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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그는 전략적 사고의 달인이었다

2018-08-17 09:45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세상이 제정신이 아니다. 새 정부의 적폐청산 드라이브는 부국 대통령 박정희를 '원조 적폐'로 낙인찍었고, 세상은 그를 자꾸 지우려만 든다. 지난 8월 13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박정희 시대의 남북대화' 포럼(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개최)은 한강의 기적을 만든 그 지도자의 잊혀진 진면목을 되새겨보기에 좋은 계기였다. 무엇이 박정희 18년을 특별한 시대로 만들었나의 요인 분석을 상 하 두 차례 칼럼으로 점검한다. [편집자]

[연속칼럼]-다시 보는 박정희 정치와 그의 스타일(上)

조우석 언론인

"키신저와 레 둑 토가 파리평화협정(73년 1월 타결) 비밀 회담을 한창 진행하던 1972년도 일입니다. 미국이 월남에서 발 빼려는 그 때 박정희 대통령이 주변에 물어봤어요. 월남이 얼마나 버틸까? 10년은 가능할 것이라는 낙관론이 오갈 때 그 분이 손가락 세 개를 쫙 펴서 좌중에 들어 보이시더라구요. 3년을 못 버틴다는 예측인데, 어때요? 꼭 그대로 됐잖습니까?"

13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박정희 시대의 남북대화' 포럼에서 강인덕(86) 전 통일부장관이 기조연설에서 밝힌 일화다. 사전 배포된 연설문에는 없는 즉석연설이었다. 그런데 정말 박정희의 예견 대로 월남은 그로부터 3년 뒤인 75년 4월 맥없이 패망하며 우릴 놀라게 했다.

그 증언을 하는 강 전 장관은 기억력이 대단했고 군더더기 없는 스피치가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그 대통령에 그 참모'란 느낌부터 들었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위대한 성취를 낳은 박정희 18년의 매카니즘을 알아챈 기분이었다. 눈여겨볼 건 그의 기조연설문이 전 통일부 장관 대신 전 중앙정보부 북한국장이란 타이틀로 돼있다는 점이다.

그는 60~70년대 중정에서 북한 정보분석만 하며 16년을 내내 재직했는데, 그게 "제일 자랑스러운 내 타이틀"이라고 그날 밝혔다. 포럼 다음 날 그에게 전화해 "박통이 손가락 세 개 들어 보인 걸 직접 보셨느냐?"고 확인했더니 그 자리는 당정협의였고, 자신은 배석해 모든 걸 지켜봤다고 대답했다.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은 지난 8월 13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박정희 시대의 남북대화' 포럼을 에서 개최했다. 사진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7년 12월 17일 구마고속도로 개통테이프를 끊은 후 환호하는 시민들을 향해 손을 들어 답례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자료


그 이전 "북한 문제하면 강인덕"이란 인식 때문에 30대 실무자인 자신이  박통을 독대하며 수시로 보고했다. 역대 중정부장도 모두 그걸 알고 있었다. 그날 강 전 장관은 이렇게 말을 이었다. "나는 김일성을 내려다보며 근무한다고 자부했는데, 딱 한 분이 예외였습니다. 누구겠습니까? 박 대통령이시죠. 북한을 보는 눈이 항상 하나 위이셨던 겁니다."

그리고 다음 증언이 그날 연설의 핵심이다. "적을 가장 잘 아는 건 박 대통령 한 분인데 그건 모든 상황을 꿰는 전략적 사고에서 가능합니다." 그날의 키워드인 전략적 사고의 또 다른 사례로 그는 박정희의 100억 달러 수출론을 꼽았다. 가발 팔고 해서 10억 달러 수출이란 기적을 만든 게 67년이다.
그때 박정희는 자기만족에 빠지지 않았다. "우린 100억 달러를 수출할 것이고, 곧 동서독의 국력차이만큼 남북한 사이가 벌어질 것"이라고 강인덕 앞에서 예견했다. 당시로선 상상도 못할 비전이라서 그 날 자기 일기장에 물음표 하나를 큼지막하게 달아놨다. 그런데 무슨 일이 벌어졌나? 불과 7년 뒤인 74년 우린 100억 달러 수출에 성공하지 않았던가?

이런 일화가 한둘이 아니다. 유달영 전 서울농대 교수는 65년 제2한강교(지금의 양화대교) 준공식 당시 일화를 공개한 바 있다. 그 자리에 참석했더니 박 대통령이 "앞으로 이런 한강다리를 열 개쯤 더 만들어야겠다"고 하더란다. 그 말을 듣고 자기 귀를 의심했다는 게 유달영의 증언이다.

