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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 소설엔 반기업 심리가 왜 그렇게 춤출까?

2019-07-10 10:14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소설가 조정래가 신작 장편 <천년의 질문>(전3권, 해냄)을 펴냈다. 재벌 비자금 사건을 파헤치는 기자를 중심으로 권력-자본-언론이 얽혀 돌아가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고발한 작품이다. 대기업 비자금, 정경유착에서 촛불 집회에 이르는 지난 3~4년 한국사회 현안이 두루 등장한다. 결국 '국가란 무엇인가?'를 묻고 있고, 그래서 제목이 천년의 질문이라고 한다. 보기 드물게 대중적 파급력이 큰 이 작품을 포함해 그의 문학 전반을 점검하는 연속칼럼 '조정래 문학은 건강한가'를 3회 나눠 싣는다. [편집자 주]

[연속칼럼]조정래 문학은 건강한가?-中

조우석 언론인

첫 글에서 단언한대로 조정래(76)의 신작 장편 <천년의 질문>은 소설이 아니다. '문학의 옷'을 걸쳤을 뿐 실제는 삼류 정치평론, 편향된 현대사 강의로 도배된 조정래의 넋두리 혹은 푸념이다. 결정적으로 내용이 문제인데, 집요한 반기업 심리와 좌파 민족주의가 춤춘다.

이번 글에서는 그걸 짚어보겠는데, 다 알다시피 이 소설은 삼성을 모델로 한 성화그룹이 등장하고 그 안의 인물들이 벌이는 비자금 관리에서 정경유착을 고발한다. 그룹 회장의 사위 김태범 전무가 회사 비자금 장부를 들고튀자 창조개발실 한인규 사장이 그를 회유하는 게 줄거리의 한 축이다. 문제는 조정래가 묘사한 국내 재계 1위 기업은 지옥이란 점이다.

일테면 한인규 사장이 김태범에게 겁주면서 그룹 회장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이렇게 말한다. "지금 회장님이 김 전무를 당장 당신 눈앞에 데려오라고 노발대발 야단이 났소. 근데 지금 회장님 앞에 가면 어찌 되겠소. 그 양반 성질에 골프채를 마구 휘둘러대 김 전무 머리 깨지고, 갈비 몇 대 부러지고, 팔다리까지 작살나게 되는 거야 뻔하지 않소."

원 세상! 명색이 상대방이 회사 중역이고 어쨌거나 자기 사위인데, 그런 사람에게 골프채를 휘둘러 머리통 깨는 포악한 그룹 회장? 터무니없는 묘사가 설득력이 떨어지고 기가 차지만, 코너에 몰리던 김태범은 한인규 사장의 약점을 노리고 협박하는 대목 또한 기겁할만한 내용이다.

<천년의 질문>은 조정래가 2010년에 발표했던 장편소설 <허수아비춤>(해냄)과 너무도 흡사하다. 나쁘게 말하면 자기 표절을 한 것이다.


"(한인규 사장)은 첫째 비자금 모으고, 도처에 로비 자금 뿌리고 하면서 떡고물 착실히 챙기셨고, 둘째 그 돈으로 회사 주식 싸게 사들여 몇십 배씩 뻥튀기해댔고, 셋째 사업 평창으로 공장들과 부속 사옥들 계속 지어댈 때 그 정보 때서 땅 투기해 떼돈을 긁어모았고…". 재계 1위인 그룹 콘트롤타워의 핵심 인사들을 비리 종합세트로 묘사한 것이다.

그래서 둘은 무려 회삿돈 2천억 원의 돈을 주고받아 비자금 장부를 내놓는 뒷거래를 시도하는데, 이쯤 되면 재계 1위 기업은 인간이 아닌 짐승들의 놀이터다. 그걸 근거로 해서 조정래는 이 소설의 주제가 “거대자본에 휘둘린 인간 소외를 고발했다”고 떠들어대는 것이다.

그런데 <천년의 질문>은 실은 조정래가 2010년에 발표했던 장편소설 <허수아비춤>(해냄)과 너무도 흡사하다. 나쁘게 말하면 자기 표절을 한 것이다. 그 소설은 이른바 경제민주화를 목표로 썼다고 자기 입으로 밝힌 바 있는데, 실은 그 작품에 담긴 지독한 수준의 반기업정서와 반시장 경제의 논리 역시 여러모로 연구대상이다. <천년의 질문>과 너무도 닮았다.

당시 그 책을 두고 조정래와 출판사는 "자본과 분배의 문제를 파헤친 핵 폭탄급 서사(이야기)"라고 신문광고를 내보냈다. <허수아비춤> 스토리의 중심축은 재계 2위로 설정된 일광그룹인데 작품 도입부를 보면 회장의 친위대 3인방이 재계 1위 태봉그룹의 구조본을 본 따 친위조직을 만든다.

