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귀원장 고전특강(18) - 문명과 야만의 경계를 허문 관용과 응징의 리더십, 로마 문화의 전파로 유럽을 연 카이사르 보고문학(reportage)의 백미 카이사르(BC 100~BC44)의 <갈리아 전쟁기>
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
▲ 박경귀 행복한 고전읽기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 |
동서양에 걸쳐 이론가들의 병서는 많다. 하지만, 전쟁을 직접 수행한 장수가 실제 작전 상황과 전쟁 수행 과정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희귀한 사례다. 특히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는 기원전 51년에 출판되자마자 당시 로마인들에게 베스트셀러로 인기를 끌었다. 당시 갈리아 정벌에 대한 로마인들의 관심과 야만족이라 두려워하던 게르만인과 브리타니아인들에게 대한 호기심이 얼마나 컸는지, 또한 카이사르의 활약상에 로마가 얼마나 열광했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역사상 알렉산더나 징키스칸 등 많은 전쟁 영웅들이 있었지만, 전쟁의 상황을 직접 기록으로 남기지는 못했다. 16세기에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와 <임진장초>가 비망록이자 전쟁 보고문의 형태로 가치가 있고,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을 괴롭히며 ‘사막의 여우’로 불린 독일민족의 영웅 에르빈 롬멜 장군의 <보병전술> 등이 남아 있을 뿐이다.
물론 윈스턴 처칠의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도 1953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큼 전쟁 문학의 백미로 꼽힌다. 하지만 그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정치인이었지, 일선의 지휘관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그의 책에 묘사된 내용에서 전투 수행 과정의 박진감과 처절함을 생생하기 느끼기엔 한계가 있다.
기원전 1세기의 갈리아 지역에는 크게 벨가이인, 아퀴타니인, 갈리아인이 나누어 살고 있었다. 세 지역 모두 언어, 제도, 법률이 서로 달랐다. 각 지역은 수많은 부족들이 단일한 국가를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수시로 전쟁을 통해 지배와 복속이 순환되는 상황에 있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정복을 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갈리아 남부 지역에 위치한 로마의 속주 프로빈키아를 침범하기 위해 알프스 지역에서 이동해 오던 헬베티 족의 진공을 막기 위해서였다. 프로빈키아는 이탈리아 북부와 맞대고 있고, 로마의 안보에 직접적으로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이 게르만족과 북부 갈리아인들의 침입에 늘 불안해했었다는 점에서 카이사르의 갈리아 진군은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
물론 에게 해의 해적을 소탕하여 제해권을 장악하고 이집트를 제외한 소아시아와 동방을 정복하여 명성을 떨친 당대의 영웅 폼페이우스에 견주어 뚜렷한 공적이 적었던 카이사르가 자신의 군공(軍功)을 세울 대상으로 서북쪽의 갈리아 지역을 내심 선택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로마인의 두통거리를 해결한다면 그의 명성은 자연히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든 카이사르의 갈리아 속주 방어 작전으로 시작된 갈리아 진입은 갈리아 지역의 여러 부족과 맞대결하면서 갈리아 지역 전체의 정복 사업으로 확장된다. 그 과정에서 카이사르는 가장 용맹하고 전투력이 강한 헬베티 족을 제압하고, 다수의 부족을 회유하거나, 무력으로써 전 지역을 평정해 나간다.
하지만 갈리아인들은 일시적으로 로마군에 굴복하여 카이사르의 통치를 받아들였다가도 로마 군단이 취약점을 보이면 즉시 공격으로 돌아서는 경우가 허다했다. 특히 특정 부족의 걸출한 지도자가 나와 반란을 선동하면 언제든지 로마를 배신하고 다른 갈리아 부족과 연합하거나, 또는 라인 강 넘어 게르만 부족까지 끌어들여 로마 군단을 기습하는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카이사르가 42세이던 기원전 58년부터 49세가 되는 기원전 51년까지 무려 8년간이나 갈리아에서 발이 묶여 전쟁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로마인들에게는 갈리아인의 저항은 반란이지만, 갈리아인에겐 자유의 쟁취를 위한 투쟁이었다. 따라서 언제든지 폭발할 여지를 안고 있었다. 이런 갈리아인들의 반감과 저항을 최고조로 이끈 걸출한 인물은 베르생제토릭스(Vercingetorix, 베르킨게토릭스)였다. 그는 갈리아 한 부족의 왕족 출신으로 오랫동안 분열되어 있던 갈리아인들에게 자유의 쟁취를 호소하며 탁월한 리더십으로 여러 부족을 설득하여 대다수 갈리아 부족의 군사력을 연합시킨다. 카이사르와 대적하는 대반란을 주도한 것이다.
카이사르에게 최대의 위기이자 도전이었다. 이 책에는 베르생제토릭스와의 여러 차례의 전투 상황이 상당한 분량으로 상세하게 기록되었다. 하지만 이 갈리아의 젊은 총사령관은 최후의 결전인 알레시아 공방전에서 카이사르에게 패배하여 항복함으로써 로마군을 축출하려던 갈리아인의 꿈은 좌절된다. 그는 후일 로마에 포로로 끌려가 투옥되었다가 끝내 교수형에 처해졌다.
