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동건 기자] '내부자들'부터 '남한산성', '국가부도의 날', '마약왕'까지 한국영화 풍년을 이끈 일등공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손이 필요한 곳은 어디든 찾아 함께했고, 소처럼 묵묵히 열일하며 동료들과 수확의 기쁨을 나눴다. 배우 조우진의 이야기다.
"그동안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쉴 틈 없이 치열했죠. 너무나 운이 좋게도 좋은 작품에서 다양한 옷을 입혀주셨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지칠 때도 있었지만 작품 하나가 없어서, 인물 하나가 없어서, 대사 한 줄이 없어서 속상해하던 과거의 저를 떠올리면 버틸 수 있더라고요."
최근 서울 종로구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조우진은 16년의 긴 무명 생활을 청산하고 맞은 전성기에 겸허한 소회를 털어놓았다. '내부자들'(2015)의 조 상무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뒤 그에게는 무수한 러브콜이 쏟아졌고,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가리지 않고 쉼없이 달려왔다. 이번에는 '돈'으로 관객들과 만난다.
'돈'의 배우 조우진이 미디어펜과 만났다. /사진=(주)쇼박스
박누리 감독이 연출한 '돈'은 부자가 되고 싶었던 신입 주식 브로커 일현(류준열)이 베일에 싸인 작전 설계자 번호표(유지태)를 만나게 된 후 엄청난 거액을 건 작전에 휘말리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 조우진은 불법 작전의 냄새를 맡고 일현과 번호표의 뒤를 집요하게 쫓는 금융감독원 자본시장 조사국 수석검사역 한지철로 분한다.
"'돈'이라는 제목이 주는 호기심이 엄청났어요. '보안관'을 함께했던 제작진에 대한 신뢰도 있었고. 워낙 작품의 정서를 묵직하고 힘 있게 담아내는 제작진이라서… 그래서 시나리오를 빨리 보고 싶다고 졸랐는데, 역시 시나리오가 힘이 있더라고요. 제일 흥미로운 지점은 돈을 향한 인물들의 시각과 태도가 모두 다르다는 거에요. 그것들이 모두 엉키면서 생기는 화학 작용, 장르적 쾌감 같은 게 있더라고요."
돈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의 메시지가 좋았다는 조우진이다. 또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여과 없이 표현하는 한지철에게 매력을 느꼈고, 사건의 한 축을 담당하는 캐릭터에도 도전의식이 생겼다고.
"다양한 옷을 입고 싶어하는 제 직업의 본능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런 데서 보람을 느끼고 성취감도 느껴요. 물론 그만큼의 부담도 있어요. 이번엔 어떻게 달리 할까. 또 다른 인물로서 내가 가진 훅이 있을까… 기대치를 충족시켜드리는 게 저희가 하는 일이잖아요. 작품을 거듭할수록 인물을 만날수록 생각도 많아지는데, 주어진 것에 맞게 하나씩 파고들어서 인물을 구축하는 것만이 제가 살 길이라고 생각해요. 그것에 도전하는 게 제 숙명인 것 같고요."
'국가부도의 날'의 재정국 차관으로 서늘한 눈빛을 뽐냈던 조우진은 이번 작품에서도 금융업 종사자로 열연했다. 전작과 비슷한 직업의 인물을 연기하는 상황에서 관객들이 느낄 기시감이 불안했을 만 한데, 그건 자신이 극복할 일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조우진이 작품을 선택할 때 가장 염두에 두는 부분은 뭘까.
"많은 선배님들께서 이야기하셨고 혹자들에게는 천편일률적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시나리오요. 또 제 마음이 동하는가, 인물에게 감정 이입을 할 수 있는가, 인물을 연기할 때 납득해서 대사를 내뱉을 수 있는가, 이 사람의 삶을 내가 살아낼 수 있는가… 그런 부분을 생각해요. 하지만 이런 것들이 딱 맞아떨어져야 하는 것도 아니고, 맞아떨어져도 못하는 작품들이 있거든요. 결국 작품은 선택되어지는 것 같아요."
'돈'의 배우 조우진이 미디어펜과 만났다. /사진=(주)쇼박스
멋진 추억을 쌓았던 '보안관' 제작진과 다시 한 번 의기투합하게 된 '돈' 현장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조우진은 "하루도 빠짐없이 행복했다"는 말로 '돈' 제작진을 향해 진심 어린 감사를 전했다.
"배우가 해야 하는, 배우가 할 수 있는, 배우가 책임져야 하는, 배우만이 할 수 있는 것만 할 수 있게 해주셨어요.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이것만 해', '당신은 배우야' 하고 다른 걱정거리를 하나도 안겨주지 않으셨죠. 워낙 파이팅 넘치는 제작진이기도 하고, 먹는 것부터 자는 것까지 모두 하나도 불편함 없는 현장을 만들어주셨어요. 시간 단위로 배우들의 컨디션을 체크하고 작업을 할 수 있게끔 해주셨으니까. 참 고맙다는 말이 절로 나오더라고요. 닭살 돋지만 진심이니까 꼭 전달하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조우진에게 돈에 대한 가치관도 물었다. 지난해 10월 11년간 자신의 곁을 지켜준 연인과 백년가약을 맺으며 한 가정의 가장이 된 조우진. 올바른 소비 관념에 대해 이야기한 그는 "우리 우진이가 달라졌어요"라며 결혼 후 변화한 자신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가장이 되고 나서 돈은 잘 쓰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특히 나눔의 가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나눔은 더 열심히, 돈을 더 잘 벌고 싶은 욕구도 불러일으키게 하는 가치 같아요. 나누니 전에 없던 행복감이 들고, 더 잘 쓰기 위해 더 잘 벌고 싶어요. 그런 부분이 가장이 되고 나서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철이 좀 덜 들긴 했지만… 형, 선배, 가장이라는 호칭을 듣는 사람의 책무이지 않을까요."
[미디어펜=이동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