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새 선장에 김무성의원이 당선됐다. 김무성의원은 14일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열린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신임 당대표에 선출됐다.
김무성 대표는 박근혜대통령의 국정성공과 세월호 참사이후 드러난 적폐를 해소하기위한 국가혁신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다짐했다. 김대표는 이어 7.30재보선 승리를 위해 대표실을 비우고 선거현장으로 달려가 과반수의석 지키기에 전력투구하겠다고 했다. 민생안정을 위해 야당과 협조해 민생법안을 조속히 통과시키겠다는 방침도 내놓았다.
당내 통합방안도 밝혔다. 치열하게 1, 2위를 다툰 정치선배 서청원의원을 깎듯이 모시고 힘을 모아 당의 통합과 화합, 혁신작업에 나서기로 했다. 새누리당을 젊은 정당, 민심에 순응하는 정당으로 환골탈태하기위한 혁신을 적극 추진키로 했다.
▲ 김무성 의원이 14일 열린 새누리당 전당 대회에서 신임 당대표에 선출됐다. 김무성 의원은 새누리당을 젊은 정당, 민심에 순응하는 정당으로 환골탈태하기위한 혁신을 적극 추진키로 했다. |
김무성대표는 누구인가? 김의원은 전방 창업주인 김용주회장의 아들로 태어나 기업가를 꿈꾸다가 전두환군사정권의 광주학살에 의분을 느껴 정계에 진출했다. 정치입문 후 김영삼계의 상도동계에서 줄곧 활동했으며, 현재 5선의 중진의원이다. 그는 평생 반독재 투쟁에 맞서 민주주의 실현에 분투했다.
정치인으로서 이슈가 있을 때마다 대화와 소통으로 해법을 찾으려 한 점도 돋보인다. 대화와 소통, 화합은 그의 트레이드가 됐다. 그는 '나보다는 당이 우선'이라는 신념으로 선당후사정신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18대 총선 당시 당내 대선경쟁에서 패배한 박근혜에 대한 이명박대통령계의 공천학살이 자행되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당으로 복귀한 후 철새정치인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19대 총선에서도 친박계의 견제로 공천을 받지 못했지만, 2012년 12월 치러진 대선에서 새누리당 중앙선대위 총괄선대본부장을 맡아 박근혜대통령의 당선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당시 그는 하루 4시간만 자면서 전국을 누비며 박대통령의 승리에 매진했다. 하지만 이후 논공행상에서 초연했다. 그는 "이제 제 역할은 끝났습니다."라는 메모만을 선대위 자신의 출입문에 남기고 표표히 떠났다.
"하늘은 버리는 자에게 더 크게 돌려준다고 했던가." 그는 2013년 치러진 4.24 재보선에서 부산 영도서 당선돼 국회에 다시 진입했다. 모든 것을 비우고 백의종군했던 김무성대표는 원내에 재진입하면서 여권대 유력주자로 부상했다.
김무성 대표는 이제 여권의 유력한 대권주자 반열에 올랐다. 경선기간 보여준 국가지도자로서의 미래 비전과 청사진, 화합과 통합을 위한 리더십이 당원과 국민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동안의 중간계파 보스정도의 무게감이 이제는 차기 보수우파진영의 강력한 대권후보로 부상한 것이다. 그동안 시대정신을 찾고, 국민과 국가를 운영하기위한 치국방략과 경제지략에 대해 상당한 내공을 쌓아온 것이다.
이런 점에서는 그는 '저평가 우량주' 내지 '저평가 블루칩'이었다. 이제는 당당한 '대권주'로 올라선 것이다.여권의 차기주자 풀이 한층 넓어진 셈이다. 정몽준 전 의원, 김문수 전 경기지사, 오세훈 전 서울시장과 당당한 차기대권 경쟁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김무성은 누구이고, 어떤 정치역정과 철학,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는 지를 정리한 것이다.
■ 바다를 보며 꿈을 키우다
김무성을 만나면 두 번 놀라게 된다. 당당한 풍채에서 풍기는 중량감이 첫 번째이고, 안경너머로 보이는 순진무구한 미소와 투박한 말투가 그 두 번째이다. 순수하면서도 소박한 인간미를 갖췄다는 평가다. 언제 만나도 큰형, 큰 오빠같은 정겨운 사람이다.
