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동건 기자] "캐릭터에서 빠져나오는 데 굉장히 오래 걸렸습니다. 장첸은 빨리 돌아왔는데… 정환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고, 잠깐이지만 4개월간 간접 경험을 하다 보니 그 여운이 많이 남더라고요. 그래서 오래 쉬었습니다."
2017년을 장첸 신드롬으로 물들인 '범죄도시'의 강렬했던 얼굴보다 훨씬 빠져나오기 힘들었다. 윤계상은 1940년대의 씁쓸한 공기와 정환의 올곧은 신념에 젖어 아직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말모이'(감독 엄유나)는 우리말 사용이 금지된 1940년대, 까막눈 판수(유해진)가 조선어학회 대표 정환(윤계상)을 만나 사전을 만들기 위해 비밀리에 전국의 우리말을 모으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
'범죄도시' 이후 윤계상의 첫 작품으로 큰 관심을 받고 있다. '범죄도시'가 소위 대박을 터뜨린 뒤 제안받는 배역이 다양해졌다는 윤계상은 오롯이 이야기에 집중해 이번 작품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배역은 항상 너무 어렵기 때문에 영화가 가진 이야기를 봐요. 제가 재밌어야 하고, 그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작품을) 너무 하고 싶었는데, 돌이켜보니 '범죄도시' 후 많은 시간이 흘렀더라고요."
'말모이'를 통해 처음 메가폰을 잡은 엄유나 감독에 대한 불안감은 없었을까. '택시운전사'의 각본을 쓴 엄유나 감독은 첫 연출작임에도 소신이 뚜렷했고, 큰 그림을 보고 있었다는 게 윤계상의 설명이다.
"엄유나 감독님과 10분만 이야기를 나눠보면 불안감이 확 사라져요. '이게 어떤 이야기냐'고 물어보면 정말 상세히 말씀해주시거든요. 공부를 정말 많이 하신 분의 느낌이었어요. 그런 생각을 담고 있으면 무조건 잘하시겠죠. 그래서 걱정은 없었어요."
영화 '말모이'의 주연 윤계상이 미디어펜과 만났다.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하지만 연기 걱정은 커져만 갔다. 장첸이 카리스마를 있는 대로 발산하는 인물인 데 반해 정환은 자신의 사연을 감춰야 하는 캐릭터였기 때문. 수심을 모르는 바다가 더욱 깊고 방대해 보이듯 아픔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정환의 얼굴은 실로 애처로웠다.
"'범죄도시' 때는 마동석, 진선규 등 도와주는 분들이 많았어요. 저 혼자 그 캐릭터를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요. 너무 절실하기 때문에 매 작품이 어렵고요. 이번 작품은 촬영을 하면서 고통이 더욱 커졌어요.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땐 막연히 잘할 줄 알았어요. 이전의 순한 캐릭터들과 비슷하게 생각했고, 제가 잘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하고 덤벼들었거든요. 그런데 그 깊이가 너무 깊으니까 죽을 것 같더라고요. "
연기를 하던 중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울음이 터진 적도 적지 않다고. 급기야 우리말 사전 원고를 뺏기는 장면에서는 오열을 했다. 물론 그런 모습은 영화에 담기지 않았다. 다 보여주면 도리어 감정선을 해칠 거라는 엄유나 감독의 뜻이었다.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모인 공간이 정환에겐 중요한 공간이었잖아요. 저도 처음 세트장을 봤을 때 책이 차곡히 쌓여있는 모습이 놀랍더라고요. '그래, 이런 걸 준비했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모든 걸 뺏겼다고 생각하니 모든 게 무너졌어요. 그래서 첫 테이크에서 너무 많이 오열을 했어요. 컷이 됐는데 안 멈추는 정도까지 갔죠. 그런데 표현하면 너무 가겠구나 싶더라고요. 감정을 모두 빼면서 오히려 정환의 모습이 잡히기 시작한 것 같아요."
