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규태 기자]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사건 재판에서 항소심 재판부가 24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관련해 포괄적 현안 및 묵시적 청탁의 존재 모두를 인정해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한국정부를 상대로 낸 8600억 원(7억7000만 달러) 상당의 투자자-국가간 소송(ISD)에 먹구름이 꼈다.
서울고등법원 형사4부(김문석 부장판사)는 이날 오전 열린 박 전 대통령의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이재용 부회장은 계열사를 통합하면서 그룹 미래전략실을 통해 지배권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고 그에 따른 지배구조 개편을 진행했다"며 "정부에서 삼성에 경영승계에 관한 여러 우호적 조처를 했다는 점에서 경영권 승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으리라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밝혔다.
또한 재판부는 이날 "국민연금공단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찬성하는 과정에 박 전 대통령의 지시나 승인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당초 박 전 대통령의 항소심 재판에서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던 것은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 사이에 '경영권 승계작업이라는 포괄적 현안의 존재를 전제로 한 묵시적 청탁이 있었는지' 여부다.
실제 당시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은 이 과정에 부당 개입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어 항소심까지 유죄를 인정받았다.
법조계는 앞서 법무부가 세계은행 산하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에게 묵시적 청탁을 불인정하는 취지의 1심 판결을 인용해 답변서를 제출했으나, 이번 항소심 선고가 이를 깨버려 엘리엇측이 유리해졌다는 평가를 내렸다.
일각에서는 향후 묵시적 청탁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판단에 따라 현재 ICSID에 제기된 ISD 소송의 유불리가 좌우될 것으로 관측했다.
법무부의 ISD 소송 대응에 대해 법관 출신의 한 법조계 인사는 "앞서 엘리엇에 대한 답변서에서 법무부는 '명시적 또는 묵시적 청탁을 입증하지 못했다'는 서울중앙지법의 1심 판결을 인용했다"며 "이번 항소심 판단을 엘리엇측이 분명 활용할 것이고 이에 따라 법무부가 어떻게 대응해도 자충수에 빠져 궁지에 몰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애초에 문재인 정부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간 합병에 대한 국민연금의 찬성 결정은 잘못'이라고 인정하면서 선택지를 줄였다고 볼 수 있다"며 "법무부 등 문재인 정부가 이에 대한 방어에 나설 명분과 논리가 부족하다"고 덧붙였다.
또한 그는 "대법원 상고심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재용 부회장 간의 포괄적 현안 및 묵시적 청탁에 대해 어떠한 최종판단을 내릴지가 관건"이라며 "대법원이 만약 이를 인정할 경우 정부가 엘리엇과의 ISD 소송에서 패소해 손해배상금을 물게 될 가능성이 크고 이렇게 될 경우 삼성물산 소액투자자들이 집단 줄소송에 나설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검찰 출신의 법조계 인사는 ISD 소송과 관련해 "엘리엇측은 분명 항소심 재판부와 대법원 등 한국 사법부의 판단을 근거로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고 주장할 것"이라며 "정부로서는 오히려 대법원이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에 거액의 손실을 감수하거나 주주가치를 훼손하는 배임적 요소가 없다'는 입장을 받아들여야 ISD 소송에서 유리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다른 법조계 인사는 "법무부로서는 '최순실 국정농단'을 수사한 박영수 특검팀이 제기한 공소사실과 수사결과 대부분을 부정해야 한다"며 "수천억 원이라는 국익이 달린 일에 대해 법무부가 제대로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법무부는 지난달 13일 "한국 형사법원은 박 전 대통령, 행정부 구성원, 국민연금 직원 등의 위법적인 행위 결과로서 합병이 제안되거나 합병이 통과됐다고 판단하지 않았다"며 "명시적 또는 묵시적 청탁을 검찰이 입증하지 못했다"는 내용으로 엘리엇측의 중재 신청에 대한 답변서를 제출했다.
특히 법무부는 답변서에서 "하급심 판결에 따르더라도 한국 정부의 위법한 조치로 인해 문제 되는 합병이 제안됐다거나 그 합병안이 통과되기에 충분한 주주의 찬성을 받게 됐다는 증거는 없다"고 밝혔다.
대법원이 삼성의 승계 작업이라는 현안과 묵시적 청탁, 그로 인한 국민연금의 부당한 개입 여부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릴지 주목된다.
법무부는 7월13일 세계은행 산하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에게 묵시적 청탁을 불인정하는 취지의 1심 판결을 인용해 답변서를 제출했다./자료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