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년 가장 뚜렷한 변화는 한국인이 조선시대와의 사랑에 빠졌고, 그 변화를 연출한 것은 영화 장르란 점이다. 너무 큰 변화라서 사람들이 채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그 결과 한국영화는 500년 조선역사를 훑어 내리며 있는 얘기 없는 얘기로 거대한 '조선시대 판타지'를 만들어냈다.
오랫동안 TV사극이 장희빈 류의 궁정 야사를 반복해 다뤄왔지만, 그것과 전혀 다른 흐름이다. 누구도 이 흐름의 구조와 시대사적 의미를 짚지 않은 채 당연시한다는 점도 참 희한한 일인데, 오늘 분명히 밝혀두려 한다. 자본과 대중이 만들어내는 이 흐름이 우리 시대 문화의 퇴행적 성격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맥락에서 눈여겨 볼 점은 이번 주 개봉되는 영화 '나랏말싸미'다. 10여일 전 개봉된 '기방도령'과 달리 흥행 호조가 예상되는데, 보름 간격으로 개봉되는 두 작품이 나란히 조선시대 사극인 것은 우연만은 아니다. 단 디테일을 알고 보면 엽기적이다.
'기방도령'의 경우 여인들이 억압을 받던 그 시절 뜻밖에도 조선 최초의 남자 기생을 출현시킨다. 여인들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 희한한 사랑꾼인 그가 시대를 앞서가는 여인을 만나 진실한 사랑을 찾는 얘기란다. 황당하다고 고개를 젓는 사람은 뭘 모른다. 이미 영화판은 조선시대 성문화를 소재로 한 작품을 여럿 만들어냈고 관객들도 이미 낯설지 않다.
'나랏말싸미' 흥행 호조 예상
2003년 '스캔들-조선남녀상렬지사'(300만 관객), 2006년 '음란서생'(230만), 2010년 '방자전'(298만)등이 그것이다. 이런 작품들이 없는 얘길 지어낸다고 우습게보지 말자. '스캔들-조선남녀상렬지사'의 경우 코스튬 드라마, 즉 의상의 볼거리로 관객을 매료시키는 영화 장르의 문을 열었다.
해외에서 호평도 받았다. '전망 좋은 방', '세익스피어 인 러브' 못지않게 아름답다는 얘기다. 문제는 그게 부분적 성취일 뿐이며, 결국은 우리 시대를 퇴행으로 몰고 간다는 점이다. 상황이 그러하니 조선시대 탐정물 3부작인 '조선명탐정' 시리즈 같은 것도 오래 전 등장했다. '각시투구꽃의 비밀', '사라진 놉의 딸', '흡혈괴마의 비밀' 등이 그것이다.
이번 주 개봉되는 영화 '나랏말싸미'. 여유있는 흥행 호조가 예상되는데 한국인의 조선시대 사랑에 한 정점을 찍을 것으로 보인다.
20년 전이라면 꿈도 꾸지 못할 영화 세계가 지금은 일상이 되고 흥행에도 성공하는데, 일테면 조선시대 탐정물 3부작은 조선조 1800년대를 서양근대 초입 분위기로 둔갑시켰다. 민란과 기근이 번갈아 찾아왔고, 조선조가 망해가던 시기를 저렇게 거꾸로 분칠해놓은 것이다.
그런 성공에 힘입어 혹세무민이라고 외면하던 영역까지 작품을 만들어 재미를 본 게 2013년 '관상'(914만)이었다. 지난해 개봉했던 '명당'(208만), '풍수'(134만)도 그 아류다. 이러다보니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좀비 영화도 만들어낸다. 지난해 개봉한 '창궐'(159만)이 그것이다. 드디어 조선시대는 한국영화가 가장 선호하는 시대로 부각되기에 이르렀다.
애국과 반일(反日)의 코드를 잘 매치하면 흥행도 보장받는 금맥이라는 것도 확인했다. 그 성공의 대명사가 1700만 관객에 빛나는 '명량'이라는 걸 우리 모두는 안다. 여기에 더해 이번 주 개봉되는 '나랏말싸미'를 나는 유심히 지켜보는데, 조선시대 영화의 한 정점을 찍을 것이다.
불멸의 이름, 세종
정점을 찍는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다. 1000만 관객을 넘볼 수 있는 상업적 성공 가능성, 그리고 한국인의 조선시대 사랑이 극적으로 드러나는 분기점이란 점이다. 제작비와 홍보, 해외 마케팅 등이 돋보이지만, 그렇게 전망하는 이유는 한글을 창제한 세종을 조명하면서 그걸 이른바 애민(愛民)사상으로 둔갑시킨 영리한 작품 콘셉트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국영화는 조선시대를 '좋았던 옛날'로 포장해왔고, '일제라는 강도가 침략하기 전 민족문화를 꽃 피운 시대'로 찬양해왔는데, 그 핵심에 있는 인물은 세종이다. 한국관객의 성향이란 민족주의 감성에 충만한데, 그걸 제대로 건드린 게 '나랏말싸미'라고 보면 된다.
이 영화 티켓을 예매한 관객은 이 작품을 보며 현실의 괴로움을 달래고, 경제전쟁 중인 일본에 대한 적개심도 태우는 등 멋진 정신승리를 경험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세종은 '시대를 앞선 과학자'란 이미지에 더해 '백성을 사랑한 군주'로 더 높이 뜰 것이다. 사실 11년 전 세종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신기전'(370만)이 일차로 군불을 땠다.
신기전은 세계 최초의 로켓 화포였고, 그게 중국 대륙을 떨게 만든 세종의 비밀병기였다는 황당한 설정이었다. 그리고 2년 전 TV드라마 '장영실'은 15세기 조선의 과학기술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만들어낸 천재 장영실 조명을 통해 배후의 멋쟁이 후원자 세종을 찬양한 바 있다.
'장영실' 이전 TV드라마 '대왕세종'(2008년), '뿌리깊은나무'(2011년)등이 성공적으로 방영된 적 있었는데, 이미 세종은 한국인에게 불멸의 이름이다. 이 글 앞에서 나는 지난 20년 한국영화의 이런 흐름을 '조선시대 판타지'라고 지적했다. 자본과 대중이 만들어내는 퇴행적 문화 흐름이라고도 했는데, 그 이유는 다음번 글에서 구체적으로 밝히겠다.
다만 한 가지를 귀뜀하고 싶다. 이 나라를 일으켜 세운 박정희가 뭐라고 했던가? 그는 조선시대를 포함한 우리 역사를 한마디로 "퇴영과 조잡과 침체의 연쇄사"라고 단언하지 않았던가? 그 아픈 역사를 반복할 수 없어서 혁명을 일으켰고, 우리도 동참해 거대한 성공 역사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뭐가 아쉬워 우리는 "퇴영과 조잡과 침체의 연쇄사"를 '좋았던 옛날'로 포장하고, '민족문화를 꽃 피운 시대'로 찬양하는가? 무엇이 이런 황당한 흐름을 만들었는지의 구조를 성찰하는 게 다음 번 글의 목표다. 참고로 그 배경에는 민족주의라는 괴물이 똬리 틀고 있다는 말까지를 전해드린다. /조우석 언론인
[조우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