각기 감정선을 지키기 위해 극 중 관계를 카메라 밖에서도 유지했다는 조선어학회 배우들. 촬영지의 전통 맛집을 찾으러 다닐 때면 '류 대표는 뭐 먹고 싶어?' 하고 분위기를 조성해줬다. 늘 화기애애하고 정다운 현장… '소수의견' 이후 두번째로 호흡한 유해진과는 어땠을까.
"(유)해진이 형은 굉장히 예민해요. 절대 판수 같은 사람이 아니거든요. 현미경으로 보는 것처럼 정말 섬세하죠. 캐릭터의 디테일을 하나하나 다 만드시더라고요. 존경스러워요. 모든 걸 통찰력과 매의 눈으로 보는 모습이 너무 부러워요. 집요해서 끝까지 포기를 안 하고, 대충 넘어가는 게 하나도 없어요. 저도 예민한 배우라고 생각하고 해진 형을 추구하는 눈으로 보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영화 '말모이'의 주연 윤계상이 미디어펜과 만났다.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이날 윤계상에게 god 멤버들과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2018년 가장 잘한 일을 뽑으라면 망설임 없이 JTBC '같이 걸을까' 출연을 꼽겠다는 윤계상. god 멤버들과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소중한 것들을 찾았고, 유연해지는 방법을 터득했다고 한다.
"지금도 god 멤버들과는 싸워요. 근데 싸운다는 게 대립하는 게 아니라 서로를 너무 좋아해서 그런 거거든요. '이게 좋은데', '이것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하는 부모님의 마음 때문에요. 그걸 찾게 돼서 너무 감사해요. 사실 각자 떨어져 있는 기간이 길다 보니 서로의 배려심으로 관계를 유지했는데, 그걸 내려놓고 본성이 나오니까 더 싸우게 되는 거죠. 그런데 진심은 너무 사랑하고 있는 거예요. 식구 같은 느낌? god 멤버들은 안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말모이' 개봉과 god 20주년 기념 스페셜 앨범 'THEN&NOW' 발매가 맞물려 당분간 바쁘겠지만, 윤계상은 그저 지금이 행복하다. 그는 "체력이 문제가 아니다. 너무 좋아서 활동을 하게 된다. 친한 친구들과의 모임이 기다려지는 느낌이다"라며 god 멤버들, 팬들과의 만남에 설렘을 드러냈다.
"연기는 집요하게 해도 너무 어렵고, 결과를 전혀 예상하지 못해요. 끝이 없어요. 그런데 god 활동은 조금 다른 맥락인 것 같아요. 이미 god는 완성됐어요. 저희가 만든 게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렇게 사랑받고 있는 거겠죠. 안무 틀려서 팬들에게 죄송하다고 하는 가수가 어디 있어요.(웃음) 저희는 너무 많이 틀리고, 까먹고… 그런데도 사랑해주시는 게 너무 감사해요."
그간 작품 활동에 대한 수많은 고민과 우울한 마음으로 굳어있던 표정이 활기를 되찾은 모습이었다. 스스로를 "옆에 있기만 해도 질리는 에너지를 풍겼다"고 표현한 윤계상은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해서도 깊은 애착을 드러냈다.
"원래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데 제가 '같이 걸을까'를 하며 느낀 건 인생이 끝나는 지점까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 순간순간을 즐기고, 행복해야 하고, 이 모든 걸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거예요. 근데 영화도 비슷한 것 같아요. 못한다고 자학하고, 지하 100층까지 뚫어도… 결국 같이 걸어가는 일 중의 하나이지 않나. 그래서 포기가 안 돼요. 제 필모그래피에서도 하나도 소중하지 않은 작품이 없거든요. 진열장이 있다면 하나하나 소중히 담아두고 싶어요."
영화 '말모이'의 주연 윤계상이 미디어펜과 만났다.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미디어펜=이동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