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될 걸 애시당초 내다봤지만, 상황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북한이 미북정상회담을 보이콧할 수 있다는 으름장과 함께 남북 고위급회담 취소를 통보해왔다. "마주 앉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란 협박과 함께 문재인 정부에게는 "현실에 초보적 감각도 없는 무지무능한 집단"이라며 막말까지 퍼부었다. 조평통위원장 리선권이란 자의 입이 이렇게 거칠다.
미국도 흠칫 했다. 외무성 제1부상 김계관이 회담 보이콧을 시사하자, 미국은 리비아식 모델이 아닌 트럼프 모델을 적용할 것이라며 한발 뺐다. 당장 워싱턴에선 미북회담 회의론이 커졌다. 이게 중간의 조정의 국면일까? 아니다. 차제에 북한 김정은의 실체를 제대로 살펴볼 마지막 기회다.
무엇보다 판문점 회담 직후 독재자 김정은을 '대세남'으로 등장시킨 나사 풀린 한국 사회부터 반성해야 한다. 이래도 꼬마 독재자 김정은이 뚱뚱하지만 귀여워 보이는가? 그를 "핵 포기를 고민하는 소년가장"으로 바라봐온 한국 언론은 또 뭔가? 적장(敵將) 앞에 이렇게 아부하고 교태를 부리는 건 핵 인질화가 사실상 완성됐다는 뜻일까?
그걸 묻지 않을 수 없는 국면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태영호 전 공사가 펴낸 <태영호의 증언:3층 서기실의 암호>란 회고록의 진단이 맞다. 북핵은 체제유지의 원천이라서 비핵화 이행은 실현 불가능하다고 봐야 하며, 풍계리 폐쇄도 쇼일 가능성이 높다. 북한은 원래가 그런 집단이니까.
단 김정은이 "즉흥적이고 거친 성격"이라고 하는 태영호의 비판은 충분치 않아 보인다. 동원돼 작업하는 사람들에게 고래고래 고함치는 욕쟁이, 민물 양식장 책임자가 맘에 안 든다는 이유로 즉결 총살시킨 잔혹남, 고모부를 고사포로 쏴 죽인 인간백정 등에 대한 고발론 결코 양에 안 찬다. 김일성-정일-정은 3대에 대한 구조적 이해가 곁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망명 선배 황장엽이 한 수 위인데, 그가 남긴 적지 않은 단행본을 통해 우리는 김일성-정일의 스타일을 익히 알고 있다. 내가 파악한 핵심은 이렇다. 김정은은 할아버지-애비 성격을 꼭 닮았지만, 희한하게도 아래로 내려올수록 상태가 나빠지고 인간적으로 간장종지란 점이다.
지난 달 27일 오후 경기도 파주시 판문점 남측 평화의집에서 남측 문재인 대통령과 북측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함께 판문점 선언문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한국공동사진기자단
김일성 자체가 "속물"이었다는 게 황장엽의 지적인데, 그래도 아들보다는 상대적으로 나았다. 김일성이 "불가피해서 독재를 한다"는 쪽이라면, 정일은 "독재 자체에서 기쁨을 느낀다"는 쪽이었다. 포악한 성격도 정일이 더 했다. 일테면 측근 한 사람이 정일의 난잡한 생활을 술김에 자기 아내에게 실토한 적이 있었다. 순진한 아내는 김일성에게 간곡한 고발 편지를 썼다.
"아들 정일을 타일러 주십사"하는 내용인데, 공교롭게도 그게 정일의 손에 들어갔다. 당시 정일의 발상은 엽기를 넘어 쇼크 그 자체다. 술 파티에 그 부인을 끌고 나와 총살하라고 명령했다. 그 끔찍한 상황에서 남편이 나서서 "내 손으로 아내를 처형하게 해달라"고 애걸했다고 한다.
그게 인간 세상에 펼쳐진 가장 참혹한 지옥도의 풍경이다. 그런 상황을 즐기던 인간이 정일이다. 권력 쟁취과정도 그러했다. 정일은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려는 학습을 주도했고, 그걸로 일어섰다. 경쟁자인 삼촌 김영주를 그걸로 제쳤는데, 핵심은 아버지를 신으로 떠받드는 전략이다. 영화·연극 등 문화를 총동원해 우상숭배를 시작한 것이다.
북한현대사에서 김일성보다 더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인물이 김정일이라는 게 오래 전 내 판단이다. 사회주의 흔적을 완전히 없애고 전대미문의 수령절대주의를 완성한 게 그 무시무시한 인물이니까. 현대북한의 진정한 창시자는 김일성이 아니고 아들 정일이란 뜻이다.
이게 썩 흥미로운 대목인데, 전후 서방세계를 놀라게 했던 평양발 경제발전 드라마가 있었다. 그게 대동강의 기적이다. 소련-중국 원조로 만든 모래성이었지만, 성취는 성취다. 당시 헬렐레 하던 애비에게 주체교(敎)라는 독이 든 술을 권해 끝내 취하고 쓰러지게 한 것이 아들이란 뜻이다. 즉 정일은 주체종교 신정(神政)국가를 만든 주인공이다.
초기 기독교에 비유컨대 그는 신앙체계를 만들었던 사도 바울인 셈일까? 달리 말해 마오쩌둥과 김일성의 차이가 중국과 북한을 갈랐다. 만년의 마오는 마오이즘을 선포하려고 발버둥을 치며 미치광이처럼 굴었지만 그래도 덩샤오핑 같은 후계자 그룹이 숨 쉴 공간은 허용했다.
속물 김일성은 그게 시야가 없었고 '악마 아들' 정일이 태어나 북한을 망가뜨렸으니 우리로선 그게 행일까 불행일까? 문제는 지금이다. 그렇게 망가지고 역사 속에 사라지는 게 순리이던 북한을 일으켜 벌떡 세운 건 김대중-노무현이었다. 그래서 소련 동구권 몰락에도 살아나 3대째 세습하며 김정은이란 최악의 악마 지도자를 드디어 출현시켰다.
놀랍게도 김정은은 할아버지-애비의 나쁜 DNA를 몽땅 물려받았다. 그래서 꼬마 악마이자 최악의 인물인데, 그가 북핵과 ICBM을 완성해 전 지구를 혼돈에 빠트린 채 미국과 담판을 하네 마네하고 있는 게 지금이다. 20세기 지구촌에 출현한 최대의 악마 3대가 그렇게 쉽게 물러날 리 없다. 상식이지만, 그들은 끌어안아야 할 형제가 결단코 아니다.
이런 엄중한 상황에서 중재-조율한답시고 나선 청와대는 어제 "미국이 북한을 좀 더 이해해야 한다"는 말만 반복했다. 하긴 2000년 김대중과 회담을 하던 당시에도 한국 언론은 김정일을 통 크고 멋진 사람으로 포장했다. 물어보자. 지금도 당신 눈에 꼬마 독재자 김정은이 뚱뚱하지만 귀여워 보이는가? /조우석 언론인
[조우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