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의 전선이 판치던 시절,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아들로 입적해 키우며 진정한 용서의 길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준 목회자 손양원. 분열과 갈등, 증오로 치닫는 이 시대에 그가 던지는 울림은 감동을 넘어 가슴 묵직한 과제를 던진다. 미디어펜은 소설가이자 정신과 전문의인 신용구 원장의 '소설 손양원:용서'를 연재한다. 소설을 통해 진정한 용서와 화해 그리고 우리사회의 병폐인 갈등과 증오를 치유하는 길을 묻는다. 필자인 신 원장은 용서의 의미를 새삼 일깨워준 손양원 목사님께 감사를 드리고, 독자들 역시 손양원 목사의 인생을 통해 용서의 진정한 의미를 가슴에 한번 되새겨 보았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편집자 주]
분노의 시대-2
순천 역 나지막한 역사 앞 광장은 평소에도 오가는 많은 사람들도 늘 붐비지만, 잔칫집처럼 아주 흥겨운 평소의 들떠 있는 광장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이날은 어딘지 모르게 무겁고 스산해 보였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운집한 광장 주변엔 곳곳에 붉은 깃발이 어지럽게 나부꼈다. 사회주의 혁명 만세, 레닌 선생 만세, 스탈린 동지 만세, 이승만 정권을 박살내자, 우리는 통일을 원한다, 친일파를 때려잡자, 악질지주와 자본가들을 때려잡자, 미제를 몰아내자, 토지개혁을 단행하자 등등, 장대에 매달린 붉은 깃발이 바람에 펄럭일 때마다 깃발 속의 붉은 구호가 사람들의 머리 위로 쏟아져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여러분, 이 자를 보시오, 잉, 이 자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 있소?"
"......"
감색 작업복에 붉은 완장을 찬 곱슬머리의 젊은이가 연단에 서서 한 손을 높이 치켜든 채로 군중들을 향해 소리치며 군중들의 호응을 유도했지만, 군중들은 반응은 그저 미적지근했다. 군중들은 하룻밤 사이에 바뀐 세상에 대해 기연가미연가 하는 시선으로 보고 있었고, 아직 판단이 서지 않아 스스로 어떻게 처신해야 좋을지 몰라 주변 눈치만 살피면서 자기 방어적인 태도만 취한 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입을 굳게 다물었다.
파란 하늘 아래 힘차게 나부끼는 깃발 속의 뜨거운 구호와 달리, 부엌 한 귀퉁이 보시기에 담겨 있는 한 덩이의 식은 밥처럼 집회가 너무 썰렁해서 분위기를 애드벌룬처럼 한번 띄워보지도 못하고 자칫 바닥으로 가라앉을 판이었다.
이런 때를 대비해 중간 중간 군중들 가운데 슬쩍 끼어 있던 순천시 임시 인민위원회의 행동대 격인 전위대원(前衛隊員)들이 기민하게 움직여 군중들에게 들으란 듯이 일사불란하게 큰 목청으로 외쳤다.
"다, 압니다. 알아요!"
"이 자가 누구요?"
"경찰서장이요."
연단에 선 곱슬머리와 전위대원들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군불을 지피는 사이에 아랫목 온기 돌듯 행사의 열기가 군중 사이로 퍼지면서 조금씩 뜨거워지고 있었다.
자발적으로 이 행사장에 나온 몇몇을 제외한 대다수 사람들은 거의 반강제로 끌려나오다 시피 했지만, 대회를 지켜보는 사이에 인민위원회 사람들의 주장에 공감해서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는 사람도 꽤 있었던 것이다.
"맞습니다, 맞아요, 이놈 목에 걸린 팻말에 순천 경찰서장 정 아무개, 이렇게 써났응께 모르는 기 이상하지요?"
"당연하지요!"
시간이 지나면서 군중들의 소리가 차차 높아졌고 경찰서장을 성토하는 분위기는 확실히 뜨겁게 달구어 진 것 같았다.
경찰서장은 불과 이틀 전만 하더라도 이 순천을 호령했던 왕이나 다름없는 절대 권력자였다.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않듯 그의 그림자 역시 당연히 밟을 수 없었다.
그런 그가 지금 군중 앞에 끌려나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경찰서장의 몰골은 더욱 처참했다. 이 사내는 인민위원회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이 두들겨 맞았는지 온 얼굴이 짓이겨 져서 고무풍선같이 부풀어 올라 있었고 입, 코, 눈은 어디로 가서 붙었는지 도대체 그 소재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말이요, 돼지새끼 같이 살이 피둥피둥 찐 이 반동 새끼가 왜 이 자라에 잡혀 나와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알고 있지라!"
