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의 전선이 판치던 시절,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아들로 입적해 키우며 진정한 용서의 길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준 목회자 손양원. 분열과 갈등, 증오로 치닫는 이 시대에 그가 던지는 울림은 감동을 넘어 가슴 묵직한 과제를 던진다. 미디어펜은 소설가이자 정신과 전문의인 신용구 원장의 '소설 손양원:용서'를 연재한다. 소설을 통해 진정한 용서와 화해 그리고 우리사회의 병폐인 갈등과 증오를 치유하는 길을 묻는다. 필자인 신 원장은 용서의 의미를 새삼 일깨워준 손양원 목사님께 감사를 드리고, 독자들 역시 손양원 목사의 인생을 통해 용서의 진정한 의미를 가슴에 한번 되새겨 보았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편집자 주]
카오스-2
이념에 관한 한 융통성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두 달이 넘는 긴 겨울 방학이 동인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은 족쇄처럼 몹시 불편했다.
심리적 갈증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이듬 해 봄 개학하자마자 동인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동천 인근에 있는 남로당 순천 지부 학생 연맹 사무실을 찾았다. 자갈이 널린 마당과 기와를 머리에 인 지붕은 어제 내린 춘설로 살포시 덮여 있었다.
동인이 사무실을 들어서자 회색 빛깔의 두툼한 외투를 걸친 키가 훤칠하고 이목구비가 수려한 한 사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동인을 맞았다. 그는 남로당 순천 지부 학생 연맹 회장을 맡고 있는 박태수였다.
"아이고, 기다리고 있었소, 반갑소, 잉!"
그는 환하게 웃으며 동인의 손을 잡고는 거칠게 흔들었다. 그의 손은 과장된 큰 몸짓과는 달리 길고 곧게 쭉 뻗어 있고 하얗기까지 해서 매우 예술적이었고 도회적인 느낌을 물씬 풍겼다.
'꽤 잘사는 집 자식인가 보네!'
동인은 어딘지 모르게 귀티가 나는 그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자신의 입당 절차가 빨리 마무리되길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다. 박태수는 동인에 대해 특별한 호감을 가졌던지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부르며 동인이 가져온 입당 원서를 살폈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의 갸름한 얼굴이 살짝 굳었다.
"아부지가 목사요? 잉!"
"예"
"어디서 목사 일 하고 있소?"
"여수 애양원에서 하고 있습니다."
"문둥이들이 사는 거기 말이여?"
"예"
"그거 미국 놈들이 세운 거 아니요?"
"예, 미국 선교사들이 세웠다는 소리는 들었습니다."
"아니, 오메, 동인씨도 시방 그걸 알고 있었단 말이요?"
"......."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동인을 바라보는 박태수의 눈빛이 그 새 차갑게 변해 있었다. 동인은 심드렁해진 그의 표정에 가슴이 뜨끔해서 자신이 무얼 잘못했나 싶어 골똘히 생각하며 이유를 이리 저리 찾았다. 하지만 눈알이 빠지게 아무리 찾아봐도 무엇 하나 짚이는 곳이 없어 몹시 당황스러웠다.
"동인씨는 미국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미국을 어떻게 생각하다니요? 지금 우리를 돕기 위해서 군정을 실시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지요.....?"
태수가 동인에게 던진 질문은 동인에게 자꾸만 뜬금이 없게 느껴졌고, 태수는 태수대로 동인의 답변이 탐탁지 않아 은근히 그의 화를 돋우고 있었다.
"참, 딱하요, 잉. 동인씨는 당원이 되겠다는 사람이 어찌 그리 당성이 부족하요.앙"
"대체 그게 무슨 이야기요?"
"지금, 동인씨는 미국이 우릴 돕기 위해 이 조선에 왔다고 생각하시오?"
"그럼, 아니란 말이요?"
"이러니, 내가 딱하다고 말하는 거요, 잉."
박태수는 동인의 생각이 한심하다는 듯이 동인을 노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소리는 하지 마시오, 미국은 말이요, 우리를 돕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거시기 뭐야, 왜놈들처럼 우리 이 땅을 먹어치우기 위해 이 땅에 온 것이란 말이요, 아시것소? 잉"
"그럼 형씨 말을 빌리자면 미국이 우릴 식민지 삼기 위해 조선에 왔단 말이요?"
