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최주영 기자]한진그룹의 위기가 현실로 닥치는 모습이다. 검경 등 사정기관 10곳의 칼날이 그룹과 총수 일가를 직접 겨냥하고 있다. 당장 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이 4일 ‘갑질 논란’이 불거지며 영장실질심사를 받았다. 장녀 조현아 전 부사장도 이날 해외에서 구매한 가구 등을 국내로 밀반입했다는 혐의로 인천세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이명희 전 이사장이 4일 오전 서울중앙지법에 출석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사진=미디어펜
한진그룹은 연이은 악재로 패닉상태에 빠졌다. 재계에서는 당장 사업에 차질이 생기진 않겠지만 일각에서 오너일가의 경영권을 내려놓으라는 압박이 제기되고 있어 수사가 장기화될 경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갑질 의혹 수사 등 곳곳에 암초
“검찰·경찰·관세청·국세청·공정위·법무부·교육부·국토부...”
최근 한진그룹에 칼날을 겨누고 있는 사정기관·정부부처 10곳이다. 지난달 28일과 30일 경찰은 이명희 이사장에 대해 두 차례 소환조사를 통해 갑질 의혹을 조사했다. 4월중순 이후부터 지난달 말까지 진행한 압수수색은 총 11회, 투입인원은 240여명에 달한다.
수사 대상도 ‘갑질 의혹’을 넘어 수백억원대 횡령·배임에서 조세포탈·관세 탈루·밀수 의혹까지 다양하다. 경찰이 압수수색을 끝내면 관세청이 압수수색을 하고, 다시 검찰의 압수수색으로 이어지는 모양새다.
이날 오전 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과 조현아 전 부사장은 나란히 포토라인에 섰다. 이 전 이사장은 구속영장 실질심사, 조 전 부사장은 세관당국 조사를 받고 있는 중이다. 이 이사장은 지난달 28일과 30일 두 차례 걸쳐 경찰에 소환돼 열 시간이 넘는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으나 대부분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장녀인 조현아 전 부사장은 해외에서 구입한 고가의 개인 물품 등을 밀반입 형태로 들여온 의혹을 받고 있다. 일각에선 검찰 수사가 갑질 의혹 등에서 시작돼 한진그룹 전체에 대한 의혹 등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 섞인 전망이 나오고 있다.
아울러 아들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은 1998년 인하대 부정 편입학 의혹과 관련해 이날부터 교육부의 조사를 받는다. 최근 탈세·횡령 혐의를 받고 있는 조양호 회장도 사정기관의 칼날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태다. 이와 관련해 앞서 서울남부지검은 지난달 31일 서울 강서구 외발산동의 대한항공 본사 내 재무본부 등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그룹은 내부적으로도 시끄럽다. 최근 시위에서 공식 출범한 대한항공 직원연대(가칭) 촛불시위가 4차례 연속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조양호 회장을 상대로 최대주주가 선택할 수 있는 권리 중 하나인 경영권을 포기하라고 요구하고 있어 우려가 고조된다.
한진그룹 "각종의혹 해명 총력"
한진그룹은 일단 이명희 전 이사장에 대한 법원의 영장 청구를 우려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전 이사장의 구속영장 청구는 재벌총수 부인이 폭력 혐의로 구속되는 첫 번째 사례라는 점에서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앞서 일각에서 제기된 의혹에 대해 한진그룹 측은 적극적인 해명에 나서며 의혹 확산을 차단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룹은 지난달 24일 보도자료를 내고 "평창동 자택경비원에 4시간 잠자는 것 외에 휴게시간이 없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며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은 경비원을 향해 물건을 던진 적이 없다"고 밝혔다. 한진측은 앞서 지난달 9일 이 전 이사장에 관한 각종 의혹에 "일부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보도돼 해명하고자 한다"며 18개 관련건을 나열하며 모두 반박하기도 했다.
