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이었다.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은 시대였다. 믿음이 뿌리 내린 시간이자 불신이 만연했다.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을 품은 봄이면서도 절망에 눌린 겨울이기도 했다. 우리 앞에는 무엇이든 펼쳐진 듯하면서도 아무 것도 없었다. 모두가 천국으로 직행하고자 했지만 곧장 지옥으로도 향하고 있었다."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많이 읽힌다는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의 장편 역사소설 <두 도시 이야기>의 그 유명한 첫 문장이다. 소설은 영국인이 생각하는 프랑스대혁명 이야기이고, 그 안의 혁명과 인간 그리고 사랑-희생이 리얼하게 펼쳐지는데, 첫 문장이 이토록 역설적이고 모순적이다.
첫 문장만 그런가? <두 도시 이야기> 전체가 그렇다. 혁명 당시 무질서-폭력으로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들, 완장질에 푹 빠진 빵집 주인, 선량하든 안 하든 묻지 마 공격을 받는 귀족 이야기는 디킨스의 표현처럼 지혜-어리석음, 빛-어둠, 천국-지옥이 교차하던 역사 전환기의 풍경을 보여준다. 하지만 18세기말 프랑스의 드라마가 2018년 한반도만할까?
지난 1~2년 새 새삼 드는 생각이 바로 그러한데, 지금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고통과 혼란을 좀 넓은 시야 속에서 조망해보고 싶다. 그 일환으로 이 짧은 글을 쓰는데, 물론 프랑스혁명이 갖는 세계사적 의미는 크다. 하지만 지금 한반도문제는 프랑스혁명보다 판이 크면 컸지 작지 않다.
세계사적 모순의 결과물인 북핵과, 반 문명의 악당(惡黨)인 김정은 문제가 똬리 틀고 있고, 그게 동북아 질서의 판을 바꾸는 것은 물론 슈퍼 파워 미국 본토까지 위협한다. 동시에 최후의 냉전 게임이기도하니 실로 복합적이고 구조적이다. 그럼에도 꽉 막혀 출구가 안 보인다. 놀랍게도 미국 트럼프가 남북이 하나된 위계(僞計)지략 앞에 허둥대고 있다.
결정적으로 이 나라 국민 대다수 역시 위장평화 쇼의 포로가 됐다. 내 눈엔 대한민국 전체가 하이재킹을 당했는데도 대중은 눈치도 채지 못하고 있으며, 지식인-언론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눈만 꿈쩍댄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게 우리가 꿈꿔온 지혜-믿음-빛-희망의 그림일 순 없지 않을까?
지금 상황은 1년 반 전과 단순 비교를 해봐도 아찔하다. 당시엔 그래도 희망이 없지 않았다. 넘실대는 태극기 집회 속에서 법치-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집단적 각성이 이뤄지고 있으며, 그게 대한민국을 어리석음에서 지혜로, 어둠에서 빛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이끌어줄 것이라고 우린 믿었다.
잠깐 새 상황이 바뀌었다. 문재인의 대선 승리와 이후 전개된 적폐청산 이름의 반(反)대한민국 폭주를 끊어낼 애국우파의 역량은 전혀 듬직해 보이지 않는다. 건국 이래 이념적 합의가 깨진 한국사회의 현주소가 그저 참담하다. 보수 대몰락을 보여준 6월 지방선거 결과도 그러했다. 상황이 그러하니 밤잠을 설친다고 호소하는 이들도 주위에 상당수다.
한반도가 '위장평화쇼' 앞에 대전환기를 맞고 있다. 남북의 집권층 사이엔 사실상의 통일전선이 형성됐다. 그 본질을 직시 못하는 국민은 그게 평화요, 대화라며 착각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5월 26일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서 진행된 남북정상회담을 마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진=청와대 제공
문재인 정부는 통상적인 좌파정부일까, 아니면 체제변혁 민중혁명이란 운동권-좌익의 오랜 꿈을 실천 중일까? 아직도 합의된 답이 없다. 걱정은 비판의 촉각을 곤두 세워야 할 조중동 중견 기자들까지 "문재인 정부는 그래보니 프랑스 미테랑 같은 중도좌파 수준인데, 뭘?"하며 심드렁하다는 점이다.