"당연하지요, 우리를 식민지로 삼을 생각이 아니라면 어찌 지금 꺼지 군정만 하것소, 벌써 우리한테 정권을 넘겼제, 북조선 보시오, 소련은 벌써 우리 인민들한테 정권을 넘겨 준지 오래요, 북조선에는 우리 인민들로 구성된 북조선 인민위원회가 활동을 하고 있소, 게다다 토지개혁을 단행해서 몰수한 지주들의 땅을 소작인들에게 다 무상으로 나눠주었다는 소문이 파다한 거 모르시오, 잉, 그런데 시방 우리 남조선 꼬라지는 어떻소? 해방된 지 이태가 넘도록 토지개혁은 고사하고 여지껏 코쟁이 새끼들 눈치만 보고 있지 않소? 군정 사령관 하지가 한마디 하면 김구고 나발이고 모두 벌벌 긴다던디, 참말로 좃나게 어이가 없소, 잉! 이 나라에는 눈을 씻고 봐도 나라 구할 지도자는 없고 미국 놈들은 털도 안 뽑고 날강도처럼 통째로 우리를 먹어 치울라꼬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 동인씨는 말하는 폼을 보니까 미국놈들을 아주 좋아하는 것 같소."
"아니, 이 보시오, 내가 미국인을 좋아하는 게 대체 어떻단 말이요?"
"시방 고걸 말이라고 하시오? 잉"
동인은 태수가 아까부터 별 이유도 없이 자신의 아버지와 미국을 상대로 하여 자꾸 트집을 잡고 억지를 부리는 것 같아 화가 나 얼굴을 붉혔고, 태수도 언성을 높이는 동인의 태도가 어이가 없어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암만 사람이 없어도 이런 얼빠진 놈을 받아들이면 안되제, 암'
'입당하겠다고 찾아 온 손님을 이 따위로 대접하는 이런 싸가지 없는 놈이 있나!'
깨알 같은 생각의 차이로 서로 마음이 상해 서서히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 두 청년의 눈길이 매서운 빛을 뿌리며 어느 새 검을 든 검투사처럼 서로의 얼굴을 겨누었다.
격정에 불타는 그들의 뜨거운 가슴만큼 두 젊은이의 눈도 예리하고 차갑게 빛났다. 그들의 검은 눈동자엔 서로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한껏 서려 있었다. 눈빛으로 보아서는 어느 누구도 먼저 뒤로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상대의 허점을 노리듯 말없이 서로를 뚫어지게 바라보고만 있다. 천장이 낮게 내려 깔린 실내를 무거운 침묵이 천천히 흘러갔고, 밖에선 마당에 내린 춘설을 거친 강바람이 한바탕 훑고 지나갔다. 이 때 들 고양이 한 마리가 기막힌 효과음을 내며 지붕 위로 튀어 올랐다. 스산함과 긴장감이 백배는 고조된 기분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벽에 걸린 시계 바늘은 여섯시를 가리키고 있다. 서로 입을 다문 지 십여 분이 지난 것이다. 태수가 먼저 침묵을 깼다.
그는 두터운 외투 지퍼를 가슴께까지 내린 다음 깊이 눌러 쓰고 있던 갈색의 사냥 모자를 벗어들고는 의자에게 등을 비스듬하게 기댔다. 동인의 눈엔 태수의 모습이 상당히 고압적으로 보였다. 자신을 압박하기 위한 의도적인 몸짓이라는 걸 그는 알았다.
"동인씨, 난 동인씨가 우리 당에 들어오는 것은 좋아요, 하지만 동인씨를 받아들이기 전에 먼저 확인할 게 있소."
"그게 뭐요?"
"동인씨 당성(黨性)이요."
"당성이라니요?"
동인은 자신을 시험하려드는 태수에게 형언할 수 없는 모욕감을 느꼈다.
'이놈을 그냥!'
박 태수는 체격은 비록 컸지만 파르스름하게 빛을 내는 빡빡 밀어버린 머리나 희멀건 얼굴색으로 보나 나이는 자신 보다 한두 살 더 어린 듯 했다.
동인은 그가 버릇이 좀 없는 것 같아 괘씸하게 생각되었고, 자기 앞에서 자신이 무엇이나 되는 양 거들먹거리고 있는 태수의 거만한 태도에 화가 나서 얼굴에 침이나 한번 뱉어주고 그냥 사무실을 빠져 나오고 싶었지만, 아버지와의 일전까지 각오하고 어렵게 찾은 연맹 사무실이었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애만 태웠다. 속은 치미는 화로 가마솥같이 펄펄 끓고 있었다.
"미국놈들이 시방 우리 남조선을 넘보고 있는 기 분명헌디, 아부지가 목사라고 그런 미국 놈들을 은근히 두둔하는 형씨를 어찌 아무 해명도 듣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겠소, 안 그러요, 잉! 그렁케 딴 건 모르것고, 일단 형씨 아부지에 대해 비판 좀 해보시오,잉!"
