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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는 죽었다?…비극의 역사 부르는 '멈칫거리는 사람'들

2018-05-13 08:30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옛말에 '말이 씨가 된다'는 표현이 있다. 일반적으로 '말 함부로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서양에도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라는 표현으로 'Speak of the devil'이 쓰인다. 예전에 악마 이름을 부르면 진짜로 악마가 그 현장에 나타날 미신이 있었는데, 거기서 유래한 속담이다.

말이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도 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처럼, 어렸을 때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주를 보고 "그놈 참 장군감이야. 장원급제할거야"라고 말했더니 진짜 장군이 되고 고위직에 올랐다는 식의 이야기도 나온다.

말은 미래에 대한 예상이나 예언을 뜻한다. '나쁜 일'을 예상하면 그대로 나쁜 일이 생기고, '좋은 일'을 예상하면 실제로 성공으로 이어진다는 것. 정신과 임상에서 가장 잘 나타나는게 불면과 공포증이다. 정신과에 오는 환자의 4분의 1은 불면증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오늘 밤에 또 못 자면 어떻게 하나'라는 게 최대의 걱정이다. 그러다가 밤이 다가오면 잠을 못 자게 될까 봐 걱정하고, 걱정을 하면 자율신경계가 자극을 받기 때문에 실제로 잠이 안 오고, 그게 악순환이 되어 뜬눈으로 밤을 새게 된다.

공포증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폐쇄된 공간에서 공포 발작을 경험한 사람은 비슷한 상황을 눈앞에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계속 걱정을 하게 되고 이것이 불안으로 이어진다. 운동선수들의 경우 '혹시 실수하면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이 실제로 실수를 불러온다. 골프선수들이 해저드(물)를 걱정하면 공이 그곳으로 날아가는 이치와 비슷하다.

이러한 현상을 '자기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이라고 하는데, 사회학자 윌리엄 토머스(William Thomas)에서부터 기원했다고 한다. 그는 사람들이 어떤 상황을 마음속에서 '실제'라고 결정해버리면, 결국 그 결과에 있어서 그 상황이 실제가 된다고 주장했다. 사람은 객관적 상황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해석한 상황에 반응하기 마련이며 그러한 반응들이 모이면 해석한 그대로 상황이 전개된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에는 멈칫거리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최악을 피하기 위해서는 차악이라도 선택해야 하는데, 다들 "모두 나쁜 XX야"라면서 육두문자만 내뱉을 뿐 직접 참여하지 않는다. '행동없는 푸념, 실천없는 비난'의 연속이다. 그렇게 해서는 절대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다. 그걸 바꿀 수 있는 주인공은 '실천하는 당신'이다. /사진=미디어펜


최근 한국 정치에서 보수의 침체를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대표적인 보수논객(수구?)이라는 김대중 조선일보 고문도 그중 한 사람이다. 그가 5월 9일자에 쓴 <文정권 1년>을 보자.

"문 정권은 집권하자마자 재빨리 자기들이 하고자 하는 일들에 손을 댔고 너무도 이른 시일 안에 효과를 얻고 있다고 자부하는 듯하다. 사회는 좌·우 대립적으로 갈렸고 '남·남'은 갈등을 넘어 원수로 가고 있다. 이 와중에 저들은 지지 세력이 우세한 판도로 만들어 갔다. 좌파 정책을 정치·교육·문화·경제·법률 면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걸고 들어갔다. '촛불'로 갑자기 득세해 정권을 어부지리로 얻었다고 보기에는 너무도 치밀하게 준비해온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들의 속도와 확신이 무섭기까지 하다.

문재인 정권은 후퇴하지 않는다. 국회도, 야당도 정치 쇼의 대상일 뿐 타협하지 않는다. 저들은 바로 직전의 전직 대통령을 두 명씩이나 동시에 감옥에 집어넣고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미·북 정상회담이 성공하고 문 정권이 6·13 지방선거에서 이기고 나면 저들을 견제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야권도, 언론도, 시민 단체도 '국민 지지'를 등에 업은 저들의 원격조종에 속수무책일 것이다.

