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동건 기자] 김향기는 영주 그 자체였다. '여왕의 교실' 심하나, '우아한 거짓말' 천지, '신과함께' 덕춘이 그랬듯 김향기는 매번 인물 그 자체가 된다. 영화라는 가상의 프레임을 잊게 하는 열연이 매 순간 놀랍도록 눈부시다. 캐릭터와 한 몸이 되는 건 곧 배우의 힘일 테다.
'영주'의 배우 김향기가 미디어펜과 만났다. /사진=CGV아트하우스
차성덕 감독의 장편 데뷔작 '영주'는 교통사고로 한순간에 부모를 잃고 동생 영인(탕준상)과 힘겹게 살아가던 주인공 영주(김향기)가 교통사고 가해자들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19세 나이에 가장 노릇을 하는 영주는 도둑질을 하다 경찰에 붙잡힌 동생 때문에 합의금을 물어줘야 하는 상황에 처하고, 상문(유재명)·향숙(김호정) 부부 가게의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하게 된다. 그리고 곧 깨닫는다. 그토록 증오하고 원망했던 가해자들의 민낯은 추악하긴커녕 속죄와 사랑을 아는 어른의 모습이었다는 걸. 불편하지만 의지하고 싶고, 낯설지만 행복한 영주의 아이러니한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가슴 한켠이 애틋하고 또 쓰라리다.
올해로 데뷔 13년 차인 김향기는 김호정, 유재명과 많은 대사를 주고받진 않지만 그 아련한 공기 속 눈빛과 감정을 주고받는다. 보이지 않는 실 같던 그들의 관계가 차츰 꿰어지고 선명해질 때, 김향기에게선 꿋꿋한 애어른의 표정이 지워지고 온몸으로 사랑을 받고 싶은 소녀만 남아 있다. 그 얼굴이 애처로워 가슴으로 쓴 감정만 삼켰다.
최근 '영주' 개봉을 앞두고 서울 종로구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향기는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땐 '내가 영주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데 촬영을 하다 보니 충분히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김향기는 촬영장에서 느꼈던 생각부터 '영주'로 10대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된 소회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의 사연을 한 꺼풀 벗길 때마다 올곧게 자란 영주와 이야기하는 듯 깊은 감흥이 다가왔다. 마음으로는 이미 어엿한 성인이었다.
'영주'의 배우 김향기가 미디어펜과 만났다. /사진=CGV아트하우스
▲ '영주'를 본 소감은. '김향기가 다 했다'는 말이 많은데.
"'영주'가 감정선이 중요한 영화라 제 얼굴이 많이 비치다 보니 그런 인식이 남으신 것 같아요. 지금까지의 제 모습과는 결이 다르기 때문에 관객분들이 '김향기에게 이런 얼굴도 있구나' 하는 걸 느끼신다면 행복할 것 같아요."
▲ 김호정과 모녀 또는 자매처럼 흐뭇한 장면들이 많이 나왔다.
"제가 좋아하는 대사가 '영주야, 너는 좋은 아이야. 아줌마는 알 수 있어'에요. 촬영을 할 때 앞에서 그렇게 이야기해주시는데, 영주 입장에서 확 와닿는 거에요. 그걸 계기로 영주의 마음이 바뀔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런 감정을 싹트게 해주신 것에 대해, 영주를 잘 표현할 수 있게 해주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영광이었어요."
▲ 유재명과 직접적인 소통 대신 미묘한 감정의 교류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직접적인 교류는 아니지만,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고 있고 말을 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애잔함이 잘 표현된 것 같아요. 선배님과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지만 같은 공간에서 대사를 주고받고 연기를 하면서 느껴지는 호흡이나 공기가 정말 따뜻했어요. '응답하라 1988'에서 동룡이 아버지로 나오셨을 때 너무 재밌고 귀여운 모습이었는데, 이번에는 상문의 처절함과 무게감이 너무나 느껴졌어요. '엄청 다양한 모습을 갖고 계시는구나' 느꼈죠."
▲ 작품 출연을 결정하는 기준은?
