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의 전선이 판치던 시절,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아들로 입적해 키우며 진정한 용서의 길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준 목회자 손양원. 분열과 갈등, 증오로 치닫는 이 시대에 그가 던지는 울림은 감동을 넘어 가슴 묵직한 과제를 던진다. 미디어펜은 소설가이자 정신과 전문의인 신용구 원장의 '소설 손양원:용서'를 연재한다. 소설을 통해 진정한 용서와 화해 그리고 우리사회의 병폐인 갈등과 증오를 치유하는 길을 묻는다. 필자인 신 원장은 용서의 의미를 새삼 일깨워준 손양원 목사님께 감사를 드리고, 독자들 역시 손양원 목사의 인생을 통해 용서의 진정한 의미를 가슴에 한번 되새겨 보았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편집자 주]
분노의 시대-1
동인이 사회주의에 크게 실망해 우익 단체인 전국 학생 연맹에 가입해 활동하자, 손양원은 비로소 한 시름을 놓았다.
아들이 과격한 사회주의자들과 어울려 다니다 그들에게 물이 들기라도 하면 신앙적으로 용인할 수 없는 엄청난 죄악을 범할 우려가 컸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죄악의 길로부터 구해냈다는 것이 무척 다행이라 생각했다.
해방 후 극심한 좌우대립으로 인해 벌어진 극도의 혼란 가운데서도 시간이 지나면서 나라도 차츰 안정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남로당 제주도당 책임자인 김달삼이 헌법을 제정할 제헌 의원 선출을 위한 선거를 무산시키기 위해 폭동을 일으켰지만, 지난 5월 10일에 치른 선거를 통해 제주도 지역만 빼고는 모든 곳에서 무사히 제헌의원을 선출했고, 이들이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뽑았다. 해방된 지 햇수로 3년 만에 정치적으로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던 남한 땅에 드디어 나라의 모양새를 갖춘 국가가 등장한 것이다.
일본의 패전으로 3년 전에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 신세에서는 벗어났지만, 일본 대신 미국이 이 땅에 들어와 군정을 하는 바람에, 지난 3년간 남한의 처지는 실질적으로 미국의 통치를 받는 미국의 식민지나 다름이 없었다.
이 때문에 올해 치른 제헌의원 선거는 역사적으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엄청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 선거를 통해 오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한반도에 군주가 아니라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생 공화국 대한민국이었고, 대한민국의 출현으로 완전한 식민지 시대의 종식도 동시에 고할 수 있게 되었다.
손양원 역시 대다수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신생 국가 대한민국의 출범을 아주 기쁘게 생각했다. 또 내년에는 큰 아들 동인이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의 신학대학으로 유학을 가게 되어 있었다. 국가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경사가 겹치고 있었다.
게다가 올해는 풍년까지 든 탓에, 신풍리 역에 나와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도 근심 걱정 하나 없이 모두 행복해 보였다.
홍합 양동이를 머리에 인 철이 엄마, 말린 넙치를 팔러 장터로 가는 새댁, 쌀가마니를 지게에 지고 나온 더벅머리 총각, 큰집 결혼식에 간다고 온 가족이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숙이네 식구 등등, 모두 한 동네에 살아 이웃사촌이나 다름없는 이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동신아, 김치하고 멸치 볶은 것 잘 넣었지"
"예"
"참기름은?"
"그것도요."
"돈은 잘 챙겼지?"
흰 무명 한복을 입은 양순씨는 검정 교복을 말쑥하게 차려 입은 동신에게 행여 빠진 것은 없는지 묻고 또 물었다.
아들 동신은 어머니 양순씨에게 눈을 깜빡거리며 호주머니에 깊이 찔러 둔 돈을 손으로 가리키고는 생긋 웃었다.
"엄마, 내가 아기야, 걱정 좀 붙들어 매요, 제발!"
동신은 손양원의 차남으로 동인의 바로 아래 동생이다. 얼마 전에 순천 중학으로 전학을 가 지금은 순천사범에 다니는 형 동인과 함께 그곳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이번 주말도 집에서 어머니가 준비해 놓은 밑반찬을 가지러 왔다가 순천으로 가는 길이었다.
흰 와이셔츠에 멜빵바지를 압은 아버지 손양원도 역에 나와서 바지춤에 양 손을 찔러 넣고는 모자가 정답게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며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손양원은 요즘이야 말로 정말 세상을 사는 재미가 나는 것 같았다.
올망졸망 커가는 자식들의 새근대는 숨소리를 들으면서 눈을 떴고, 남해 바다의 붉은 저녁노을 속에 새처럼 재잘대는 아이들의 시끄러운 웃음소리를 들으며 하루 일과를 마무리했다.
또 교회에서는 늘 애양원 식구들과 함께 모여 진정으로 하느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의 기도를 올릴 수 있었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경향 각지에서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할 수도 있었다. 사양하긴 했지만 얼마 전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찾아와 자신이 세울 학교의 교장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했다.