호텔 등 직원에게 폭행을 일삼고 일부를 해고했다는 보도에 대해서도 "이명희 이사장이 호텔 직원 및 호텔 용역직원에게 폭행한 바 없고, 호텔 지배인을 무릎 꿇렸다거나 정강이를 걷어찬 적은 없다"고 해명했다.
이외에도 “칼호텔네트워크에 근무중인 한 외국인 대표는 자신이 입사한 2002년 이후 최근 보도된 제보 내용으로 인해 직원이 해고된 사례는 한 건도 없다"고 확인하는 등 적극적인 대응에 나서 눈길을 모았다.
사업진행은 '이상 무'..최근 홍보도 재개
한진그룹은 사정기관과 정부부처의 잇따른 수사에도 대내외 사업을 성사시키고 있다. 그동안 잠잠했던 대외홍보 기능도 최근 되살아나며 사업이 순항중임을 증명했다.
대한항공은 지난달 31일 조현민 전 부사장의 ‘물벼락 갑질’ 이후 48일만에 미국 델타항공과 합작 사업 확대에 대한 보도자료를 냈다. 앞서 지난달 1일 델타항공과 조인트벤처 사업을 시작한 대한항공은 미국 내 370여개 노선에서 델타항공과 공동노선을 확대하게 됐다.
대한항공은 지난달 12일 조현민 전 전무가 홍보대행사 직원에게 음료를 뿌리고 물컵을 던졌다는 ‘물벼락 갑질’ 의혹이 제기된 뒤 사업과 관련해 제대로 된 홍보활동을 하지 못하는 상태다. 언론사 포럼 등 대외 행사 참석은 물론, TV·라디오·신문·잡지 등 미디어에 기업 이미지 광고도 중단했다.
한 외항사 관계자는 “대한항공과 델타항공의 합작 사업이 최근 속도를 내고 있는 것은 해외에서 이미 활발하게 홍보되고 있다”며 “정작 국내에서는 연일 오너리스크에 따른 제보가 잇따르며 정작 홍보가 뜸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한진그룹 수사 영향은 계열사 진에어로도 번져있는 양상이다. 국토부는 과거 조현민 전 부사장이 불법 등기이사로 재직한 점을 들어 진에어 항공면허 취소 여부를 두고 법리검토에 들어갔지만 법조계에선 행정법상 소급 적용은 어렵다는 분석이다.
재계 “경영권은 조회장 재산권...수사 장기화돼선 안돼”
재계에서는 오너일가의 경영권이 위협받고 있는 점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당장 사업에 미칠 큰 영향은 없더라도 사정기관의 수사가 장기화될 경우 한진그룹에 불리한 상황이 조성될 수 있다는 점에서다.
최근 대한항공 일부 직원들은 조 회장 가족의 일탈을 문제 삼아 최대주주인 조 회장을 상대로 경영권 자체를 포기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재계에서는 이 부분이 ‘사유 재산권 위협’에 해당된다고 본다. 경영권은 조 회장 재산권의 일부인 만큼 이것이 인위적으로 훼손될 경우 침해에 해당한다는 설명이다.
헌법상 보장된 사유재산권과 경영권을 부당하게 침해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도 이같은 발상이 나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분석이다.
익명을 요구한 재계 고위임원은 “회사 임직원들이 최대주주인 조 회장은 물론 조 회장 일가에 경영 퇴진을 요구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본다”며 “무엇보다도 회장일가에 대한 수사가 진행 중이며 구체적인 위법행위가 뚜렷하게 나오지도 않은 상황에서 경영권을 강제하는 발상으로 비춰질 수 있어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재계는 조현민 전무가 던진 ‘물컵’ 하나로 모친 이명희 전 이사장의 갑질 의혹에 이어 총수일가의 지분구조 재편 가능성까지 확대되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다.
검찰 수사선상에 올랐던 대기업 관계자는 “지금은 기업들이 하반기 사업 구상에 몰두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사정당국 수사로 일손을 놓은 상태”라면서 “최근 한진그룹 수사가 재계로 확대되는 것을 보며 무차별적 기업 떄리기 수사가 이어지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미디어펜=최주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