"지금 뭐라고 했소?"
그의 말에 동인이 깜짝 놀라 눈에 쌍심지를 켰고, 박태수는 입을 꼭 다문 채 노기가 등등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동인이 고까운 듯 빈정거리며 다그쳤다.
"형씨 아부지 비판 좀 해보라 했소!"
"내가 왜 아버지를 비판해야 해요?"
"아부지가 목사잖소?"
"아니, 목사가 무슨 죄요? 무슨 죄가 있다고 비판을 해요?"
"나는 목사들은 모두 미국 앞잡이인줄 아는데......"
"......"
"왜, 못하것소?"
동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태수의 논리가 너무 억지스러워 기가 막혔다. 세상의 모든 목사들이 미국의 끄나풀도 아니고 설사 그 중에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며 일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해도, 이것은 그들의 문제일 뿐 모든 목사들에게 다 해당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목사가 미국의 스파이라는 논리를 결코 일반화시킬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태수는 자신의 아버지를 미국의 스파이로 기정사실화하고 비판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동인은 그가 치기어린 마음에 자신에게 싸움을 걸려고 마음을 먹었든지 아니면 그의 사고방식이 아주 이상한 독특한 사람이든지 둘 중의 하나일 거라 생각하며, 싸움을 피하려 자신의 입장을 애매하게 취하기보다 분명하게 하는 것 낫다는 판단에 따라 그에게 항변을 하며 따져 물었다. .
"아니, 자식에게 자신을 낳고 길러 준 부모를 비판하라는 건 대체 어느 나라 법도요?"
"형씨, 형씨는 사상적으로 문제가 억수로 많소. 사회주의는 말이요, 피보다 이념이 더 전한 거 모르시오, 잉, 인민 대중들을 위한 일인디 필요허면 가족들을 버릴 수도 있어야제, 인정에 그리 눈이 멀어갖고 대장부가 대체 무신 일을 하것소, 잉!"
"내 아버지 손양원 목사는 평생을 나환자를 위해 살아 온 사람이요, 이 세상사람 어느 누구도 돌보지 않는 나병 환자들을 자기 피붙이처럼 보듬고 살아 온 사람이란 말이요! 자기 것이라곤 쌀 한 톨도 챙길 줄 모르는 이런 바보 같은 사람을 비판하라고? 인륜을 지키는 것은 사람의 근본이요, 지금 이 근본을 허물어 나 보고 짐승이 되라는 말이요?"
태수는 동인의 얼굴이 여인네처럼 곱상하게 생겨 그를 좀 가볍게 보았다가, 동인이 벼락같이 화를 내자 변변찮게 대꾸를 못하고 얼굴색이 붉어지는 게 몹시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형씨가 말하는 것처럼 인륜도 버리고 인륜을 짓밟을 수 있는 게 사회주의라면, 아무리 혁명이 중하다 해도 그 동안 내가 사회주의에 대해 생각을 아주 잘못했던 것 같소, 난 결코 이런 길은 갈 수가 없소, 이건 짐승들이나 가는 길이요."
태수는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거침없이 모두 쏟아낸 다음 실낱같은 미련도 없다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휘적휘적 사무실을 빠져 나갔다.
태수는 예상치 못한 동인의 일격에 혼이 나갔는지 찬바람이 부는 동인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며 그가 자신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미동도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그가 전봇대를 지나 꺾어진 모퉁이 사이로 자취를 완전히 감추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나서는 훗날을 기악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쥐어졌다.
'형씨, 언제 한번 두고 보더라고!'
자존심 강한 태수는 동인의 면막에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젓갈을 파는 영세 상인의 아들로 자신의 출신 성분에 비추어 자신을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사회주의자의 혈통이라 굳게 믿고 있던 그의 자존심을 동인이 긁어 놓은 것이었다. 그것도 그가 가장 싫어하는 목사의 아들에게.
그의 가슴 속에서는 손 동인이라는 인물에 대한 여러 감정이 모락거리며 피어올라 눈앞에서 아른 거리기도 했다. 그것은 수치심, 당혹감, 적대감, 복수심 같은 개운치 않은 감정이 뒤섞인 아주 칙칙한 불쾌한 기분들이었다.
'미국놈 가랑이에 빌붙어 먹고 사는 목사놈의 아들주제에 주딩이를 함부로 나불거려? 이새끼 언제 한번 두고 보자고, 뭐 인륜을 지키는 기 근본? 지럴 염병을 허구 자빠졌네. 혁명 하는데 인정이 웬말이여, 이 육실럴 놈아!' <계속> /신용구 소설가·정신과전문의
[신용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