한국 보수는 6·13 선거마저 내주고 나면 상당 기간 긴 휴면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현 집권 측은 최소한 다음 정권까지는 집권을 이어갈 것이고 아무 계획도, 인물도, 장치도 없는 보수는 계속 허우적거리기만 할 것이다. 이것이 좌파 정권 등장 불과 1년 만에 생긴 변화다. 보수 우파는 한마디로 '망해도 싸다'."

김대중 고문이 이런 글을 쓴 의도는 무엇일까? 스스로 자신의 글에 대한 무력감을 드러낸 것은 아닌지….자신의 부정적인 시각이 오히려 더욱 현실을 나쁘게 만든다는 것을 몰랐다면 그가 누려온 '펜의 힘'도 이젠 많이 힘이 빠진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역사는 늘 절망을 얘기하는 사람이 주역이 아니었다. 희망을 얘기하고 거기서 싹을 발견하는 사람들이 만들어갔다. 김대중 고문의 글과 비교해 지난 4월8일자 국민일보에 나온 <중도, 멈칫거리는 사람들>의 글을 보자.

"해방 정국의 희생자들 가운데 대부분은 이념이 다른 적대 세력에 의해 희생된 것이 아니라 우익은 우익의 손에 죽었고 좌익은 좌익의 손에 죽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같은 이데올로기 집단 안에서도 중도 온건 노선을 배신이나 변절 또는 기회주의자로 보려는 극단적 도그마와 성숙되지 않은 이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치학자 신복룡 전 건국대 교수가 '해방 정국의 풍경'이라는 저서에서 밝힌 대목이다. 송진우 장덕수 등 중도파의 비극적 운명을 이야기하면서다. 당시 정치세력은 우국적 고민보다 성급하고 충동적이었으며 광기와 무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극단의 세력들은 백주테러도 서슴지 않았다. 김규식 등 중도 온건파는 설자리를 잃었고 그 뒤에 전쟁과 분단이 뒤따랐다. 신 교수는 "어느 역사를 보더라도 중도 온건파가 박해받는 사회의 말로는 비극적"이라고 했다.

대개의 사람들은 온건 중도파의 정치 정향을 보인다. 신복룡 전 건국대 교수는 그들을 두고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도 갖고 있고 역사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를 알아볼 수 있는 안목도 있지만 그들은 '질주'하고 싶지 않을 뿐"이라고 했다. '멈칫거리는 사람'들인 셈이다.

6월 13일 전국 동시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파 간 다툼이 치열하다. 언뜻 민심을 얻기 위한 보수와 진보의 가치 싸움처럼 보이나 실속은 내부의 권력 투쟁에 더 무게가 실려 있다. 우리는 직접민주주의 선거를 통한 두 번의 정권교체를 통해 극좌와 극우를 극복하는 방법을 배웠다. 선거를 앞두고 양 진영이 내부의 권력 투쟁으로 서로에게 총질하는 막장 짓을 하더라도 국민은 투표권을 행사해야 한다. 삶의 가치를 덜 훼손하는 '차악의 선택'을 해야 한다. '차선의 선택'을 향한 과정이 차악 선택이다.

역사는 늘 중도에 멈칫거리고 팔짱만 끼고 있는 사람들로 인해 극좌나 극우가 득세했다. "방관자적 자세로 국가를 바라보는 국민은 이기적이다.(책 <이기적 국민> 발췌)"라는 표현처럼 역사의 방관자들이 히틀러를 만들었다.

세상에 최선을 찾기 어려우면 차선을 찾아야 하고, 최악을 피하려면 차악이라도 선택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조금이라도 개선된다.

지금 한국에는 멈칫거리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최악을 피하기 위해서는 차악이라도 선택해야 하는데, 다들 "모두 나쁜 XX야"라면서 육두문자만 내뱉을 뿐 직접 참여하지 않는다. '행동없는 푸념, 실천없는 비난'의 연속이다. 그렇게 해서는 절대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다.

자기충족적 예언이란 언뜻 보아선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러한 운명의 사슬을 푸는 해법은 바로 '푸념과 비난'만 일삼는 그러한 당사자들에게 있다. 지금 세상에 대한 불만이 많다고? 그걸 바꿀 수 있는 주인공은 '실천하는 당신'이다. /김필재 정치평론가

[김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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