김무성(金武星)은 본관이 김해(金海)로 1951년 9월 20일 부산에서 해촌(海村) 김용주선생의 4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수평선이 바라보이는 부산 앞바다는 놀이터이자 큰 꿈을 품게 한 무대였다. 부산화랑초등학교에 이어 진학한 경남중학교는 김영삼 전 대통령(YS)이 다닌 지역 명문. 김무성이 향후 정치인생을 걷게 만든 인연이 된다. 서울로 옮긴 김무성은 중동고등학교와 한양대학교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이후 부경대 명예정치학 박사를 받았다.
김무성의 인생 첫걸음은 기업이었다. 1976년(26세) 동해제강 상무, 1982년(32세) 삼동산업 대표이사를 역임하면서 포항에서 성공한 `젊은 리더‘로 이름을 알렸다. 그러다가 5공 정권의 압제가 극에 달하던 시절, 정치에 입문한다.
김무성은 어린 시절부터 리더십이 돋보였다. 친구들은 코흘리개 시절부터 늘 골목대장 노릇을 했던 김무성을 무대(‘무성대장’의 약칭)라고 불렀다. 그 별명은 정계 입문 30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김무성 새누리당 당대표
■ 필생의 화두 – 민주
김무성의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는 ‘민주’다. 중동고 재학시절인 1969년, 3선 개헌을 반대하고자 서울시내 12개 고교 대표들과 함께 연합시위를 주도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그 때 이미 싹이 텄던 셈이다.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김무성의 `열혈남아 기질‘은 그를 또 다른 도전으로 이끌었다. 암울했던 전두환 정권 시절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하자 목숨을 걸어야할 만큼 힘들고 고통스러우며 가시밭길인 ’민주화 투쟁‘ 참여를 결정한 것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하자, 김무성은 창립 멤버로 참여하며 정치 인생을 시작했다. 2005년(55세) 민주화추진협의회 회장에 선임되었고, 후일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으로 추대되었다. 결국 ‘민주’가 그를 정치로 이끈 셈이다.
김무성은 의정 생활에서도 늘 의회민주주의와 정당민주주의를 필생의 과업으로 삼고 있다. 더디고 힘들지만 민주적 절차와 과정이야말로 국민의 힘을 집결하고 선진국으로 가는 디딤돌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 정치의 기본 – 대화
정치 현장은 갈등의 연속이다. 가족이나 직장에서 문제 해결을 위한 최선의 방안은 ‘대화’인 것처럼 정치도 대화가 우선돼야 한다. 김무성의 두 번째 키워드는 ‘대화와 화합’이다.
2004년 재경위원장 시절 단 한 차례의 정회와 파행이 없는 정책 국정감사를 실현해 정치권을 놀라게 했다. 여야가 의견이 맞지 않을 때는 서민경제와 민생을 위한 법안을 우선시한다는 원칙을 내세워 풀어 나갔다.
18대국회 원내대표 시절 한-EU FTA가 지지부진할 때다. 그는 여당 야당 정부 등 모든 관계자들을 원내대표 방으로 물러 모았다. 그리고 “문 잠가라. 합의 못하면 아무도 못나간다”는 엄포(?)를 통해 결국 통과시켰다. 이 일화는 지금도 ’김무성의 뚝심과 대화 노력‘을 얘기할 때 반드시 거론된다.
2013년 5.18기념식을 앞두고 정부가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배제하기로 하자, “내 자신도 민주화 투쟁 시절 하루 몇 번씩 불렀다. 어디에도 반국가적, 친북적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왜 중단시켜 국론 분열을 일으키는지 모르겠다.
5.18 유가족과 광주시민들이 원하는 대로 5.18 주제가로 선정해야한다”며 갈등을 막았다. 그해 김대중대통령 노벨평화상기념관 개관식에서 축사를 통해 평소 간직한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진솔하게 설명해 이희호 여사와 참석자들에게 눈물어린 감동을 주었다.
2013년 말 철도노조 파업이 계속됐을 때, 야당과 함께 실마리를 풀어 냄으로써 “정치가 모처럼 제 몫을 한다”는 국민의 찬사를 듣기도 했다.
■ 정치의 자세 – 헌신
정치인들은 `선당후사‘ 즉 ’나보다 당이 우선‘이라는 얘기를 입에 달고 다닌다. 하지만 김무성처럼 이를 온 몸으로 실천한 경우는 거의 없다.
