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태우 기자] 현대자동차그룹의 핵심 계열사 현대자동차와 현대모비스가 엘리엇의 공격으로부터 성공적인 방어전을 펼쳤다.
이에 정의선 수석부회장이 이끄는 현대차그룹의 미래에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전망이다. 다만 글로벌 시장 위기와 더불어 아직 완료되지 않은 지배구조개편과 관련해 어떤 결단력과 리더십을 보여줄지가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 /사진=현대차그룹
22일 현대차와 현대모비스는 각각 서울 양재동 본사와 역삼동 현대해상화재보험 대강당에서 정기주주총회를 열고 기말배당과 사외이사 선임, 사내이사 선임 등 주요 안건을 모두 원안대로 승인했다.
양사 모두 기말배당과 사외이사 선임 건은 엘리엇의 주주제안으로 표결에 들어갔으나 모두 회사측이 압승을 거뒀다.
배당액과 관련해 현대차 측의 제시한 보통주 주당 3000원과 엘리엇이 주주제안으로 요구한 주당 2만1967원을 놓고 표결을 진행한 결과 현대차 측의 의안에 주식 총수의 86.0%, 의결권 있는 주식 총수의 69.5%가 찬성해 회사측 제시안대로 가결됐다.
엘리엇측이 제안에 찬성한 주주는 주식 총수의 13.6%, 의결권 있는 주식 총수의 11.0%가 찬성하는 데 그쳤다.
엘리엇이 배당을 요구한 금액은 우선주까지 총 5조8000억원에 달해 이를 집행할 경우 현대차는 미래 투자 여력을 상실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어왔다. 해외 투기자본 특유의 '먹튀' 시도라는 비난도 있었다.
사외이사 선임안 역시 회사측이 압승을 거뒀다. 이날 현대차와 엘리엇이 추천한 각각 3명씩의 사외이사를 선임 여부를 놓고 표결을 진행한 결과 사측에서 추천한 윤치원 USB그룹 자산관리부문 부회장, 유진 오 전 캐피탈그룹 인터내셔널 파트너, 이상승 서울대 경제학 교수 등 3명의 선임안이 통과됐다.
사내이사 선임과 관련해서는 별 다른 이견이 없었다. 정의선 수석부회장, 이원희 사장, 알버트 비어만 연구개발본부장 사장이 사내이사로 선임됐다. 정의선 수석부회장은 이날 이어질 이사회에서 대표이사로 선임될 예정이다.
현대모비스도 배당과 관련해 회측의 의안에 의결권 있는 주식 총수의 69%가 찬성해 회사측 제시안대로 가결됐다. 엘리엇측 제안 찬성은 의결권 있는 주식 총수의 11.0%에 그쳐 부결됐다.
엘리엇이 배당을 요구한 금액은 우선주까지 총 2조5000억원에 달해 현대모비스는 "회사의 미래경쟁력 확보를 저해하고 기업가치와 주주가치를 훼손시킬 우려가 높다"며 반대해왔다.
이 밖에 엘리엇은 현대모비스 사외이사 정원을 기존 9인에서 2명 늘린 11명으로 확대하는 안건도 올렸으나, 이 역시 주주들의 찬성(찬성률 21.1%)을 얻지 못하며 부결됐다. 이에 따라 총 이사진은 사내이사 4명, 사외이사 5명인 9인 체제를 유지하게 됐다.
이어진 사외이사 선임안도 현대모비스의 승리였다. 이날 사측에서 추천한 전문 엔지니어 경영자 출신 칼 토마스 노이먼 박사, 미국 투자업계 전문가 브라이언 존스 등 2명이 모두 70% 이상의 찬성률을 기록해 사외이사로 선임됐다.
반면, 엘리엇이 추천한 로버트 앨런 크루즈 카르마 오토모티브 최고기술경영자, 루돌프 윌리엄 폰 마이스터 전 ZF 아시아퍼시픽 회장은 모두 찬성률이 21% 이하에 그쳐 전원 탈락했다.
사내이사 선임과 관련해선 별 다른 이견이 없었다. 현대모비스는 정몽구 회장을 사내이사로 재선임하고 박정국 사장과 배형근 부사장(CFO)을 사내이사로 신규 선임하는 안건을 가결했다.