"캐릭터가 굉장한 매력을 품고 있는 작품도 좋지만, 전 요즘 작품이 갖고 있는 메시지나 분위기가 머릿속에 맴돌고 매력 있다고 느껴지면 연기를 하고 싶어요. '영주'를 선택하게 된 것도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영화의 분위기가 여운에 남아서였거든요. 그리고 시나리오를 읽고 남았던 여운이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의 여운과 거의 일치해서 좋았어요. 긴장을 많이 했는데 안도감을 찾았죠."
▲ 동생을 보살피는 집안의 가장을 연기했다. 실제 오빠와 사이는 어떤가.
"영화와는 많이 달라요.(웃음) 어렸을 땐 오빠와 엄청 친했는데, 지금은 오빠가 군대에 가 있어서 가끔씩 연락하고 있어요. 사실 오빠와 비슷한 시기에 사춘기가 왔는데, 서로 표현하는 걸 어려워하다 보니 몇 년 동안 말을 안 했어요. 영화에서 영주와 영인이 그랬듯 사람들은 원하는 것과 느끼는 것이 다르잖아요. 아무리 가족이라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고, 자신의 감정이 중요하고. 지금은 다 풀고 잘 지내고 있어요."
'영주'의 배우 김향기가 미디어펜과 만났다. /사진=CGV아트하우스
▲ 한양대 19학번 연극영화과 수시 전형 합격 소식으로 화제가 됐다.
"기사가 올라온 날 많은 분들이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주셔서 뭔가 잘 해내고 싶다는 마음이 확 와닿더라고요. 부담이 되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더 잘 적응하고, 지치지 않게 웃으면서 지내고 싶어요. 대학에 가면 또래 친구들과의 교류가 많은 자극이 될 것 같아요. 친구들이 생각하는 연기, 가치관도 들어보고 싶고… 또 다른 생각으로는 저도 친구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있었으면 해요."
▲ 학생 김향기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배우 활동을 하다 보면 제약이 많고, 편한 행동도 조심스러워야 하고, 학교 생활도 잘 못 누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같은 또래 배우들보다는 훨씬 편했던 것 같아요. 동네에 힘이 돼주는 친구들이 많았거든요. 인복이 있는 것 같아요."
▲ 두 달 뒤면 성인이 된다. 작품 활동에도 변화가 생길까.
"성인이 되긴 하지만 1년이 지난 거잖아요. 1년을 기점으로 큰 변화를 주는 건 무리인 것 같아요. 관객분들과 작품의 기회를 주시는 분들이 절 너무 잘 알고 계시다는 생각이 들어서. 확 바뀌려고 하면 금방 들통이 날 거에요. 성인이 돼서 선택의 폭은 넓어졌지만 이미지 변화를 추구하진 않을 것 같아요. 맡는 배역을 잘 소화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 그간 학교 생활과 촬영을 병행하며 힘든 점은 없었나.
"아무래도 영화를 많이 하다 보니 학교에 갈 수 있는 시간도 많았고, 또래 친구들과 좋은 추억도 많이 쌓은 것 같아요. 아직까진 크게 힘에 부치거나 힘들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아직도 잘하고 싶고. 요즘 많이 염두에 두는 건 제가 지치지 않도록 컨트롤하는 거예요. 물론 좋아서 하는 일이고 이 일을 위해 고민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좋아하는 일을 오래하기 위해선 스스로를 관리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 차기작 '증인'에서는 자폐아 소녀 역을 맡는다. 쉽지 않은 배역을 맡게 됐는데.
"따뜻한 영화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평소 이한 감독님 영화의 분위기를 좋아하기도 하고, 이번 작품은 따뜻함 속에서도 날카로운 메시지가 분명히 있어서. 저도 어떻게 완성이 될지 궁금해요."
'영주'의 배우 김향기가 미디어펜과 만났다. /사진=CGV아트하우스
'영주'의 배우 김향기가 미디어펜과 만났다. /사진=CGV아트하우스
'영주'의 배우 김향기가 미디어펜과 만났다. /사진=CGV아트하우스
[미디어펜=이동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