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정초 필독서 3종 연속서평-마지막 회]
"기차가 천안에 이르렀을 때다. '비서실장, 저것 봐. 나무가 없잖아. 저기가 어디야?' '천안 어디쯤인 것 같습니다.'… '추기경님, 저 뚝 좀 보십시오. 대한민국이 이래요. 저 플라타너스는 전지하면 안 되는데 가지를 쳐버렸네. 비서실장, 철도청장 불러서 전지를 누가 했는지 알아보라고 해'…"
김수환 추기경이 1970년대 초 열차로 함께 내려가며 지켜본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이다. 그건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에 나오는 얘기인데, 메모지에 4대 강을 그려가며 몇 십 년은 걸릴 개발계획도 그에게도 설명해줬다. 김 추기경은 그런 모습에서 1인 장기독재를 예견했고 그래서 돌아오는 다음날 내내 우울했다지만, 그거야말로 짧은 이해에 불과하다.
서울대 전상인(사회학) 교수의 신간 <공간 디자이너 박정희>(기파랑)를 읽으니 "대한민국 전체가 지붕 없는 박정희기념관"이란 말이 현대사의 과장 없는 진실로 다가온다. 장기 집권욕이라는 추기경의 표현도 심했다. 그건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불퇴전의 집념이 아닐까?
그렇다고 <공간 디자이너 박정희>란 책이 논쟁적인 저술은 아니다. 외려 드라이한 연구서다. 박정희가 재임 중 국토개발의 제도적 장치는 물론 산업단지-교통인프라 건설에서 하늘길(공항) 물길(항만)까지 연 걸출한 설계자라는 걸 차곡차곡 보여준다. 개발연대의 성취를 철두철미 국토-도시-교통에 걸친 공간정책의 측면에서 접근했다.
이 작은 책자가 제기하는 문제는 간단치 않다. 인류사에서 근대화 혁명은 국토-도시-교통을 뜯어 고치는 공간 혁명을 낳았는데, 한국에서 그걸 구현해낸 주인공 박정희의 진면목을 새롭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박정희 연구사의 빈 칸을 채워주는 저술이다. 일단 서울 얘기. 오늘의 서울을 만든 많은 이가 있지만, 박정희는 단연 주도적 인물이다.
"박정희에게 서울은 큰 의미가 있는 도시다. 헬리콥터를 타고 서울 상공을 돌다가 시장실에 무선전화를 걸어 정릉 뒷산에 지어지는 무허가 건물의 철거 지시를 내린 것도 그였고, 자신이 잘 다니는 간선도로변에 건축 중인 건물의 높낮이에도 관심을 가졌다."(142쪽)
저자 전상인이 전한 이 일화가 많은 걸 함축해 보여준다. 70년대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역임한 뒤 훗날 시립대 교수로 은퇴했던 전문가 손정목의 증언도 그러하다. 그의 보석 같은 증언집 <서울도시계획 이야기>(전5권)를 남긴 그에 따르면, 3·4공 당시 박정희가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은 국정은 하나도 없는데, 서울시 행정도 예외가 아니었다.
"서울시내 그 숱한 도로의 신설 확장 또한 모두 그에게 보고된 후에 착수되었으며, 세운상가도 한강 건설도 강남 개발도 그에게 보고됐다. 여의도광장이나 잠실 개발, 도심부 재개발, 소공동 롯데타운 등도 그의 직접 지시에 따라 이뤄졌다. 지하철 종로선도 그의 지시이고, 지하철 2호선은 그의 재가를 받은 후에 노선 자체를 변경했다."
나열하기가 숨 가쁠 정도다. 능동 어린이공원, 과천 서울대공원, 경부고속도로, 과천 신도시 건설, 그린벨트, 행정수도…. 정말 놀랍게도 그 모든 게 "누군가 건의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착상한 것"이란 게 손정목의 말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서울 얘기는 일부다.