▲<카이사르에게 항복는 베르생제토릭스>, 리오넬 노엘 로이어 (Lionel-Noel Royer), 1899년 작, 크로자티에르 박물관(Musee CROZATIER) 소장 |
하지만 베르생제토릭스는 프랑스인들에게 특별한 영웅으로 기억된다. 그가 추구하던 자유와 자치에 대한 열망의 가치가 프랑스인들의 자유정신과 맥이 닿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고대의 영웅이 전후 프랑스의 ‘첫 번째 레지스탕스’로 추대된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물론 그가 현대 프랑스인에게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를 고취시키는 영웅으로 추앙될 수 있었지만, 사실 당시의 고대 갈리아인들에겐 민족적 동질감에 대한 자각이나 민족국가적 개념은 전혀 없었다. 각 부족은 단지 자기 부족의 생존과 확장을 위해 언제든지 다른 부족을 정복하거나 약탈하는 게 일상이었다. 이에 따라 수시로 부족 간의 합종연횡(合從連衡)이 있었을 뿐이다. 즉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각 부족은 자기 부족의 생존을 위해 다른 갈리아 부족은 물론 게르만인이나 로마의 라틴인 등을 가리지 않고 언제든지 동맹을 맺거나 적으로 삼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특히 라인 강 동쪽의 게르만족의 잦은 침략과 약탈에 시달린 라인 강 서쪽 지역의 몇몇 갈리아 부족들은 로마 군대가 자기 부족의 생존을 지켜주는 데 유용하다고 판단해 로마에 협조적이었다. 즉 갈리아 국경의 안정을 위해 로마 군단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이런 상황을 정복사업에 유리하게 활용했다.
한편 라인강 동쪽의 게르만족 가운데도 카이사르와 화약을 맺은 부족이 있었다. 우비족이었다. 이들은 게르만의 최대 부족이자 가장 호전적인 수에비족으로부터 약탈과 침략을 수시로 당하면서 종족의 보존을 위해 로마 군에 의지했다. 카이사르는 로마와 화약을 맺은 우비족은 끝까지 보호함으로써 게르만족이나 갈리아인들에게 로마가 동맹을 얼마나 중시하고 동맹을 통해 어떤 혜택을 가져오게 하는지를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이런 신뢰의 확산 전략은 갈리아 전쟁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유지된다.
갈리아 정복과정에서 카이사르가 효과를 거둔 전략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선 관용과 응징을 적절하게 배합했던 점이 주효하지 않았나싶다. 로마에 우호적인 부족에게는 동맹에 준하는 연대와 지원, 즉 타 부족의 침입을 막아주거나, 타 부족으로부터 조공을 받게 해주는 혜택을 부여했다. 나아가 타 부족에 인질로 잡혀간 부족민을 송환시켜 주고, 부족의 왕족이나 귀족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하여 그들의 권위를 세워주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지역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하이두이족을 포섭하여 이런 방식을 시행했고, 다른 부족에 확산 적용함으로써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상당히 많은 부족들을 복속시켜 나갈 수 있었다. 또 로마에 협력하고 화약을 맺는 부족은 인명과 재산을 해치지 않고 식량 조달 등 자발적 협력과 인질만 요구했다. 반면에 로마인을 살해하거나 항복했다가 배반하고 역습을 한 경우에는 처절한 응징을 가했다. 아투아투키족을 굴복시킨 후 주민 5만여 명을 노예로 매각한 경우도 그런 예의 하나다.
▲카이사르 대리석 두상, 작가 미상, 1세기 작품으로 추정, 코린토스 박물관 소장, ⓒ박경귀 |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확실하게 지배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로 그가 갈리아 지방의 분열된 부족 사이의 분쟁에서 때로 중재자의 역할과 최종적인 판결자의 역할을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수행해낸 점을 꼽을 수 있다.
아울러 전투의 수행에서 적이 예기치 못한 기동력을 발휘한 것도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다. 로마 군단은 알프스의 험준한 산악을 넘어갈 때도, 게르마니아의 라인 강을 건너 진군할 때도, 브리타니아에 상륙할 때에도 적이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속도전과 함께 다양한 전술을 구사했다.
