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26) - 이아손과 메데이아의 사랑과 모험, 황금양피를 찾아 지중해와 흑해를 누빈 또 다른 오뒷세이아 아폴로니오스 로디오스(BC 295?~ BC 215?)의『아르고 호 이야기』
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
▲ 박경귀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고대 그리스만큼 영웅들이 많이 탄생하고 활약이 두드러졌던 때도 드물다. 그러고 보면 시대가 영웅을 만들어 내는 것인지 영웅의 탁월함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리스 고대기에 페르세우스, 헤라클레스, 이아손, 테세우스, 아킬레우스, 오뒷세우스 등 숱한 영웅이 등장했다. 그리스 신화와 역사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이야기는 당대 그리스인들의 꿈과 희망, 희로애락을 대변했다.
이들 영웅들이 겪는 목숨을 내건 시련과 모험의 험난함은 유사하다. 하지만 이를 이겨내는 방식과 그 결과, 그리고 주인공들의 삶이 항상 성공적이었던 건 아니다.
페르세우스와 테세우스는 각각 험난한 고난을 영웅적 활약으로 이겨내고 각각 티린스의 왕과 아테네의 왕이 될 수 있었다. 반면, 헤라클레스는 그 유명한 12고역을 다 이겨내고도 한 여인의 투기에 의해 불행한 자살로 생을 마쳤다. 또한 이아손 역시 아내 메데이아의 복수에 걸려 비참한 상황에서 죽어갔다. 이러한 영웅들의 대조적 삶을 비교해 보는 건 더 없이 흥미롭다.
『아르고 호 이야기』는 바로 영웅답지 않는 삶으로 마감했지만 나름대로 다양한 모험과 극복과정이 전개되는 이아손의 모험이야기다. 이아손이 진정한 영웅이기는 했나? 전편을 읽으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런 의문을 갖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가 위험한 과업을 극복한 것이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해 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점을 유의하면서 읽어보는 것도 나름 재미있다. 아폴로니오스 로디오스(Apollonios Rhodios, BC 295?~ BC 215?)는 구전되는 설화를 토대로 새로운 서사시로 재창조해 냈다. 물론 오뒷세우스의 모험과 유사한 대목이 많아 『오뒷세이아』의 아류작품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이 작품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호메로스와 어떻게 비견될 수 있을 것인가.
어떻든 『아르고 호 이야기』는 영웅적 스토리의 요건을 많이 갖고 있다. 이아손은 그리스 북부 텟살리아의 이올코스의 왕 아에손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아버지 아에손은 숙부 펠리아스에 의해 왕위에서 쫒겨난다. 이아손이 성장한 후 적통의 왕위계승을 주장하자, 펠리아스는 이아손에게 당시 세계의 동쪽 끝인 흑해의 동쪽 지역 콜키스에 있는 황금양피를 가져올 것을 요구한다. 모든 영웅들에게 스스로 영웅임을 입증시킬 시련이 주어지는 유사한 패턴이 여기서도 발견된다.
플릭소스(Phrixos)가 콜키스까지 타고 간 황금양으로 추정되는 부조다. 델포이 아폴론 성역의 시키니온(Sikyonian) 보물창고의 부조로 남아있다. 플릭소스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황금양을 제우스신에게 바치고 양피는 콜키스의 왕 아이에테스에게 바쳤다. 펠리아스가 이아손에게 가져올 것을 명령한 황금양피가 바로 이것이다. 델피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
황금양피를 가져오면 왕자로 인정하겠다는 얘기는 이아손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에 다름없었다. 당시 그리스에서 지중해를 건너 흑해의 끝 콜키스까지 가는 것 자체가 거의 죽음의 항해 길처럼 험난한 여정이었다. 또 태양신 헬리오스의 아들이라 자처하는 용맹하고 잔인하기로 유명한 아이에테스 왕이 황금양피를 순순히 내줄리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황금양피는 콜키스의 신성한 숲에 보관되어 잠들지 않는 용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이아손은 황금양피를 찾아오는 죽음의 모험을 위해 그리스 전역에서 영웅들을 모집한다. 헤라클레스, 카스토르, 폴뤼데우케스, 오르페우스, 펠레우스, 텔라몬 등 당대의 영웅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하지만 헤라클레스가 실제로 일행에 참여했는지는 논란이 많다. 이 작품에서 잠시 동행하다 이탈하게 되는 것으로 설정한 것도 흥미를 돋우려는 장치로 보인다.
