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동건 기자] 박해진은 먹색을 닮은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다. 더러워진 붓을 빨고 난 뒤 양동이에 남은 구정물처럼 가장 탁한 색. 2006년 드라마 '소문난 칠공주'로 시작해 늘 선하고 푸르른 얼굴을 보여줬던 박해진이기에 이같은 답은 생소하면서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대다수의 시청자들 역시 한류스타라는 화려함에 걸맞은 색깔로 그를 바라봐왔을 거라 생각한다.
"예전에는 반대로 이야기했어요. 흰 도화지 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죠. 어떤 색을 칠하더라도 잘 어우러지고 잘 표현할 수 있는 배우요. 비슷한 얘기 같지만, 지금은 미묘하게 달라졌어요. 먹색은 어떤 색을 섞어도 먹색이거든요."
지난 12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박해진은 자신이 서 있는 길과 나아가야 할 방향에 날카로운 눈을 갖고 있었다. 배우로서의 색깔을 찾는 데 집중하고 있다는 그는 바탕은 칠했지만 아직 디테일을 찾아나가는 시기라고 자신을 낮췄다.
"연기에 재미가 많이 생겼어요. 예전엔 겁부터 났는데, 지금은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하게 되고. 그런 시기이기 때문에 좋아요. 현장에 있는 게 좋아요."
'치즈인더트랩'의 배우 박해진이 미디어펜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마운틴무브먼트 제공
그간 주로 브라운관에서 시청자들을 만났던 박해진은 달콤한 화이트데이에 영화 '치즈인더트랩'으로 돌아왔다. '치즈인더트랩'은 모든 게 완벽하지만 베일에 싸인 선배 유정(박해진)과 평범하지만 매력 넘치는 여대생 홍설(오연서)의 두근두근 아슬아슬 '로맨스릴러'를 그리는 작품.
지난 2016년 tvN 드라마로 이미 경험해봤던 유정 선배 역할이지만 두 번째라고 부담이 가시진 않았단다. 순끼 작가의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한 만큼 박해진에게는 양날의 검인 작품이었고, 16부작이었던 드라마를 다시 러닝타임 2시간의 영화로 압축해야 한다는 점에 걱정이 앞섰다.
"'치즈인더트랩'은 심리적인 묘사가 디테일한 작품이라… 그건 지문 한 줄만 갖고도 몇 분의 시간을 잡아먹을지 모르거든요. 워낙 방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속 시원히 다루려면 60부작 정도는 돼야 할 것 같고… 어떻게 담아도 아쉬울 수밖에 없을 것 같고, 드라마를 할 때도 영화를 할 때도 고민됐던 작품이에요."
작품의 인기 요소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기에 출연이 망설여졌을 법도 하다. '치즈인더트랩'은 로맨스라는 큰 줄기를 따르지만, 크고 작은 사건사고에 맞닥뜨리는 대학생들의 애환과 심리 상황을 섬세하게 묘사해 공감을 얻은 작품이다. 그래서 박해진은 작품의 방대한 묘사를 담는 대신, 드라마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유정의 모습을 표현하는 데 더욱 집중했다.
"어쨌든 전 원작을 다 읽고 연기했기 때문에, 갇히고 싶진 않았지만 크게 벗어나고 싶진 않았어요. 대신 원래의 '유정 선배'스러운 모습을 더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유정의 서사를 풀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부드러울 땐 더욱 부드럽고 날카로울 땐 더욱 날카로운 유정의 모습을 가져가려 노력했던 것 같아요."
'치즈인더트랩'의 배우 박해진이 미디어펜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마운틴무브먼트 제공
'치즈인더트랩'의 배우 박해진이 미디어펜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마운틴무브먼트 제공
박해진이 만났던 두 명의 홍설은 어떻게 달랐을까. 드라마를 통해 호흡한 김고은, 그리고 영화에서 만나 오연서가 연기한 캐릭터의 매력 차이를 묻자 그는 "너무 매력적인 홍설들이라 누가 더 매력적이라는 얘기를 못 하겠다"고 답했다.