김무성은 2008년 제 18대 총선 당시 소위 ‘공천 학살’의 격랑 속에서도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정치인으로서 위상은 크게 높아졌다. 김무성은 그런데도 온갖 시련을 안겨준 한나라당에 조건없이 복귀하며, 늘 국민들을 실망케 하는 ‘철새 정치인’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신념과 의리의 정치’가 무엇인지 보여줬다. 원내대표 재직 시절이었던 2010년 지방선거 참패로 한나라당에 위기가 닥쳤을 때 비상대책위원장으로서 혼란에 빠진 당을 정상화시켜 2012년 대선 승리의 기반을 다졌다.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는 공천탈락의 수모를 당했다. 하지만 국가와 당을 위해 ‘백의종군’이라는 정의로운 결단을 내려 우파분열을 막고, 새누리당 정권 창출의 씨앗을 뿌리는 계기를 만들었다. 2012년 새누리당으로 당명이 바뀌고 제18대 대통령 선거직전 당이 흔들리자, 박근혜 후보는 새누리당 중앙선대위 총괄선대본부장이라는 중책을 제안했다. 김무성은 박근혜 후보의 대통령 당선에 모든 것을 다 바친다.
‘지리멸렬!’ 당시 새누리당 선거대책본부의 분위기였다.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은 더욱 많았던 선대본부 분위기를 하루 만에 싹 바꿨다. 두 달이라는 선거운동 기간 내내 금주령을 내리고 야전침대에서 하루 4시간만 자면서 분투한 결과 ‘준비된 첫 여성대통령 박근혜 탄생’이라는 위업을 달성하게 된다.
김무성은 `논공행상‘에도 초연했다. 대선 승리가 확정되자마자 ’이제 제 역할은 끝났습니다‘라는 메모만을 출입문에 붙이고, 조용히 떠난 일화는 지금까지도 정계에서 회자된다.
옛 선조들의 지혜 가운데 ‘하늘은 버리는 자에게 더 크게 돌려 준다’는 얘기가 있다. 정계를 떠난 김무성을 국민들은 잊지 않았고, 이는 2013년 치러진 4.24 재보선에서 부산 영도구에 출마해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김무성은 이를 계기로 한국 정치를 이끌어갈 거목중 하나로 우뚝 서게 됐다.
▲김무성 새누리당 당대표
■ 사심없는 화합과 포용의 정치인
김무성의 남다른 면모는 ‘공과 사의 구분’에서도 명쾌하게 드러난다. 5선의 국회의원 동안 후원회 한번 하지 않았고, 국회의원이면 누구나 하는 출판기념회조차 하지 않았다. 2011년 큰 딸 결혼식도 평일 오후로 날짜를 잡아 비공개로 진행, 청와대도 몰랐다. 2013년 사랑하는 어머니 상 때는 보좌진조차 모르게 상을 치르고 나서 1주일 후에 언론에 알려지기도 했다.
김무성은 한마디로 화합과 포용의 정치인이다. 우리 정치와 사회가 갈등에 흔들리거나 해결책을 찾지 못해 답답해할 때, 해결사로 나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정치는 국민 곁에서, 국민과 함께 울고 웃어야한다. 정치는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해 대한민국을 일류 선진국으로 만들고, 국민과 애환을 함께하며 스트레스를 날려줘야 한다. 사심이 없어야 한다. 정치인 가운데 과연 그런 인물은 누구인가.
당과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사심 없이 자기를 희생한 용기 있는 사람! 통큰 정치, 공존의 정치로 당과 나라가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는 인물! ‘격차해소’라는 시대정신을 꿰뚫어 보고 있는 사람! 그가 바로 김무성이다. 따뜻한 마음과 세심한 감각을 지닌 정치인. 그가 본격적으로 ‘무대’에 오르려하고 있다.
◆ 김무성이 걸어온 길
△1951년 부산 출생 △부산 화랑초등학교, △경남중, △서울 중동고 △한양대 경영학과 졸업 △고려대 정책대학원 최고위정책과정 수료 △부경대 명예정치학 박사
△동해제강 전무 △삼동산업 대표 △민주화추진협의회 창립 멤버(1984) △통일민주당 창당발기인·총무국장·기획조정실 부실장·국회행정실장 △민주자유당 의사국장·의원국장 △김영삼 대통령 후보 추대위 총괄국장(1992)
△제14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행정실장 △대통령 민정비서관·사정비서관 △내무부 차관(1994) △제15대 국회의원(부산 남구을, 1996) 원내수석부총무·한나라당 총재비서실장 △제 16대 국회의원(2000) △제17대 국회의원, 국회 재정경제위원장·한나라당 사무총장·최고위원·민주화추진협의회 회장 △제18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원내대표·국회운영위원장·비상대책위원장 △제18대 대선 새누리당 중앙선대위 총괄본부장 △재19대 국회의원(부산 영도, 2013) [미디어펜=이의춘기자jungleele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