어떻든 55명의 영웅들이 아르고 호에 승선하여 거친 항해 과정에서 겪어내는 숱한 고난과 극복과정에 담긴 영웅적 스토리가 핵심이다. 이들은 콜키스로 향하는 과정에서 ‘권투왕’ 아뮈코스와의 시합을 통해 통과하는 신사적 시험도 이겨내지만, ‘부딪히는 바위’가 있는 풍랑이 거센 폰토스 해협을 지나며 동료를 잃는 호된 시련도 겪었다. 그래도 이는 전주곡에 불과했다.
이들에게 가장 험난한 재앙은 콜키스에 도착한 이후부터 닥친다. 아이에테스가 이아손에게 청동 발과 불길을 뿜는 황소에 멍에를 씌워 4정보의 묵정밭을 갈고, 용의 이빨을 뿌린 땅에서 솟아나는 청동 무장을 갖춘 병사들의 공격을 제압하라는 두 과제를 내렸기 때문이다. 이아손과 그의 일행이 결코 감당해 낼 수 없는 이 과업은 이아손에 첫눈에 반해 버린 아이에테스의 딸 메데이아의 극적인 도움으로 해결된다.
<이아손과 메데이아>, uthor Gustave Moreau(1826–1898) 1865년 작, 사진 www.artrenewal.org |
헤카테를 모시는 사제이자, 마술과 묘약을 다룰 줄 알았던 메데이아가 이아손을 위해 어떤 청동의 타격도 이겨낼 수 있는 묘약 ‘프로메테우스의 약’을 이아손의 몸에 바르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아손은 결국 불가능해 보였던 과제를 모두 해결한다.
이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메데이아의 갈등과정 심리묘사는 긴장감과 극적 재미를 더해준다. 그녀가 사랑에 눈이 멀어 아버지를 배반하고 이아손을 돕고자 하는 마음으로 흔들리는 갈등의 독백은 뛰어난 감성의 문학적 표현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불타오르는 연정(戀情)과 조국을 배반해야 하는 수치심과 두려움 사이에서 견딜 수 없어하는 고뇌의 모습이 잘 나타나있다. 자신에게 쏟아질 비난을 상상하며 갈팡질팡 하는 그녀는 결국 운명적 사랑의 힘에 굴복하고 만다.
이아손 또한 메데이아의 신령한 힘을 이용하여 황금양피를 얻고자 메데이아를 아내로 삼겠다고 제우스와 헤라에게 맹세하며 그녀의 도움을 북돋웠다. 결국 메데이아는 자신의 배신이 들통 나자 황금양피를 지키는 용마저 마법의 약으로 잠들게 하고 황금양피를 거두어 이아손과 함께 탈출한다.
이아손을 돕는 메데이아의 이런 행위는 반역행위에 해당된다. 콜키스의 신비의 보물이자 아이에테스의 왕권의 상징과도 같았던 황금양피를 적과 공모하여 내준다는 건 분명 조국에 대한 배신행위였다. 이들의 귀향길 역시 험난했다. 이들을 쫒던 메데이아의 동생 압쉬르토스는 결국 누이의 계략에 말려 죽임을 당했다.
메데이아는 사랑을 위해 조국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 친족까지 죽이는 패륜을 보탰다. 이아손은 귀향길에서 오르페우스에 의해 세이렌의 유혹을 이겨내고, 이들의 뱃길을 막는 청동인간 탈로스 또한 메데이아의 힘을 빌려 물리치고 귀향에 성공한다.
이아손의 험난한 모험에서 헤라와 아프로디테 신, 그리고 여러 여성들과 메데이아의 헌신적 도움이 모험의 성공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메데이아는 이아손을 위해 조국과 가족을 버렸다. 그만큼 메데이아의 사랑의 열정은 넘쳤다. 하지만 그녀의 결정적인 도움으로 매순간 위기를 극복하는 이아손의 경우 메데이아에 대한 사랑의 격정을 확실하게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귀향과정에서 추격하는 콜키스인들에게 메데이아를 돌려주자는 의견이 분분하자, 메데이아가 아르고 호 대원들에게 조국과 집안의 명예를 팽개치고 떠나온 자신을 보호해줄 것을 읍소하는 장면에서 이아손은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또한 메데이아와 급작스럽게 결혼하게 되는 것도 추적하는 콜키스인과 중재를 맡은 알키노오스가 메데이아가 처녀라면 아이에테스에게로 돌려보내는 결정을 하겠다는 정보를 미리 알아낸 일행의 요구에 마지못해 응한 것이었다. 이런 두 사람의 사랑의 온도 차이는 미래의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의 파탄을 예고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이아손의 모험담에 가장 주목을 끄는 주인공은 역시 이아손과 메데이아다. 이 작품에서는 메데이아의 신령한 마술적 힘에 의존하여 위기를 극복하고 이아손이 무사히 귀향하는 것으로 끝나고 있다. 여기까지는 해피엔딩이다.