그게 이 나라 미디어의 현실이다. 상황이 그러하니 대중의 집단최면은 채 손을 쓰기 힘든 국면이다. 지금 국면에서 너와 나 구분 없이 우리가 앓고 있는 집단 질병을 1)통일전선병, 2)자기만족병, 3)중도병의 세 개로 나는 파악한다. 이 질병을 온전히 치유해야 지금의 눈먼 어리석음에서 빛의 지혜로, 지옥의 나락에서 천국의 길로 비로소 이끌 수 있다.
차제에 짧게 점검해보면, 통일전선병은 지금의 남과 북은 정상적 대화-외교의 파트너 관계가 아니며, 기이할 정도로 한 몸으로 움직이며 사실상의 유착(癒着)이 이뤄졌다는 진단이다. 그건 김대중-노무현에 이은 제3기 민주정부라고 자임하는 문재인 대통령 취임 이후 벌어진 놀라운 상황이다.
구체적으로 남북의 집권층 사이엔 사실상의 통일전선이 형성됐다. 그 본질을 직시 못하는 국민은 그게 평화요, 대화라며 착각하고 있어 걱정이다. 통일전선병이 깊어지면 어떻게 될까? 연방제통일 선포를 포함해 대한민국이 통째로 떠내려가는 상황이 어느날 갑자기 도래할 수도 있다. 그런 통일전선병이란 꽃이 활짝 피도록 하는 또 다른 괴질이 자기만족병이다.
남북한 사이의 체제 경쟁은 끝났으며, 국력이 50배 이상 큰 대한민국의 승리로 귀착됐다는 섣부른 판단이다. 그런 상황에서 좀 못 사는 아우 김정은을 끌어 안아주는 게 대한민국의 도리라는 동포애까지로 발전한다.
"당신은 아직도 냉전시대 사고의 틀에서 갇혀있다"는 공격을 견디기 힘들어 스스로 투항하는 결과인데, 과연 그럴까? 예전 망명객 황장엽의 지적처럼 한 체제가 완전히 붕괴됐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했을 때라야 체제경쟁이 끝났다고 선언할 수 있다. 지금의 덜떨어진 자기만족 심리가 북에 먹히는 최악의 결과로 이어질까 봐 요즘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걱정이다.
그보다 훨씬 대다수의 국민들이 걸려있는 괴질의 정체가 중도병인데, 그들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리영희 식의 감성팔이 레토릭의 피해자들이다. 이념 대립의 격화 속에서 어느 한 쪽으로 쏠리지 않고 있다는 자부심마저 그들은 갖고 있는데, 유념해둘 게 있다.
리영희야말로 마오이스트로 출발했다가 소련 동구 몰락 이후 종북주의자가 방향을 선회한 인물이다. 수많은 운동권이 리영희의 뒤를 따라 종북의 길을 들어섰고, 유감스럽게도 어제 오늘 이 나라 대중의 시민의식 결정적으로 오염 시켜놓았다. 아니다. 너무 점잖게 말했다. 쉽게 말해 통일전선병-자기만족병-중도병이란 정말 죽어봐야 지옥 맛을 아는 괴질이 아닐 수 없다.
다음 달로 우린 건국 70년인데, 이런 국가자살의 징후를 보인다는 게 도무지 말도 안 된다. 이걸 뛰어 넘어야 지혜-어리석음, 천국-지옥이 교차하는 무대에서 우리가 승리할 수 있다. 디킨스의 표현대로 앞으로 몇 년 "최악의 시절이자 최고의 시절"로 어떻게 바꾸고 역전 드라마를 만들어낼 것인가? 그것이 관건이다. /조우석 언론인
[조우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