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동건 기자]
사진='시' 스틸컷, 김기덕필름, 더팩트 제공
올해는 강렬한 작품을 통해 대중과 평단을 사로잡았던 거장의 귀환이 눈에 띄었다. 먼저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 '밀양', '시' 등 파격적인 소재를 시적인 상징과 특유의 정서로 버무렸던 이창동 감독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데뷔 후 첫 도전한 미스터리 장르를 통해 관객들의 감각을 휘저어놓았고, 암담한 시대 젊은이의 무력한 표정에 점화를 시도했다. 타이틀롤 그대로 '버닝'이었다.
반면 영화 작업 외 사생활 추문으로 관객들에게 외면받은 두 거장 감독도 있다. 김민희와 불륜 스캔들 후 국내에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홍상수 감독과 성폭력 의혹에 휩싸인 김기덕 감독이다.
국제무대에서 인정받는 세 명의 거장을 향한 시선은 그야말로 극과 극이었다. 이창동 감독은 '버닝'을 통해 실재에 대한 메타포를 심어놓았고, 개봉 이후 작품에 대한 해석으로 온라인이 뜨거웠다.
홍상수 감독과 김기덕 감독은 논란이 불거진 뒤 꾸준히 작업을 이어왔지만 거센 비난 여론을 누그러뜨리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제67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 나란히 초청되는 등 해외에서는 여전히 사랑받고 있고, 신작을 향한 관심과 기대는 여전하다. 국내외 온도 차는 이렇게 극명했다.
▲ 이창동 감독 '버닝', 어떤 작품보다도 활활 타올랐던 논쟁의 장
제71회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버닝'은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 벌칸상 등 2관왕을 차지한 것을 시작으로 제55회 대종상영화제 최우수작품상, 제38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촬영상 등 유수의 영화제를 휩쓸었다. 국내외 평단으로부터 작품성을 인정받았지만, '버닝'만큼 관객들 사이 작품에 대한 논쟁으로 활활 타오른 작품도 없었다.
'버닝'은 유통회사 아르바이트생 종수(유아인)가 어릴 적 동네 친구 해미(전종서)를 만나고, 그녀에게 정체불명의 남자 벤(스티븐 연)을 소개받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시'(2010) 이후 이창동 감독의 8년 만 신작으로, 공개 오디션을 통해 발탁된 신예 전종서의 활약은 물론 대체 불가 존재감의 유아인, 할리우드 스타 스티븐 연의 열연이 강렬한 드라마를 완성시켰다.
'버닝'은 영화적 관습에서 많이 벗어나 있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는 영화는 아니다. 관객들은 종수, 해미, 벤의 서사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바라보는데, 이 경우 서사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갖은 비평과 지적이 많았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미스터리를 다룬 이창동 감독의 의도와는 멀어진 셈이지만, 재밌는 현상이었다.
"어떤 관객은 '영화가 청년의 분노를 다루는데 왜 이렇게밖에 해결이 안 되냐'고 하더라고요. 어떤 사람은 벤이 분명 살인자인데, 왜 이렇게 반응하냐고 하고. 근데 사실 벤이 살인자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거든요. 그냥 관습적으로 믿는 거죠. 관객들은 그걸 원하기 때문에. 제 방식이 낯설기도 하겠죠. 근데 이런 눈으로 바라보는 영화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어느 하나가 반드시 옳은 건 아니라는 거죠." (지난 5월 가진 이창동 감독 인터뷰 中)
모호함 그 자체를 느끼라는 감독의 메시지는 분명 관객들에게도 신선한 경험이었을 테다. '서사란 무엇인가'라는 이창동 감독의 질문에 관객들은 제각기 다른 답을 내놓았고, '버닝'을 둘러싼 공론장이 활발했던 한 해다.