엘리엇은 이날 현대차와 현대모비스 주총에 각각 대리인을 보내 "오늘은 대결의 자리가 아니라 기업 경영구조와 자본관리에 대해 새 기준을 논의하는 자리"라며 다소 자신 없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신뢰 잃은 엘리엇, 현대차그룹 지배구조 개편 과정서 영향력 약화
현대차와 현대모비스 주총이 모두 사측이 제시한 원안 가결로 마무리되면서 현대차그룹은 앞으로 진행할 지배구조 개편 과정에서 가장 큰 위협 요인을 해소하게 됐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3월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의 분할합병을 골자로 하는 지배구조 개편안을 내놓았었다. 하지만 엘리엇이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안이 미흡하고 주주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제동을 걸고 나섰고, 주주들의 의결권 행사에 영향을 미치는 의결권 자문회사들까지 잇달아 현대모비스의 분할합병에 반대하면서 난관에 부딪혔다.
결국 지난해 5월 21일 정의선 수석부회장이 직접 나서 시장과의 소통 부족을 인정하고 여러 의견들을 전향적으로 수렴해 새로운 개편안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기존 지배구조 개편안을 포기한 것이다.
올해 추진될 새로운 지배구조 개편 과정에서도 엘리엇의 존재는 현대차그룹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이번 주총에서 주주들이 엘리엇의 손을 들어줘 엘리엇 추천 사외이사가 이사회에 진입했다면 새 개편안 추진 과정에서도 엘리엇의 목소리가 커질 우려가 있었다.
현대차 노조도 이같은 점에 우려를 표한 바 있다. 노조는 지난 12일 보도자료를 통해 "엘리엇이 현대차와 현대모비스에 거액의 '먹튀' 배당을 요구하는 것은 주주 환심을 확보해 현대차그룹 2차 지배구조 개편에서 엘리엇에 유리한 구도를 만들어 재편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사전포석"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주총 이전부터 의결권 자문사들과 국민연금 등이 잇달아 엘리엇의 주주제안에 반대 입장을 표하면서 현대차와 현대모비스의 손을 들어줬고, 그 과정에서 엘리엇이 단기 수익을 노린 전형적인 해외 투기자본의 속성을 보여줬다는 점이 부각되며 그런 우려는 해소됐다.
엘리엇은 주주들에게 신뢰를 잃었고, 그 반작용으로 현대차그룹은 지배구조 개편 과정에서 힘을 얻게 됐다.
정의선 수석부회장이 그룹 내 주요 계열사 대표이사가 되면서 '책임경영' 체제를 완성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룹을 본격 이끌어 나가겠다는 신호탄이란 관측도 나온다.
특히 정의선 수석부회장은 진급이후 지난해 9월부터 현대차그룹을 진두지휘 하면서 여러 혁신 활동을 이끌어냈다. 자율주행 기술과 미래 모빌리티(첨단기술이 융합된 이동수단) 혁신을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미국 모빌리티 서비스 전문 업체 '미고', 동남아시아 최대 차량호출 업체인 '그랩', 미국 자율주행 전문기업 '오로라', 인도 최대 차량공유 업체인 '올라' 등과 전략적 투자 및 동맹을 맺어왔다.
또 현대차그룹이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과 손잡는 등 광폭 행보를 펼치는 것은 소극적이었던 과거와는 180도 다른 움직임이다. 이와 함께 완전 자율 복장 제도를 도입하고 사내 방송에 차세대 수소연료전기자동차(FCEV) 넥쏘를 타고 등장하는 등 보수적인 그룹 문화를 바꾸고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현대차와 현대모비스에 대해 엘리엇이 무리한 요구를 내놓고 결국 무산되는 과정에서 이들 회사에 장기적인 안목으로 투자한 주주들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주게 됐다"면서 "앞으로 구조개편 과정에서 엘리엇이 다른 주장을 내놓더라도 주주의 장기적 이익에 부합하는지 여부에 대한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는 "현대차그룹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며 "제조업체를 넘어 '스마트 모빌리티(이동성) 솔루션' 회사로의 변신을 선언한 정 수석부회장에 힘이 실렸다"고 말했다.
[미디어펜=김태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