손양원은 최근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이 모든 것들이 기뻤고 행복했다. 자신이 너무 많은 복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행여 누군가 자신을 시샘하고 질투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불현듯 일 때도 더러 있었다.
손양원은 기차를 기다리던 동네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기차가 검은 연기를 내뿜고 기적을 울리며 역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것을 보고서야 둘째에게 말을 걸었다.
"동신이는 딴 데 한 눈 팔지 말고, 기도와 공부에만 신경 써, 알겠지!"
손양원의 둘째 아들 동신은 글이면 글, 악기면 악기 등등 누구의 재주를 타고 났는지 못하는 게 없는 만능 재주꾼이었다. 게다가 인정 많은 딸처럼 부모의 불편도 곰살맞게 잘 살폈고 사람의 혼을 빼놓을 만큼 애교도 철철 넘쳐흘렀다.
재주가 많다보니 이 것 저 것 다양한 것들에 관심이 많았고, 자칫 오만 잡동사니들에 눈길을 주다보면 주의가 산만해져서 학업을 소홀히 하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이 되는 자식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자식이어서, 장래가 어떻게 될지 몹시 궁금히 여기던 아들이었다.
이렇게 사람이 애간장을 태우게 하면서도, 이 둘째는 인정이 많아서 말 한마디를 해도 늘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고 따뜻하게 해주었다. 이 때문에 눈앞에 이 둘째 아들이 보이지 않으면 왠지 늦바람이 든 사람처럼 손양원은 마음 한구석에서 허전함을 느끼곤 했다.
둘째가 집을 떠나 순천으로 갈 때 가슴이 이상하게 아렸던 것도 둘째에 대한 애틋한 감정 탓이었다.
아무튼 아들이 순천으로 유학을 간 후 마음이 잠시 울적했던 손양원은 둘째 아들이 주말에 밑반찬을 가지러 매주 집에 들르면서부터 어지러웠던 마음이 진정이 되었고, 주말이 가까워지면 이 살가운 아들이 늘 기다려지곤 하는 것이었다.
손양원은 노파심에 아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려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하고 있었지만, 둘째는 장난기 많은 그답게 아버지의 걱정을 귓등으로 흘려듣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버지, 요즘 저 정말 공부 열심히 해요, 전 사범학교 말고 의전 갈거예요."
"의사가 된다고?"
"예"
"요 녀석 넌 어떻게 간신처럼 늘 듣기 좋은 소리만 골라서 하냐?"
"참, 아버지도 진짜라니깐요!"
"그래 좋다, 좋아, 하하, 여보, 우리 둘째 덕에 의사 아들 두게 생겼소!"
부자간에 나누는 즐거운 신소리에 그의 아내 양순씨도 사랑이 그득한 눈으로 두 사람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살포시 담겨 있는 환한 미소는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인이라 생각했고, 행복감에 깊이 젖어 있는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는 손양원의 마음도 더 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그리고 그는 이 행복이 변치 않고 영원하기를 바라며,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한마디 당부의 말을 덧붙였다.
"아들아, 무슨 일이든 항상 기도해라, 주님은 늘 너를 지켜보고 계시니까......"
"아버지, 알았어요.!"
"그리고 이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 무어지?"
"갑자기 그건 왜요?"
"그냥 듣고 싶어서......."
"당연히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이지요."
"두 번째는?"
"행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세 번째는?"
"예?"
동신의 눈이 남산 위에 두둥실 떠오른 보름달같이 갑자기 동그래졌다.
"세 번째는?"
"아이구, 아버지, 창피하게, 왜 이래요? 사람들 들어요!"
"들으면 어때, 이놈아, 세 번째는? 큰 소리로 한 번 외쳐 봐! 안 하면 땡전 한 푼도 없어!"
사탕으로 유혹하며 귀여운 손자에게 재롱을 주문하는 할아버지처럼, 손양원은 용돈으로 은근히 아들을 겁박하며 기분 좋은 고함을 요구하고 있었다. 느닷없이 손양원의 장난기가 발동했지만, 손양원은 평소에도 유머와 위트를 즐겼다. 그래서 그의 예배 시간은 무겁고 엄숙하기보다 항시 즐겁고 유쾌해서 조는 사람이 없었다.
안경알 너머에서 반짝이는 때 묻지 않은 그의 두 눈을 보고 있으면 개구쟁이가 따로 없었다.
"허참, 나!"
동인은 민망한 표정으로 눈을 두리번거리며 사방을 살피더니 배에 힘을 주고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모두 들으란 듯이 기차 화통 삶아 먹은 것처럼 소리쳤다.
"우리 똥강아지들 사랑한데이!"
이 말은 손양원 스스로 자신이 세상에서 3번째로 좋아하는 말이라고 늘 떠들고 있었지만, 오늘만은 이상하게도 그 어떤 말보다 이 3번째 말을 아들에게 가장 먼저 들려주고 싶었다.
이 소동으로 신풍리 역이 한순간에 웃음바다가 되어 버렸고, 손양원과 그의 아내는 아들을 실은 기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플랫폼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계속> /신용구 소설가·정신과전문의
[신용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