'버닝'은 비록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데드풀' 등 슈퍼히어로 영화와 흥행 대결을 펼치게 돼 어려운 승부를 했지만, 2018년 가장 강렬한 영화였다고 말하고 싶다. 그간 서정적인 은유와 서사로 관객들의 마음을 어루만졌던 이창동 감독의 또 다른 능력이 활화산처럼 버닝하는 순간이었다.
▲ 홍상수 감독 신작 '풀잎들'·'강변호텔'에 해외 들썩, 국내 싸늘…두문불출 행보 계속
홍상수 감독은 김민희와 다섯번째로 호흡을 맞춘 영화 '풀잎들'로 제67회 베를린국제영화제를 찾았고, 김민희와 여섯번째 작업한 '강변호텔'로 제71회 로카르노국제영화제와 제56회 히혼국제영화제에 진출했다.
작품을 향한 해외 평단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크리스토프 테레히테 베를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은 "홍상수 감독의 전작들이 그러하듯, 단 한 음절도 바꾸고 싶지 않은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처럼 그 자체로 완벽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우리는 그 안에 담긴 유머와 신랄함, 신중한 아름다움, 관대함, 인간미를 사랑한다"며 '풀잎들'을 극찬했다.
'강변호텔'은 기주봉에게 로카르노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안겼다. 또한 홍상수 감독은 '강변호텔'로 제56회 히혼국제영화제 최우수작품상, 최우수각본상, 남우주연상 등 3관왕을 차지하며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여전히 작품에 대한 관심보다 홍상수 감독의 사생활을 향한 공분이 주를 이루는 모양새다. '풀잎들' 언론시사회 후 이어진 호평에도 관객들은 좀처럼 반응하지 않았고, 도덕성 등을 이유로 홍상수 감독의 작품을 전면 보이콧했다. 그 결과 '풀잎들'은 누적관객수 7000명이 조금 넘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게 됐다.
이같은 반응을 예상했는지 홍상수 감독은 김민희와의 불륜 스캔들 이후 해외영화제에는 모습을 드러내지만 국내에선 두문불출한 채 소통을 거부하고 있다. 이번 '풀잎들' 역시 언론시사회 후 기자들을 대상으로 진행되는 기자간담회는 생략됐다.
국내에서 외면받지만 해외에서 환영받는 홍상수 감독의 향후 행보도 이미 가닥이 잡힌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홍상수 감독은 자신을 사랑하는 마니아들과 세계의 기대에 부응해 작업을 이어갈 것이다. 그리고 2019년 개봉하는 '강변호텔'의 흥행 전망도 밝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2015) 작업을 하며 연인으로 발전한 홍상수 감독과 김민희는 지난해 3월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 언론시사회에서 불륜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뒤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한때 결별설에 휩싸이기도 했으나 두 사람은 로카르노국제영화제에서 여전한 애정을 과시하며 소문을 일축했다.
▲ 김기덕 감독, 각종 추문 정면 돌파 후 선택한 답은 해외시장
김기덕 감독 역시 홍상수 감독과 마찬가지로 제67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청되며 건재한 입지를 과시했다. 올해 폭행 사건과 성폭행 의혹으로 물의를 빚지 않았다면 뜨거운 축포를 받았을 일이다.
전 세계의 시선을 집중시킨 김기덕 감독의 신작 '인간, 공간, 시간, 그리고 인간'은 퇴역한 군함을 타고 여행을 하던 사람들이 미지의 공간에 다다르자 생존을 위해 여러 가지 비극적인 사건들을 일으키는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는 탐욕과 이기심만이 남은 공간에서 각 인물들이 보여주는 삶과 죽음에 대처하는 방식을 통해 먹고 먹히는 '인류의 삶' 역시 거대한 '자연의 역사'의 일부라는 이야기를 전한다.