"뭐 때문이지요?"
"저 반동새끼는 왜정 때 독립군 때려잡던 악질 순사였당께!"
"그럼 이 악질을 어찌해야 되지요?"
"어쩌긴 어째? 죽여야제! 잉, 죽여야 되고말고!"
인민위원회 사람들이 군중들의 분노에 불을 붙인 불길이 제대로 옮겨 붙었는지, 사방에서 경찰서장을 죽이자는 소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왜정 때는 일본에 대한 충실한 부역자로 일하며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다가, 세상이 바뀌자 또 새 세상에 재빨리 순응해서 새 나라의 열성적인 경찰로 탈바꿈한 그는 변신의 귀재였다. 물론 변신의 귀재는 그만은 아니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변신의 귀재가 있었다.
세상이 바뀌어도 다람쥐 체 바퀴 돌듯 언제나 한 자리를 지키며 엉덩이에 굳은살이 박인 그 자리에서 살아야만하고 자신들에게도 권리가 있는 과실을 모두 권력자들에게 빼앗기고 사는 나약한 소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거대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 연출자의 의도가 그대로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음모가들은 알고 있었다. 천재의 상상력이 새로운 세상을 열기도 하지만, 세상을 여반장같이 뒤엎을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소시민들의 분노와 이들의 증오심밖에 없다는 걸.
그래서 음모가들은 이 소시민들을 단단히 엮어 하나로 만들어 낼 확실한 고리를 찾았고, 이것이 증오라는 감정이라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 분명히 알고 있었다.
또 음모가들은 불신과 증오라는 감정을 이용하는데도 매우 능했고, 여기에는 대의와 명분이란 아주 품위 있는 고급스런 상징도 필요했다.
이들이 이런 멋진 상징을 들고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면 스펀지에 스며드는 먹물처럼 음모가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티끌만한 의심도 받지 않고 아무런 저항도 없이 자연스럽게 수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통째로 녹아들게 할 수 있었다.
가슴이 뜨거워진 군중들이 흥분하는 것을 보면서 연단의 곱슬머리는 신이 나서 작두날을 타는 무당처럼 펄쩍 뛰며 연신 소리를 질러댔다.
"저런 새끼는 총알 한 개도 아깝당께, 죽창으로 저 배때지를 꽉 쑤셔박아 부러야 한당께."
"암, 그렇지라, 총알이 아깝지라!"
"그라면, 저놈의 배창시를 찔러 죽일 용기 있는 사람 없소? 있으면 언능 나오시오, 잉!"
금방이라도 온 세상을 다 태워 버릴 듯 증오심에 활활 타오르고 있던 장내 성토 열기가 곱슬머리 사회자의 한 마디 말에 한바탕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한순간에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이 땅에 정의를 세우고 새로운 역사를 쓰겠다는 그들이 내세운 대의와 명분을 떠나 인간의 도리로 이들의 주장에 도저히 동조할 수 없는 도덕적인 사람들이거나, 아직도 눈앞에 벌어진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아 추이를 지켜보며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신중한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분위기에 휩쓸리거나 혹은 공명심에 불타 경찰서장을 죽이자고 목소리를 높였던 사람들조차도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익명성에 기대어 한껏 큰소리를 쳤던 사람들도 막상 나서서 총대를 메라고 하니 뒷목이 켕기는지 죄다 자라목을 하고는 몸을 도사리는 것이었다.
온 군중들의 가슴 가슴에 이성을 눈멀게 하는 증오의 불길이 다 옮겨 붙지 않은 상황이라, 군중들의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어떻게 보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이 자리에 자발적으로 참석한 열혈 남로당원, 사회주의 이념의 신봉자, 일제 잔재 청산에 실망해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길 갈망하는 우국지사, 혹은 사회정의 실현에 관심이 많은 이상주의자, 태생적으로 불평불만 많은 불순한 무리 등과 같은 소수의 무리들을 제외하고 나면 군중의 대다수는 이 세상일에 특별한 관심이 없던 소박한 시민들이었다.
이들의 주된 관심은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일일에 있을 뿐 이념도 정치도 아니었다. 또 대다수 사람들은 여느 시골사람들과 다름없이 순박하고 착하기만 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그들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고 사회자의 요구에 그들의 얼굴이 납덩이 같이 굳는 것도 당연했다.
