남조선에 있었더라면 저런 수모는 겪지 않았을 건데…. 그것이 그때의 내 심정이었다."
이용해 먹는 김일성이나, 그런 사진을 집안에 걸어놓은 홍명희-홍기문이나 오십보백보다. 얘기는 그걸로 끝이 아니다. 당시 김일성은 김성애와 정식 결혼을 한 상태가 아니었다. 김정일의 이복동생 김평일을 낳은 김성애가 김일성과 정식 결혼을 한 것은 1963년이다. 즉 정식 결혼 훨씬 이전 동거하던 여자가 임신하자, 그녀의 여비서까지 손을 대 끝내 죽음으로 몰고 간 추악한 인간이 김일성의 진짜 모습이다.
뒷얘기가 하나 더 있는데, 이게 정말 더 추악하다. 김일성-김성애 사이의 불륜-치정 관계 자체가 본처 김정숙의 사망과 관련 있었고, 그걸 생전의 김정일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김정숙이 죽은 건 1949년인데, 당시 벌써 김일성-김성애 사이의 불장난이 대단했다.
"이걸 모두 다 알고 있었던 김정숙의 분노는 엄청났다. 김성애를 발탁한 게 자기였기 때문인데, 당시 김정숙은 임신 중에 병원에 있었고, 김일성에 대한 분노를 키우던 중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게 어느 정도였을까? 김정숙은 숨이 넘어가는 순간에도 병문안 차 찾아온 김일성에게 병실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노발대발했다." (<나는 자유자유자이다> 115쪽)
당시 임종을 지키며 이런 광경을 모두 지켜봤던 당시 7세의 아들이 김정일이었고, 그가 훗날 김성애 숙청에 열을 올린 것도 어머니 복수를 하기 위한 짓이었다. 얘기는 여기까지다. 맞다. 시인 고은, 연극연출가 이윤택 등 '추악한 손'의 진짜 원조는 북한 김일성이라는 것이 내 판단인데, 원래부터 좌빨은 위선과 자기 변신에 능한 법이다.
남은 의문점 하나. 본처 김정숙이 사망한 1949년 직후 김일성은 1950년 1월 15일 홍영숙(洪永淑)과 재혼해 잠시 살았다는 말도 있는데, 이건 아직 전모가 밝혀진 건 아니고, 사실관계가 좀 불분명하다. 심지어 홍영숙이 홍명희의 맏딸이라는 설까지 있는데,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쇼크다. 김일성은 홍명희의 딸이란 딸은 모조리 손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조우석 언론인
[조우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