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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신(神)이자 문화권력 백낙청의 집안 해부

2019-06-04 10:13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조우석 언론인

지난 글에서 나는 표절 파문의 주인공 신경숙 얘기 끝에 그 사건의 몸통인 창비와 백낙청을 언급했다. 좌파 담론으로 명성을 얻고, 다른 구멍으로 돈을 챙기는 창작과비평사의 이상 구조를 지적한 것이다. 때문에 그건 창비 문학50년의 파산(破産)이자, 백낙청 문학의 허구가 맞다.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은 썩기 마련인데, 사실 창비와 백낙청은 반세기 넘게 비판해선 안될 성역으로 군림해왔다. 계간 <창작과비평>이 창간된 게 1966년인데, 이후 대한민국 지식사회는 창비가 들었던 깃발을 따라 좌향좌를 해왔다. 구체적으로 백낙청 노선은 민족문학론-분단체제론 두 개인데, 둘 모두 현재 심각하게 변질됐다는 걸 우릭 안다.

민족문학론은 좌파민족주의를 이끌어왔고, 분단체제론 역시 반공체제를 허무는 원인제공을 해온 요인이다.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백씨 집안을 들여다보면 당혹스럽기 짝이 없다. 백낙청의 아버지 백붕제와 큰아버지 백인제는  명성높은 변호사-의사 이전에 출판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두 형제는 해방 직후 명동에서 출판사-서점을 함께 운영했다. 특히 우량도서만을 펴낸 건 문화사업에 대한 의지를 반영하는데, 그건 창비 식의 좌파상업주의와 너무 달랐다. 그리고 이걸 주도한 건 큰아버지 백인제의 의지였다. 그는 백외과를 재단법인 백병원으로 한 단계 발전시킨 1947년 그해에 출판사 수선사(首善社)를 명동 한 복판에 차렸다.

백낙청의 큰아버지 백인제(사진 왼쪽)와 큰형 백낙환. 그의 아버지 백붕제의 사진은 구할 길 없다. /사진=조우석 제공


백인제-백붕제는 투철한 반공주의자

자신이 대표로 있으면서 소설가 계용묵에게 편집 책임을 맡겼다. 그리고 출판사 옆에 서점 수선서림까지 차렸다. 서점 운영은 친동생 백붕제에게 전담시켰다. 좌익 서적이 범람하던 당시 양서를 펴내자는 뜻인데, 그걸 지휘한 백붕제도 흥미롭다. 그는 일제시대 사법-행정 양과를 패스했다.

현재 그는<친일파 인명사전>에도 이름에 올라 있지만, 그게 진면목은 아니다. 그렇게 단언하는 근거가 6.25전까지 3년 동안 펴냈던 20권 가까운 문학-교양서 목록이다. 그중 단 한 권도 좌익서적이 없다. 수선사 명의의 첫 책이 직접 구술을 받아 쓴 <서재필 박사 자서전>인데, 당시 "자유주의의 교과서"라고 대대적으로 광고했다.

<유관순전>(전영택), <조선신문학사조사>(백철), <현대영시선>(양주동)도 눈에 띄고, 문학서로는 <만세전>(염상섭),<황토기>(김동리), <굴렁쇠>(윤석중 동요선집) 등을 펴냈다. 물론 이런 책은 백씨 형제의 정치관을 반영한다. 둘은 11살 나이차에도 훌륭한 정치적 동지였다.

결정적으로 형제는 "정치사상적으로 투철한 반공주의자"였다. 그건 창비에서 1999년 펴낸 단행본 <선각자 백인제>에 나오는 표현이다. 인촌 김성수 등과도 친분이 있었고, 중도 성향이 없지 않았으나 정판사 위폐사건을 겪으며 바뀌었다. 당시 남로당 연루자들이 고문을 받았다고 거짓주장할 때 백인제가 "고문은 없었다"고 의사 소견을 밝힌 것이다.