맨 앞줄에 앉은 석공 목씨는 생긴 얼굴은 영락없는 도둑놈 상이었지만 실은 파리 한 마리 죽이지 못할 만큼 심약했고, 아직도 상투를 풀지 않고 있는 염전의 이씨는 눈물을 달고 다니는 사람이었고, 인력거를 끄는 박씨는 술만 좋아할 뿐 세상 천지에 보기 드문 무골호인이었고. 최 부잣집에서 소작을 붙이고 사는 이씨는 남의 것에는 쌀 한 톨도 탐낼 줄 모르는 지극히 소심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의 면면이 다 이러하니, 그들에게 죽창을 들고 경찰서장을 찌르라고 하는 곱슬머리의 살벌한 선동이 먹힐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일부 사람들의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조금 이상했다. 그들의 눈빛은 자신들의 욕구를 대신 만족시켜 줄 누군가를 살피는 그런 음흉한 모략가의 눈빛이었다.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길 꺼려하면서도, 스스로 목에 방울을 달 사람을 은근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이 무리 가운데 아니 이 세상에서 어쩌면 가장 비열하고 비겁하며 이기적인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이기적인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고, 또 어느 집단에서든 공명심에 들뜬 소영웅주의자들도 늘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한 사람에게도 오만가지 생각이 다 있는데, 지구상에 있는 수십 억 인구를 생각하면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다양하겠는가.
모두가 침묵하고 있는 가운데, 집회의 사회를 맡은 곱슬머리가 군중들을 둘러보면서 목이 터져라 하고 재차 소리쳤다.
"누구 없소? 용기 있는 사람 한번 나와 보시오, 잉!"
"내가 하것소!"
일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드디어 한 사람이 손을 번쩍 들고 나섰고, 사람들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이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내 모두가 깜빡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군종 속에 섞여 있던 동인도 놀라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동인은 친구 집에 다녀오다 집회 참가를 독려하는 전위대원들에게 붙잡혀 이곳에 발이 묶인 것이었다.
사람들이 놀란 것은 경찰서장을 죽이겠다고 손을 들고 나선 사람이 불과 열댓 살쯤 되어 보이는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군중들은 마음은 서글펐고 참담했다. 그럼에도 분위기에 압도되어 어느 누구도 일언반구 반대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이 순간만큼은 모두가 비겁했고, 비겁한 침묵의 대가로 그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오래도록 맛보아야만 했다.
그런데 곱슬머리의 반응은 달랐다. 그는 어린 학생의 선택을 만류하기보다 오히려 쌍수를 들어 환영하며 아주 낯간지러운 열렬한 찬사까지 그에게 퍼부었다.
"학생동무, 그대야 말로 불의를 보고 참지 않는 이 조선의 참된 영웅이요, 언능 나오시오, 언능!"
역시 사람을 뜨겁게 달굴 줄 아는 선동가다운 태도였다. 곱슬머리의 부추김에 발맞추어 전위대원들도 손뼉을 치고 함성을 내지르며 차갑게 식어있는 사람들의 가슴에 다시 불을 질렀다.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어린 학생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의기양양하게 걸어 나갔다. 성큼성큼 보무도 당당하게 걷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치 개선장군 같았다.
아이의 눈은 명분에 대한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이 때문에 경찰서장 앞에 다가선 학생의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학생의 두 손에 끝을 날카롭게 빚은 죽창에 들려 있었다. 이제 실행만 남아 있었다.
막대에 묶여 늘어져 있는 경찰서장과 학생 사이엔 불과 서너 걸음 정도만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모두가 눈을 감고 숨을 죽였다.
학생도 막상 경찰서장을 찌르려 하니 조금 겁이 났던지 잠시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학생이 틈을 보이자 이를 지켜보고 있던 곱슬머리가 손을 들어 신호를 했고, 기다리고 있던 사물놀이 패들이 무슨 축제라도 벌이듯 괭가리와 북을 요란하게 울려댔다.
곧이어 광기의 최면에 걸린 어린 학생이 창을 들고 앞으로 돌진했다. 기다란 죽창이 서장의 배를 뚫었고 분수처럼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동신은 겁에 질려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두려움 때문에 차마 입 밖에 울음소리를 낼 수 없어 이를 악물었고, 두려움과 공포가 뒤섞인 새까만 슬픔이 그의 오장육부 속으로 꾸역꾸역 흘러들고 있었다. <계속> /신용구 소설가·정신과전문의
[신용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