개발연대 산업단지 건설과 철도와 도로, 핵심 물류 인프라인 항만 및 항공교통 등 국토개발 전체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 전체를 훑어봐야 총괄계획가 박정희 면모가 보인다. 그는 철도보다 고속도로 건설에 승부를 걸었다. 식민지 유산 철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됐던 도로를 염두에 둔 포석이다. 실제로 해방 직후 이 나라의 도로 포장률은 고작 0.03%에 불과했다.
그런 형편에서 단군 이래 최대 프로젝트인 경부고속도로를 2년 반의 공기(工期)에 마친 것은 박정희라는 집념의 지도자를 빼곤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1950년대 후반 미국의 주와 주 사이 고속도로가 경제 도약과 사회통합에 기여했듯이 우리의 경부고속도로는 그 이상이었다.
1977년 32회 식목일 식수를 하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 /사진=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언주의 박정희 천재론
내년 7월이면 경부고속도로 개통 반세기인데, 우린 박정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를 새삼 묻고 싶다. 이런 '공간 유산'을 너무도 당연시하거나, 박정희를 욕하는 우리가 과연 정상일까? 땅의 길을 연 그는 하늘 길도 함께 열었다. "전용기는 고사하고 국적기를 타고 해외에 나가보는 게 소망"이라는 박정희의 말에 당시 한진상사 조중훈은 수송보국(輸送報國)으로 화답했다.
그래서 적자투성이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해 대한항공을 개척했다. 공항-항만 능력은 무역 강국을 떠받치는 힘인데, 박정희 시절 항만 역시 빅뱅했다. 670만 톤(1957년)에서 8742만 톤(1981년)으로 13배 증가했다. 한 가지, 이 책에서 돋보이는 게 아파트 얘기다.
한국에서 아파트라는 주거문화를 창출해낸 공로는 단연 박정희란 평가 때문이다. 저자의 말대로 박정희는 "한국 역사상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주택정책을 체계적으로 계획하고 실천한 최초의 국가 지도자"(153쪽)인데, 급속한 도시화에 따른 주거난을 아파트 건설로 선제적으로 해결했다. 그 사례가 1962년 착공한 마포아파트다.
당시엔 아파트에 대한 개념도 없고, 인기도 전무했다. 그러나 2년 뒤 그 아파트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는 그걸 "생활혁명의 상징"으로 적극 규정한데 이어 70년대에는 아파트 대중화의 시동을 걸었다. 그 결과 집권 말기에 아파트 비율을 7%로 치솟게 만들었다.
그러더니 2018년 현재 아파트 비율은 60%, 물론 세계 최고의 수준이다. 그래서 물어야 한다. 당시 아파트 발명을 포함한 성공적인 주택정책이 없었더라도 개발연대의 빅뱅이 가능했을까? 정말 현대사의 명백한 진실을 태무심하게 보아 넘겼던 우리가 부끄러운 대목이다. 그리고 당시 왜 국가 차원의 주택문제는 그리 심각하지 않았을까도 되새겨볼 참이다.
우리가 거주하고(아파트), 이동하며(도로-지하철), 제조업에 종사하며(산업단지), 여가 시간에 숨 쉬고 즐기며(국토), 해외로 나가는(공항-항만) 이 모든 게 박정희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그의 사후 40년인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그런 박정희를 '원조 적폐'로 낙인찍는 정치 광풍은 또 뭔가?
이 책을 읽으며 국회의원 이언주의 박정희 천재론이 새삼 떠오른다. 반 박정희 구호를 외치는 '역사 철부지' 운동권이 무엇 하나 역사에 기여한 게 없는 반면 대한민국이 먹고 사는 거의 모든 기틀을 창출해낸 건 순전히 그의 공로라는 대긍정이 박정희 천재론이다. 연구서 <공간 디자이너 박정희>에서 박정희 천재론이 새삼 떠오르니 그게 희한하다. /조우석 언론인
[조우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