게다가 로마군은 참호와 해자, 방벽 등 진지의 구축, 공성탑과 다양한 공성 엄호 장비의 활용, 다리의 건설, 함선의 건조 등에서 탁월한 토목 및 건축 기술과 조선 기술 및 시설 장비 제작 능력을 발휘했다. 카이사르는 곳곳에서의 진지전, 공성전, 도강전, 상륙전에서 군사 전략과 기술 역량을 효과적으로 결합하여 활용한 상황을 아주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는 당시 다방면에 걸쳐 로마 군대의 역량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보여주는 동시에 당시 로마인들의 전반적인 기술 수준이 다른 민족에 비해 월등하게 뛰어났었다는 점을 입증해준다. 이런 점이 단지 군사들의 용맹과 전투력에만 의존하던 게르마니아 군대나 갈리아 군대를 압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을 수행하면서 라인 강을 넘어 두 번이나 건너 게르마니아 지역을 공격하고, 도버 해협을 건너 브리타니아를 정벌한 것도 세계사적 의미를 갖는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지역에 용병을 파병하는 등 지속적으로 지원하던 게르마니아와 브리타니아 지역에 분명한 쐐기를 막지 못하면 갈리아 정복이 실패로 돌아간다는 점을 간파했다.
갈리아의 배후세력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확전은 이후 게르만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하고, 갈리아를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로마의 영향 여부에 따라 문명지역과 야만지역으로 갈리던 당시의 상황에서 로마 군대의 진출은 두 지역에 대한 군사적 대결을 넘어, 문화 사회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기본적으로 로마의 영역을 라인 강 서쪽으로 한정하고 라인 강 동쪽의 게르마니아 정벌을 무리하게 확대하지는 않는다. 갈리아 지역에 한정하여 로마화에 주력함으로써 후일 갈리아 지역을 속주화하여 로마 제국의 영역을 유럽 대륙의 심장부로 확장하는 기초를 다졌다고 볼 수 있다.
후일 10세기에 독일의 오토 대제가 자신의 제국을 신성로마제국으로 칭하며 로마 제국의 부활과 연장을 표방했던 것도 오랫동안 로마 문명으로부터 소외되었던 게르마니아 지역의 콤플렉스를 만회하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카이사르가 지휘관으로서 보여준 불굴의 용기와 솔선수범의 자세는 부하 군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을 수 있게 한 큰 덕목이었다. 이런 리더십이 있었기에 곤경에 처했을 때나 승패의 중요한 고비마다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전투에 임하게 할 수 있었다. 병사가 지휘관을 신뢰하고 따를 때 전략과 전술의 효과가 제대로 발휘된다. 카이사르는 장교와 병사들이 '카이사르'라는 이름 그 자체에 대한 자부와 자랑을 느낄 수 있게 만들었다. 로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으로 손꼽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 같다.
카이사르가 부하들을 복종시키는 중요한 비책은 설득이었다. 부하들이 막연하게 적에 대해 두려워할 때, 그는 연설을 통해 그 두려움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규명하여 그 허상을 일깨워주고, 로마 군이 용감하게 난관을 극복한 사례를 상기시킴으로써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고 용기를 북돋웠다.
또 아군이 밀리는 위태로운 상황이 되면 자신이 병사의 방패를 빼앗아 들고 최전선으로 나섰고, 주변의 백인대장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을 독려했다. 이런 카이사르의 헌신적 솔선수범은 병사들에게 희망과 용기의 불씨를 되살려 전세를 역전시켰다. 이런 리더십이 바탕이 되었기에 전투를 벌일 때마다 카이사르의 진홍색 망토가 휘날리면 장병의 사기가 충천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를 “전쟁 기술에 관한 최고의 교과서”라고 극찬했다. 나폴레옹이 유럽 해방 전쟁을 수행하면서 먼 과거에 프랑스의 영토 위에서 8년간이나 전쟁을 수행한 카이사르를 전쟁의 교사로 삼았다는 점은 아니러니하다. 하지만 누구를 대상으로 전쟁을 했느냐를 차치하고, 자신과 똑같이 일선의 최고사령관으로서 전쟁의 여러 상황에서 탁월한 전술과 전략, 리더십으로 승리를 이끌어낸 카이사르에게서 수많은 교훈과 영감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갈리아 전쟁은 카이사르 개인에게 군인으로서, 대규모 조직의 리더로서의 자질과 역량을 확실하게 발휘하게 만든 시험장이었다. 나아가 군대의 총사령관을 넘어 로마의 유력한 정치인으로서의 위치를 공고하게 해주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삼두동맹을 이끌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갈리아 전쟁이 그리스와 로마의 우월한 문명을 유럽 대륙에 전파하는 계기를 만든 문명사적 의미도 작지 않다.
<갈리아 전쟁기>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 펜을 놓지 않은 무인이자 문인으로서의 카이사르의 천재성도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가 전쟁 중에 쓴 수많은 연설문과 산문, 시, 편지 및 소책자는 모두 사라졌지만, 현재까지 남은 <갈리아 전쟁기>와 <내전기>만으로도 그의 간결하고 명료한 문체, 화려한 수식이 없는 질박하면서도 힘이 있는 그의 문장력이 이를 입증해 준다. 두 저작이 라틴어 과정 학생들이 라틴어 원전으로 공부할 때의 교과서로 가장 많이 이용되는 책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박경귀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
☞추천도서 : 『갈리아 전쟁기』, 카이사르 지음, 김한영 옮김, 사이(2012, 1판 14쇄), 39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