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 내에 있는 3.1독립운동기념탑 [사진=미디어펜]
[미디어펜=윤광원 기자] 수원 화성은 정조가 축성하고, 다산 정약용 선생의 현장 지휘로 완공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이 화성이 외세와 맞서 '진면목'을 발휘한 것은 전란 때 적의 공격을 받아서가 아니라, 이 땅을 폭압적으로 지배하고 민중을 수탈한 일제에 맞선 민중들의 '항거'였던 3.1운동 때였다.
화성 한 쪽 구석에는 3.1독립운동기념탑이 우뚝 서 있다. 수원지역에서의 치열했던 3.1운동을 대변하는 기념물이다.
일제 당시 수원시는 물론, 인근 화성시와 오산시는 모두 수원군에 속했다.
수원군과 인근 안성군은 '3.1운동 3대 항쟁지'로 손꼽힌다. 나머지 2곳은 모두 북한(평북 의주, 황해도 수안)이다.
전국 어느 곳이든 3.1운동에 대해 할 말이 많겠지만, 유독 이 3곳이 3대 항쟁지가 된 것은 우리가 아닌 일제 스스로가 그렇게 '객관적'으로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만세운동이 격렬하고 치열했으며, 끈질겼다. '비폭력'을 표방한 운동이었지만, 일부 폭력적인 '결사 항쟁'이기도 했다.
수원의 3.1운동은 서울, 개성 같이 3월 1일 당일 바로 터졌다. 역시 지방으로선 남한에서 유일하다.
화성 내 방화수류정 아래서 수백 명의 학생과 주민들이 만세운동을 벌였다. 화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히는 방화수류정은 이름 그대로 일제의 총칼에 쓰러진 민중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16일 장날에는 화성 성벽이 둘러싸고 있는 팔달산 정상의 서장대와 동문 쪽 연무대에서 수백 명이 만세를 부르며 종로 시가지를 통과했다.
23일엔 정조가 풍년을 염원하며 축조한 인공호수인 서호에서 700여 명이 일본 경찰 및 헌병들과 충돌했고, 25일 장날에도 학생과 노동자들이 시장에서 만세를 불렀다.
29일에는 정조가 화성을 찾았을 때 머물렀던 화성행궁 앞에서 만세소리가 터졌는데, 이 날은 특히 기생들이 '선봉'에 섰다.
수원예기조합 소속 기생 33명이 건강검진을 받으러 가던 중 일제히 봉기한 것.
수원박물관 이동근 학예연구사는 "일제에 의해 훼손된 화성행궁에서 치욕적인 건강검진을 받아야 했던 상황에 대한 저항이었다"면서 "수원 기생들의 '고향 집'과 같던 화성행궁을 무너뜨리고 지은 병원 자혜의원에서 성병 검사를 받아야 했던 그녀들은 매우 큰 수치심을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소식을 들은 상인과 노동자들도 합세, 만세를 부르며 일본인 상점에 돌을 던지고 유리창 등을 파괴했다.
안성의 안성조합 기생들도 31일 만세운동에 나섰다. 앞서 19일에는 경남 진주, 4월 1일엔 해주, 2일은 경남 통영의 기생들도 독립만세를 불렀다.
염태영 수원시장은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전국 최초로 만세운동이 일어난 후, 같은 날 오후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 바로 수원"이라며 "서울이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면, 수원은 '전국 확산의 뇌관'을 터뜨렸다"고 평가했다.
또 "당시 수원은 일제 수탈과 탄압의 '거점 기능'을 했기 때문에, 그 어느 곳보다 '조직적이고 격렬한 투쟁' 양상을 보였다"며, 수원은 '3.1운동의 성지'였다고 말했다.
만세운동은 화성을 중심으로 한 수원면내 외에도 지금의 화성시 동탄면, 성호면(현 오산시), 양감면, 태장면, 안룡면, 의왕면(의왕시), 반월면(안산시), 비봉면, 마도면 등 주변지역에서 '요원의 들불'처럼 타 올랐다.
송산면(화성시) 주민들은 28일 오후 면사무소 뒷산 및 근처에서 1000여 명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 또 놀라 도망치는 일제 순사부장 노구치를 돌과 몽둥이로 '처단'하기도 했다.
수원 화성의 3.1운동 기념탑은 본래 1969년 노구치가 죽은 곳에 처음 세워진 것을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향남면 발안(화성시)에서는 31일 1000여 명의 천도교인, 기독교인, 농민들이 만세운동을 벌였다. 길가의 일본인 가옥에 돌을 던지고, 일본인 소학교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4월 3일에는 우정면과 장안면의 '연합 시위'가 벌어졌다.