반세기 전 당시엔 그런 포부가 "너무도 황당해서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김두영 지음 <인간 박정희, 인간 육영수>)는 것이다. 도로-항만-도시계획과 경제발전 모든 면에서 지금의 대한민국이란 이런 전략적 사고 속에 디자인됐는데, 이런 게 박정희 찬탄에 그쳐선 안 된다. 이춘근 박사는 그걸 "박정희식 국가경영"이라고 밝히는데 그게 포인트다.

즉 국가안보를 위해 군사력을 키운다는 게 대부분 지도자의 발상인데, 그는 달랐다. 경제력을 키워 군사력 기본을 다지자는 우회전략이었다. "빈곤 추방이 공산주의와 싸워서 이기는 길"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실제로 우리 군사비는 100억 달러 수출에 성공한 74년 직후부터 북한을 앞질렀다.

76년 우린 군사비 15억 달러를 썼는데 그해 북한 군사비(8.8억 달러)를 압도한 건 물론이며, 그 전 해 우리 군사비(7.1억 달러)의 두 배 이상으로 불어났다. 그리고 박정희의 전략적 사고란 추상적인 게 아니었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성공과 직결된 문제다. 데탕트 물결 앞에 준비 안 된 월남이 패망하는 걸 봤던 그로서는 선제적 혁신조치를 취하기로 결단했다.

그게 72년 유신 선포다. 모르면 몰라도 국가 최고지도자로 자기의 도리를 다했다고 그는 내심 자부했을 것이다. 필자인 나는 그걸 확신한다. 놀랍게도 지금도 못난이들이 유신을 정권연장책으로 보고, 헌정유린 타령을 반복하는데, 몰라도 너무 모르고 시야가 좁아도 너무 좁다.

지난 8월 13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박정희 시대의 남북대화' 포럼에서 강인덕(86) 전 통일부장관이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반복하자. 유신이란 정치학 원론에 등장하는 방어적 민주주의 원리로 대한민국을 구출해낸 성공사례다. 남북대화 흐름도 박정희가 옳았다. 그날 포럼 주제대로 6.25 뒤 남북대화의 첫 물꼬를 튼 주인공이 그였음을 기억해두자. 남북관계 전환점인 8.15 평화통일구상 선언(1970)과 7.4남북공동선언(1972)이 바로 그의 작품이 아니던가.

자, 오늘의 중간결론이다. 문재인 정부가 눈여겨볼 대목이 이 대목이다. 경제력을 키워 평화와 대화를 말할 수 있게 된 게 순전히 박정희 덕인데, 지금 우리는 '박정희 반대로'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게 어렵게 쌓아올린 경제력을 갖다 주고 투항하는 것을 평화요 대화라고 착각하는 건 아닐까?

강 전 장관의 그날 기조연설에서 이런 조언도 했다. 지금도 남북대화에서 북측 대표가 지키고 있는 기본 원칙은 생전 김일성의 다음과 같은 발언이라는 것이다. "통일은 반미 민족해방투쟁인 동시에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혁명과 반혁명 사이의 날카로운 계급투쟁이다."

참고로 강 전 장관은 평양고보 출신. 6.25 학도병이던 그는 대학 때 "공산주의를 공부하자"고 결심했다. 그런 인연으로 당시 최고의 정보기구이던 치안국 특수정보과에서 대학 내내 아르바이트하며 정보업무와 인연을 맺었다. 근무했던 곳은 진보당 조봉암을 취조했던 방이고, 불온문서로 가득했다. 휴전 이후 빨간책을 가장 많이 읽은 사람이 그였다.

중정 근무도 자연스러운데, 실은 중정 탄생 직전 근무 명령을 받았던 케이스다. 5.16 직후인 6월10일 관계 법령과 함께 중정이 탄생했는데, 그는 그 이전 이미 낙점을 받아뒀다. 중정을 '사람 잡는 곳'으로만 아는 못된 세태 속에 강인덕이란 이름 석 자 자체가 특별한 의미를 가진 셈이다.

그렇다면 최고의 정보맨인 그가 증언록을 펴낼 타이밍이 지금이다. 무엇보다 그는 박정희와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졌는데, 박정희가 남북관계 전환점인 8.15 평화통일구상 선언과 7.4남북공동선언을 하게 된 배경에도 강인덕의 결정적 보고가 있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그 얘긴 다음 회로 이어진다. /조우석 언론인

[조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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