"고은씨는 고은씨만의 독보적인 홍설 캐릭터를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어디에 맞추려고 하기보단 고은씨만이 할 수 있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인물을 만들어냈죠. 연서씨는 실제로도 똑 부러지는 성격이 있어요. 강단이 있고. 외적인 싱크로율과 겹쳐서 웹툰 캐릭터에 가까운 홍설을 만들어낸 것 같아요."
보기만 해도 기분이 몽글몽글해지는 연애물을 그린 만큼 연애와 결혼에 대한 생각도 많아졌을 것 같다. 하지만 의외로 연애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다고 밝혔다.
"일과 사랑 중에 고르라고 한다면 1초 만에 일이라고 대답할 거에요. (결혼을) 생각할 나이긴 한데 생각할 겨를이 없어서… 언젠가 좋은 사람이 생기면 생각해봐야겠죠."
일을 주저없이 1순위로 꼽을 만큼 요즘의 박해진에겐 연기가 먼저다. 특히 중국 활동이 큰 원동력이 됐다는 그는 "아무리 다른 곳의 환경이 좋아도 내 방 내 침대가 편하듯 타지에서 심적인 고생을 하고 돌아오니 행복하더라"라고 털어놓았다.
"우리나라에 돌아오니 말이 통하는 배우와 연기를 하는 게 이런 행복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뒤로는 더 일에 애착이 가는 것 같고, 그런 자극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연기하고 있어요."
'치즈인더트랩'의 배우 박해진이 미디어펜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마운틴무브먼트 제공
K팝 스타들처럼 하나의 브랜드를 구축한 배우로서는 최전선에 있는 박해진. 어떻게 알았는지 해외 일정이 있을 때마다 비행기 옆좌석을 예약하는 대만 팬이 기억에 남는단다. 이를 들으니 한류배우로 발돋움하기까지의 과정과 이를 겪은 당사자의 시각은 어땠는지도 궁금해졌다.
"한류배우라는 말은 아직도 어색해요. 애초에 그런 걸 노린 것도 아니고, 좋은 기회에 좋은 작품이 들어와서 아직까지 하고 있는 거고. 하지만 책임감은 늘 갖고 있어요. 늘 노출된 직업이고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칠지 알고 있기 때문에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신중하려고 하죠."
처음 연예계 일을 시작할 때 자신도 스타가 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단다. 그러다 방황했고, 위기도 겪었고, 기나긴 극복의 시간 끝에 한 꺼풀 더 단단해졌다. '소문난 칠공주'의 대박 이후 어리고 허황된 생각만 가졌다는 그는 지금 "작품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좋은 캐릭터가 있다면 역할의 크고 작음, 매체를 가리지 않고 도전하고 싶다"고 바람을 내비쳤다.
'치즈인더트랩'의 배우 박해진이 미디어펜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마운틴무브먼트 제공
'치즈인더트랩'의 배우 박해진이 미디어펜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마운틴무브먼트 제공
박해진은 일이 없는 날에는 여자친구 대신 사랑스러운 조카들과 꽁냥거리고 있다. 평소 베이킹이 취미라는 그는 "사실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데, 먹어줄 사람이 없으니 애들 핑계로 하는 거다"라며 색소를 넣어 호빵맨 팬케이크, 무지개 크레이프 케이크 등을 만드는 법에 대해 신나서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가 굽는 빵처럼, '치즈인더트랩'은 박해진을 사랑하고 작품을 열렬히 기다렸던 관객들에게 달콤한 선물이 될 것 같다.
"'치즈인더트랩'을 정의할 만한 단어는 없는 것 같아요. '치인트'는 이젠 고유명사가 됐죠. 그래서 굉장히 꿈 같았던 작품이에요. 제가 '유정의 모습을 다 담아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는데 하게 돼서 영광이었고, 두 번째도 너무 좋았어요. 유정은 제가 연기했던 캐릭터 중 제 품에 가장 오래 있었던 캐릭터예요. 이번 영화를 끝으로 놓아줄 때가 된 것 같아요."
[미디어펜=이동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