재산의 불법 상속과, 그룹 후계자 승계를 위한 사전 포석의 일환이다. 스토리가 시작하자마자 이들은 천문학적인 1조 원 비자금을 무기로 정·관계 로비를 시작하고, 이때 작가가 의도했던 자본주의 천태만상 고발이 이뤄진다. 이래도 재벌과 대기업을 증오하지 않을 것인가? 그걸 노골적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이후 시민단체 폭로와 법정 공방이라는 일진일퇴에도 불구하고 일광그룹의 음모는 결국 '더러운 승리'를 거두는 것으로 내용이 흘러간다. 즉 자본의 일방적 승리다. 이 소설을 읽은 이라면 기업가는 도둑이고 도태되어야 할 존재라는 부정적 시선의 포로가 되기 마련이다.

작가 의도대로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야유와 조롱이 작품 전면에 넘쳐나는 것도 피할 수 없는데, 사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조정래 식 판박이 묘사로 가득하다. 자본가는 나쁜 사람이란 등식인데, 이를테면 3인방의 한 사람은 "목덜미에 영양과잉의 동물성 기름기가 번들거린다." 

"박재우는 습관처럼 새끼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돈을 말할 때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그리는 것처럼 여자를 말하면서 새끼손가락을 세우는 그 손짓은 천상 건달 같았지 고상해야 할 경제학 박사님의 모습일 수는 없었다. 살만 피둥피둥 찐 그의 얼굴이며 목덜미에 영양 과잉의 동물성 기름기가 번들거리고 있어서 지적인 분위기와는 더 거리가 멀기도 했다."

물어보자. 요즘 대기업의 오너나 임원들이 과연 그런 수준이던가? "살만 피둥피둥 찐" 모습이란 언제쩍 얘기란 말인가? 그런 묘사는 "유전인 듯 돈 욕심이 끝이 없었고, 안하무인이었으며, 적당히 설렁설렁 한 공부 탓인지 지식에 열등감이 적잖은" 걸로 그려지는 회장에게도 적용된다.

조정래의 신작 장편 <천년의 질문>은 집요한 반기업 심리와 좌파 민족주의가 춤춘다.


조정래는 그를 콤플렉스 덩어리에 아홉 마리 용을 새긴 황금 칠 의자에 올라탄, 몰취미한 위인으로 묘사하기에 바쁘다. 유치찬란한 서술에 기가 막힐 따름인데, 그게 조정래의 거의 모든 작품이 그러하다. 당연히 작품 속 일광그룹의 멤버들에게 최소한의 경제윤리나 기업가 정신 등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런 싸구려 고정관념 때문에 작품의 흡인력이 떨어지지만, 젊은 독자층은 이 작품에 열광할 준비를 다 한 상태에서 읽기 때문에 파괴적 영향력을 줄 수밖에 없다. 재계 서열 1~2위 기업이 과연 이 지경일까라는 질문도 하지 않을 수 없다.

차제에 조정래에게 일러줄 게 있다. 한국 최대의 회사인 삼성전자의 매출액은 필리핀의 국내총생산(GDP)을 상회한다. 그런 글로벌 기업이 돌아가는 메카니즘과 환경을 조금 공부한 뒤에 소설을 쓰는 게 올바른 직업윤리가 아닐까? 그리고 당신의 거의 모든 작품이란 19세기 감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당신의 덜떨어진 안목과 낡은 세계를 보여주는 건 아닐까?

낡기 것만이 아니라 결정적으로 반기업 심리로 왜곡됐다. 작가의 머리말은 그의 신념을 거듭 보여준다. "불의에 저항하지 않으면 지식인일 수 없고, 불의에 저항하지 않으면 작가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건 톨스토이, 타고르에서 루쉰 등 거룩한 이름까지 두루 인용하면서 반복하는 명제이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참이다. 실로 안타까운 것은 그런 섣부른 운동권 논리는 그 책에 딸려있는 평론 한 꼭지에서도 재확인된다. 문제의 평론은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라는 문학평론가 방민호가 썼다. 그는 <허수아비춤>이 "야만의 존재를 명징하게 고발했다"고 치켜세운다. 그 작가에 그 평론가가 아닐 수 없다.

이 글에서 내 목소리를 절제했다. 다만 조정래의 작품을 그대로 보여줘 독자 판단을 유도했을 따름이다. 이 연속 칼럼 첫 회 제목을 기억하시는가? "조정래 화제작 <천년의 질문>은 좋은 소설인가?" 이쯤에서 당신의 판단은 어떠신지가 궁금하다. 다음 회는 조정래 작품 전체를 관류하는 좌파 민족주의 문제를 이번 소설만이 아니고 <태백산맥>, <아리랑> 등 전체를 훓어보며 점검해볼 생각이다. /조우석 언론인

[미디어펜=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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