후지이 미나, 장근석, 안성기, 이성재, 류승범, 성기윤, 오다기리 죠 등 이름만으로 굵직한 배우들이 총출동해 작품을 빛냈다. 베를린에서는 "초현실적이고 무자비한 반전은 현상에 대한 도발적인 묘사를 넘어선 디스토피아를 구축하며, 이 작품은 우리 스스로의 책임감을 믿도록 부추기는 정직한 자극"이라는 호평도 나왔다.
하지만 역시 김기덕 감독을 둘러싼 개인적인 사건이 문제가 됐고,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도 이와 관련한 기자회견이 개최되기도 했다.
김기덕 감독은 2013년 개봉한 영화 '뫼비우스' 촬영 중 여배우의 뺨을 때리고 대본에 없는 베드신 촬영을 강요한 혐의로 고소당한 바 있다. 법원은 폭행 혐의만 인정해 벌금 500만 원의 약식명령을 내렸다.
베를린국제영화제 기자회견에 참석한 김기덕 감독은 "영화가 폭력적이라도 내 삶은 그렇지 않다. 영화와 비교해 내 인격을 생각하지 말아달라"며 "많은 스태프들이 보는 가운데 리허설을 진행했고 그 과정에서 (여배우 폭행 사건이) 발생했다. 감독과 배우의 연기 해석이 달라 일어난 일이다. 법원 판결이 억울하지만 승복한다. 많이 반성했고, 시스템과 연출 태도도 바꿨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영화를 만들 때 안전과 존중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김기덕 감독. 그는 "그런 태도로 영화를 만들어 왔는데 4년 전 일이 이렇게 고소 사건으로 이어진 것은 나로서도 유감스럽다"며 "이번 일이 영화계 전반과 연계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개인적 사건으로 이해하고 반성하고 싶다"고 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김기덕 감독과 그의 페르소나로 불리는 조재현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여배우들의 증언이 보도되며 그는 또다시 논란에 휩싸였다. 이에 김기덕 감독은 "익명을 이용한 여론 재판이 아니라 정식 사법절차를 통해 사실 관계가 명백하게 밝혀지길 바란다"며 "수사·재판 없이 강간범으로 낙인찍혔다. 개봉 예정 영화는 취소됐다. 밖에 나갈 수 없고 밥 한 끼도 사 먹을 수 없게 됐다. 이혼 위기에까지 처하게 됐다"고 호소한 상황이다.
김기덕 감독이 성폭력 피해를 주장하는 여배우들과 진실 공방을 어떻게 마무리할지 주목되는 상황 속 그의 선택은 해외시장이었다. 현재 김기덕 감독은 카자흐스탄에서 심리를 다룬 영화 '딘'을 기획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러시아 영화공급업체와 계약을 체결해 영화는 러시아어로 제작될 예정으로 알려졌다. 영화는 러시아를 비롯한 구소련권에 공급된다.
[정정보도문]영화감독 김기덕 미투 사건 관련 보도를 바로 잡습니다
본지는 2018.6.3.'김기덕 감독, 여배우 A씨·PD수첩 무고와 명예훼손으로 고소'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한 것을 비롯하여, 약 4회에 걸쳐 영화 '뫼비우스'에 출연하였으나 중도에 하차한 여배우가 김기덕감독으로부터 베드신 촬영을 강요당하였다는 내용으로 김기덕을 형사 고소하였다고 보도하고, 위 여배우가 김기덕으로부터 강간 피해를 입었다는 취지로 보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확인 결과, 뫼비우스 영화에 출연하였다가 중도에 하차한 여배우는 '김기덕이 시나리오와 관계없이 배우 조재현의 신체 일부를 잡도록 강요' 하고 '뺨을 3회 때렸다'는 등의 이유로 김기덕을 형사 고소하였을 뿐, 베드신 촬영을 강요하였다는 이유로 고소한 사실이 없습니다. 그리고 위 배우는 김기덕으로부터 강간 피해를 입은 사실이 없고, 김기덕으로부터 강간 피해를 입었다고 증언한 피해자는 제3자이므로 이를 바로잡습니다.
[미디어펜=이동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