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김형효(1940~2018년, 한국학중앙연구원 부원장) 선생이 지난 달 24일 별세했다. 그가 대중적 명망가는 아니었지만, 우리 시대 주요 철학자의 한 명이다. 현대사에서 기억돼야 할 인물이기도 하다. 대부분이 강단철학자로 머무는 학계 상황에서 그는 서울대 박종홍, 연세대 이규호 교수 등과 함께 개발연대 박정희 통치에 대한 철학적 뒷받침을 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자유주의 철학자로 분류돼야 옳을 그에 대한 자리매김이 필요한데, 유감스럽게도 그 작업에 한국사회는 완전히 손 놓고 있다. 지식사회 자체가 황폐화된 데다가 이념 편향으로 균형을 잃은 탓이 아니면 뭣 때문일까? 미디어펜은 김형효 철학을 자리매김하는 글을 두 차례로 나눠 싣는다. [편집자 주]
타계한 철학자 김형효 교수 재조명 칼럼 <하·끝>
철학자 김형효 교수를 조명하는 글 첫 회를 내보낸 뒤 나름 보람을 느꼈다. 고백컨대 43년 전 서강대에 입학했던 필자는 그 분 제자의 한 명이지만, 중요한 건 공적 담론이다. 비겁한데다 편향된 지식인들로 가득한 사회에 이런 글을 내보내면 어떻게든 메아리가 없지 않겠다는 기대가 컸다.
첫 글을 본 뒤 "김형효 선생이라면 혼란기의 한국사회를 어찌 봤을까?"하는 생각을 많은 이가 하실 것이다. 습관처럼 나도 "박정희 대통령이 살아 계시다면 골병든 대한민국 호를 어떻게 이끌까?" 생각을 하지만 한 번은 거인의 어깨 위에서 세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지난 글에서 나라 전체가 폭민(暴民)정치의 아수라장인 지금 상황을 환기시켜드렸다.
엉뚱한 세력이 집권해 국가 정체성을 바꾸려고 들고, 여기에 동조하는 대중은 '분노하는 신'으로 돌변해 광우병-촛불 집회 때마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그 통에 법치는 오래 전 무너진 것이 우리 현주소다. 이 모든 게 김형효 선생이 손대다 만 자유주의 철학의 부재 탓인데, 이참에 좀 더 구체적이고 근원적인 대목을 물어보자.
한국은 남북 모두가 세계에 유례없는 정치적 광기의 표본인데, 대체 왜 그런가? 북한은 전체주의 광기가 막장이고 한국 역시 폭민정치의 광기가 지배한다. 참으로 고약한 상황인데, 그 역사문화적 뿌리가 있다면 실체는 뭘까? 또 어찌 처방해야 할까? 마침 이걸 다룬 김형효 선생 강의 동영상을 유튜브에서 발견했다. 3년 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공개강좌다.
제목은 '국민강좌 52회-한국인 심리의 이중성'으로, 유튜브에 '김형효 교수'를 치면 바로 뜬다. 지금까지 조회수는 1600회에 댓글은 단 하나뿐이다. 귀한 것일수록 홀대를 받는 법이지만, 보석 중의 보석이라는 걸 제자인 나는 금세 감지할 수 있었다. 강의 첫 마디가 이랬다.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나라, 제일 좋은 나라를 만들까?" 그게 김형효란 분을 말해주는데, 그는 철학을 한답시고 공허한 무중력 공간을 부유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런 차원에서 한국인의 집단정서를 들여다봐야 하는데, 그가 말한 한국인 심리의 이중성은 우선 못 말리는 순수(純粹)주의가 하나 있고, 그와 동시에 신바람의 에너지가 있다.
즉 한국인은 순수와 신바람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이중성을 갖고 있는데, 순수주의 지향부터 살펴보자. 일테면 조선조 시조에서 가장 빈번한 시어가 명월(明月, 밝은 달), 청산, 고죽(孤竹) 송림(松林) 등이다. 우린 전부터 맑음-순수함을 무한 동경해왔다. 온통 지조와 절개의 상징어들이다.
김형효 교수는 3년 전 그의 강좌에서 '편협으로 치달을 수 있는 순수주의', '광기-광란과 종이 한 장 차이인 신바람'…. 을 언급했다. 김 교수는 한국인은 이중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콘트롤이 잘 안 된다고 지적했다. 사진은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촉구 8차 촛불집회가 열린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참가자들이 촛불을 흔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윤동주의 '서시'가 한국인의 애송시인 것도 그 맥락인데, 문제는 그런 순수성이란 게 삽시간에 편협함으로 치닫는 점이다. 조선조 당쟁도 그렇고, 양명학조차 사문난적으로 규정해 주자학만을 고집하는 것도 그 때문인데, 작은 차이나 현실에서 묻은 때 같은 걸 참지 못하는 심성이 우리에게 있다. 그래서 명분에 그토록 매달리며, 엉뚱한 일도 벌어진다.
새나라 조선을 세운 이성계-정도전보다 구체제 고려에 매달렸던 최영-정몽주를 지조파로 더 추앙한다. 조선 선비들이 그랬지만, 21세기 우리도 그렇다.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했던 김구를 높이 치고 건국 대통령 이승만 낮춰보는 것도 그런 심리를 반영한다. 그게 문제다.