2500여 명의 만세 군중들은 장안면사무소와 우정면사무소를 파괴하고, 각종 장부와 서류 등을 불태웠다. 다시 화수경찰관주재소로 진격, 근무하던 순사 가와바다를 처단했다.
이 사건이 수원지역 최대의 만세운동으로 기록됐다.
이에 일제는 더 악랄한 학살과 만행으로 폭력 진압에 나섰다. 우정.장안면과 발안장터 시위의 연계를 '내란 상태'로 판단, 주동자들을 모두 처단키로 했다.
제암리 학살사건으로 순국한 23위의 묘 [사진=수원박물관 이동근 학예연구사 제공]
4월 15일 아리타 중위가 이끄는 일본 정규군 보병들이 화성 제암리에 도착했다.
이들은 천도교도와 기독교도들을 제암리교회에 몰아넣고 불을 질렀다. 그리고 일제히 총격을 가했다. 갇힌 청년과 주민들이 전원 불타 죽고, 총에 맞아 죽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아녀자들도 총을 맞았다. 제암리 마을 대부분도 불타버렸다.
이것이 바로 3.1운동 당시 전국 최대의 학살사건인 '천인공노'할 제암리 학살이다.
당시 희생자 중 23명이 현재 화성시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뒤 묘소에 안장돼 있다. 고주리에서 희생된 김흥열 일가의 묘소는 현장인 고주리에 있다.
올해 2월 27일 일본의 기독교인 17명으로 구성된 '사죄단'이 제암리를 찾았다. 이들은 기념관 입구에서부터 고개를 숙이고, 기념비 앞에서 울먹였다. 그리고 일본인들을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순사 가와바다가 처단됐던 화성시 우정면 화수리에서도 11일 학살사건이 자행됐다. 수십 명이 희생됐고, 부촌이던 이 마을은 40여 가구 중 22가구가 불탔으며 많은 아사자가 생겼다.
화수리에도 3.1독립운동기념비가 남아있다.
이동근 학예사는 "이런 학살사건들은 수원이 다른 지역보다 더 강한 독립 의지를 내보인 '증거'이기도 하다"면서 "강렬한 독립의지는 큰 희생을 낳았지만, 고결한 순국과 독립정신은 우리 삶의 밑거름이 됐다"고 설명했다.
인근 안성과 용인에서도 만세운동이 격렬했다.
1919년 경성지방법원의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판결문에 이런 내용이 있다. "피고들의 '선동'에 응하여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 평안북도 의주군 옥상면,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및 원곡면 등에서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폭동'을 야기함에 이르게 한 사실..."
바로 이 부분이 경기 남부 일대가 3.1운동 3대 항쟁지로 선정된 근거다.
3월 28일 안성 원곡면에서는 고종의 국장을 보러 서울에 갔다가 3.1운동을 목격한 최은식 선생 등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터졌다. 면사무소 앞의 시위는 29일과 30일, 31일에도 이어졌다.
4월 1일이 되자, 1000여 명이 원곡면사무소 앞에 모였다. 민중들은 면장과 면서기 등 공무원들을 끌어내 만세를 부르면서 양성면까지 걷게 했다.
행렬이 성은고개, 지금의 '만세고개'에 이르렀다. 고개이름이 아예 만세고개로 바뀌었다.
주도자 중 한명인 이유석 선생이 양성경찰관주재소로 가서 순사들을 끌어내 만세를 부르게하고, 주재소를 불태우자고 제안했다. 그는 "조선이 독립하면 주재소, 우편소는 필요 없으니부숩시다. 일본 관헌이 만든 서류는 불태우고, 일본인들을 동네에서 추방합시다"라고 주장했다.
당시 양성면에서 만세를 부르고 있던 군중들이 합세, 20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주재소와 양성면사무소, 우편소 등을 불태웠고 일본인 잡화점과 고리대금업 가게도 습격했다.
2일에는 원곡면사무소를 부쉈다. 안성군에 있던 일본인들은 모두 평택 등 인근 지역으로 도피했다.
이렇게 4월 1일과 2일 이틀 간 안성은 일본인들이 모두 쫓겨난 '해방구'가 됐다.
그러면서도 시위 군중들은 비폭력을 표방한 3.1운동 정신을 지키려 노력했다. 실력 항쟁을 벌이면서도 일본 민간인을 1명도 해치지 않았다. '인명피해'를 내지 않으면서 통치에 저항한 것.
그러나 일제의 보복도 그만큼 '잔학무도'했다.
안성에서만 20명이 순국했고 부상 후 숨진 분도 4명이었다. 일제는 처음 이 사건에 '내란죄'를 적용했으나, 나중에 보안법 위반 및 소요죄로 바뀌었다.
안성시 원곡면 칠곡리에 3.1운동 기념탑이 있고, 만세고개 꼭대기에도 기념비와 기념관이 있다.
[미디어펜=윤광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