좌익들의 행태를 지켜보며 반공주의자로 거듭난 것이다. 제헌의원을 뽑는 5.10총선 때 출마를 단행했던 것도 그 맥락이다. 소신도 뚜렷했다. "총선거는 남조선 단독선거가 아니고 그야말로 전민족의 총의를 표시한 선거다.…국가의 영구분열이니 (주장)하는 건 통분을 금치 못하거늘…"

그게 백인제의 동아일보 기고문이었다. 물론 낙선했지만, 동생 백붕제를 선거캠프의 사무장으로 썼고, 백낙환(백낙청의 큰형)을 선거운동원으로 쓰면서 백씨 집안은 반공의 구호 아래 뭉쳤다. 두 형제가 6.25 당시 함께 납북이 된 것도 둘의 활동이 북한에 눈엣가시였다는 증거다. 당연한 노릇이지만 납북된 뒤 두 형제는 50년대 큰 고초를 겪었다.

<선각자 백인제>에 따르면, 백인제의 경우 소련적십자병원 외과 의사로 강제동원됐으나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끝내 박헌영이 죽던 55년 무렵 다시 끌려가 재판을 받았다. 정판사 위폐 사건 당시 고문을 부인한 것을 죄목으로 몰았다는 것이다.

백낙청의 큰아버지 백인제는 1948년 5.10총선 때 출마해 동생 백붕제를 선거캠프의 사무장으로 썼고, 백낙환(백낙청의 큰형)을 선거운동원으로 썼다. 서울 명동에서 양서 출판에 힘을 쓰기도 했는데, 조카 대에 내려오면서 모두 뒤집혔다. /사진=조우석 제공


정말 이해 안되는 백낙청의 좌파 변신

의구심은 그 때문이다. 그런 집안에서 원탁회의의 좌장이자 좌파의 대부 백낙청 등장은 정말 돌연변이다. 무엇이 백낙청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지난 회 지적처럼 그가 "가업(家業)인 출판업을 가지고 지난 반세기 엉뚱한 짓을 해온 꼴"은 정말 의문이다. 이후 성장과정도 그렇다. 백낙청이 미 브라운대에 17세 때 조기유학을 떠난 게 55년이다.

놀랍게도 그는 유학 당시 캠퍼스의 보수적 분위기에 쉬 적응할 수 없었다고 훗날 회고했는데, 그런 증언조차 의문투성이이다. 아버지와 큰아버지의 이념 성향을 염두에 두자면, 젊은 시절부터 집안 내력에 반발하고, 좌파에 동정적이었다는 게 납득이 안 간다.

뭔가 알려지지 않은 요인이 따로 있는 건 아닐까? 큰형과 백낙청은 어머니가 다르며, 그게 젊은 백낙청의 응어리로 작용했을 것이란 추정도 있다. 즉 백붕제는 나이 15세에 조혼(早婚)을 했다. 첫 부인과의 사이에서 백낙환을 낳았으나 그녀는 바로 병사했다. 때문에 백낙청은 새로 얻은 여자 최귀란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이다.

혹시 그런 요인이 '현대판 홍길동' 백낙청을 만든 건 아닐까? 그러나 이 추정도 설득력이 큰 건 아닌 게 최귀란은 일본 나라여자고등사범 출신의 신여성이다. 그녀는 백낙청을 포함해 3남3녀 남매를 낳았고, 타계 전인 2000년대 초 사비를 내놓아 백붕제기념출판문화진흥재단을 만들기도 했다.

현재 그 재단 이사장은 백낙청이다. 젊을 적 백낙청이 집안에서 소외됐다는 추정은 현재로선 크게 설득력이 없다. 어쨌거나 백낙청이 선대가 품었던 출판의 꿈을 왜곡시키는 건 분명한데, 확실히 그는 미스터리가 많다. 네티즌들이 백낙청을 "퇴물-꼰데"로 야유하는 것도 그 탓이 아닐까? 그렇다면 문화권력 백낙청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은 이제부터다. /조우석 언론인

[조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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