상식이지만 유교의 목표는 둘이다. 수양을 통해 안으론 거룩해지고(內聖), 밖으론 현실에 참여하는(外王) 것인데, 한국인은 내성엔 막강해도 외왕엔 젬병이다. 순수에 대한 고집 탓이 아니면 뭣 때문일까? 그건 중국 풍토와도 사뭇 다르다. 저들의 경우 당 태종을 최고의 정치인으로 꼽는데, 그는 아버지에게서 권력을 탈취했고, 세자로 책봉된 형을 죽였다. 결과가 좋고 정치에 성공했더라도 우린 그런 인물을 사람 취급조차 않는다.
내성을 사회화하는데 영 서툰 것이다. 타협을 모르며, 세상을 흑백논리로 따지는 편협함은 그 때문일까? 그게 한(恨)으로 발전할 경우 상대방 해코지도 불사하며 이웃 일본을 대하는데 보듯 앙앙불락한다. 한국인이 생명처럼 여기는 순수함이란 이토록 약이자 독이지만, 신바람의 에너지도 그렇다.
60~70년대 박정희 시절처럼 한 번 발동 걸리면 벌떡 일어서는 동력이 분명하지만, 요즘 우리 사회에서 보듯 아차 하면 정치적 광란, 종교적 광란으로 연결된다. 그 이유가 중요한데, 김형효에 따르면 신바람 에너지의 뿌리는 고대의 제천의식이며, 고대 이래의 샤머니즘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구려의 동맹(東盟), 부여의 영고(迎鼓) 등이 그 흔적이다.
최치원이 낙랑비 서문에 쓴 풍류도란 것도 모두 그쪽인데, 그건 일단 흥(興)과 멋스러움을 간직한 집단정서다. 잘 콘트롤이 될 경우 훌륭한 에너지이지만, 잘 안 될 경우가 재앙적 결과를 낳으니 그게 문제다. 그렇다. 김형효가 말하는 한국인 집단정서 혹은 집단무의식은 이렇게 요약된다.
'편협으로 치달을 수 있는 순수주의', '광기-광란과 종이 한 장 차이인 신바람'…. 그게 지난 3년 전 강좌에서 그가 말한 한국인 심리의 이중성이다. 그 점을 언급하며 그런 이중성이 콘트롤이 잘 안 된 재앙적 사례로 그는 조선조의 그 지독했던 사문난적, 서열철폐, 당쟁과 함께 "우리사회의 지금 문제"라고 포괄적으로 언급했다.
그건 행간을 잘 새겨들어야 하는데, 지난번 칼럼에서 내가 명시한 그대로가 아닐까? 대중은 '분노하는 신'으로 돌변해 광우병-촛불 집회 때마다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탄핵이네 뭐네 하며 나라 전체가 폭민(暴民)정치로 돌변하는 광란…. 북한의 광기 못지않게 지금 우리가 문제다.
김형효 교수는 생전 "나는 경주 석굴암 본존불, 서산 마애불 같은 우리나라 돌부처의 그 부드럽고 그윽한 미소도 사랑합니다. 인도나 중국 어딜 가도 그런 현묘(玄妙)함이 없거든요. 그 경지를 우리 시대 어떻게 구현하죠?"라고 자문했다. 사진은 충남 서산의 용현 계곡의 마애여래삼존상. /사진=연합뉴스
이런 상황에서 뭘 할 것인가? 강의 말미 그는 "한국인은 무엇보다 깊이 있는 국민, 깊이 있는 문화, 깊이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못이 깊으면 더러운 걸 자정하는 힘이 커진다"는 말도 덧붙였다.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국민이 지혜롭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도 했다. 생애 만년 그의 속마음을 잘 드러낸 것으로 나는 안다.
나머진 우리가 채워 읽으면 되는데 사실 철학자가 그 이상의 구체적인 처방을 언급할 수도 없다. 다만 그가 생애 내내 동서 비교철학 속에서 얻은 안목으로 원효의 묘합(妙合)의 중도사상을 말했고, 의상의 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에 드러난 하나사상을 연구했음을 기억해둘 일이다.
뿐인가? 퇴계-율곡에 대한 연구도 결국은 그런 맥락이다. 쉽게 말해 원효-의상-퇴계-율곡 연구란 "신바람의 집단정서를 큰 저수지에 모으고 이성화하는 작업"이었다. 고대 이후 한국철학의 대가들은 '약이자 독인' 한국인 집단정서를 한 차원 높이려고 애썼다는 뜻인데, 그게 21세기 지금도 과제다. 아니 더 없이 절실하다. 강의 말미 그가 했던 말을 다시 음미해보자.
"내가 만일 방송 관계자라면 가수 등이 혼자서 부르는 노래보다는 합창 프로그램을 많이 내보내겠습니다. 격정적인 한국인의 정서를 나는 경계하고 무서워하는데, 그런 에너지를 하나로 모으고 승화시키는 과제에 합창 프로그램이 도움이 될 겁니다. 나는 경주 석굴암 본존불, 서산 마애불 같은 우리나라 돌부처의 그 부드럽고 그윽한 미소도 사랑합니다. 인도나 중국 어딜 가도 그런 현묘(玄妙)함이 없거든요. 그 경지를 우리 시대 어떻게 구현하죠?"
여기까지다. 차제에 김형효 철학을 공부하려면 8년 전 나온 '김형효 철학편력' 시리즈(전3권)와, 3년 전 나온 '김형효 철학 전작' 시리즈(전5권)도 참조하면 된다. 고백하지만 뒤늦게 철난 필자인 나도 엊그제 전질을 주문했다. 하지만 그건 매우 전문적이고 오늘 소개한 강의 동영상만 해도 썩 훌륭하다. /조우석 언론인
[조우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