하지만, 다른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이아손과 메데이아의 불행한 결말, 즉 이아손이 메데이아를 배신하고 이에 대응하여 이아손의 가족을 파괴하는 메데이아의 끔찍한 복수극은 후세의 문학, 회화, 음악 등 다양한 소재로 재생산되었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메데이아>가 대표적이다. 여기서는 이아손이 코린토스의 왕녀와 결혼하려고 하고 메데이아와 아들들이 추방되는 상황에 이르러 메데이아의 처절한 복수극이 전개된다. 외젠 들라크로와의 유명한 그림 <아이들을 죽이려는 메데이아>는 이런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다.
<아이들을 죽이려는 메데이아>, 외젠 들라크로와(Eugene Delacroix, 1798–1863) 1862년 작, 르브르 박물관 소장, 사진 Web Gallery of Art |
이아손은 다른 영웅들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고난을 극복해내지 못하고 뛰어난 여성의 도움에 의존했다는 점에서 미래의 불행을 예고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자신의 과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귀향했음에도, 또 메데이아의 계략으로 숙부 펠리아스를 죽이고도 왕위를 이어받지 못했던 것은 이아손이 시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아르고 호 대원 중 여성들의 도움을 받는 것을 조롱하며 수치스럽게 생각했던 이다스의 주장처럼 그는 스스로 용맹하게 도전하는 모습을 보이든가, 아니면 결정적인 해결사 역할을 한 메데이아의 마력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최대한 그녀와 함께 성공을 개척해 나가려는 자세를 견지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뛰어난 능력을 지닌 반려인 메데이아를 끝까지 포용해 내지 못한 이아손의 용렬한 측면이 보인다.
어떻든 이 작품은 『오뒷세이아』와 함께 그리스인들이 미지의 세계를 개척해 나가는 해양모험담의 대표작으로 볼 수 있다. 세상 끝까지 항해하는 일은 당시 그리스인들에게 식량과 주석을 구하기 위해 필수적인 고역이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대가 영웅을 만든 셈인가? 태양족을 자처하던 콜키스인들의 상징과 같았던 황금양피를 탈취해 오는 과정을 그리스인의 원정과 약탈 행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의견들이 존재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르고 호의 행로 또한 지금의 흑해, 도나우 강, 아드리아 해, 이탈리아의 포 강과 론 강을 건너 이탈리아 서쪽 바다와 북아프리카 해안, 크레타 등지로 동쪽과 서쪽의 끝과 남쪽의 대륙을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스인의 통상과 군사항로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오뒷세우스가 거친 귀향의 행로와 겹치는 부분이 많다는 점으로 보아도 이들의 여정이 그리스인의 생존을 유지하고 확장하는 중요한 통로였음을 보여준다. 아르고 호의 모험이 그리스인들의 동경을 살 충분한 영웅적 스토리가 된 이유가 아닐까?
아무튼 이아손의 과업은 성공했다. 이아손은 억세게 운 좋은 사나이인가? 아님 눈에 콩깍지가 씐 메데이아의 자발적 협조 덕분인가? 서양 문화에서 최고의 악녀라는 이름을 얻게 된 메데이아.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 등 다른 작품과 신화에서 밝혀지는 뒷이야기가 더욱 흥미롭다. 메데이아는 정말 악녀일까? 이 작품의 행간에서 이아손과 메데이아의 사랑의 온도 차이, 그리고 미래의 배반과 복수의 씨앗을 찾아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글/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kipeceo@gmail.com)
☞추천도서 :『아르고 호 이야기』, 아폴로니오스 로디오스 지음, 강대진 옮김, 작은이야기(2013, 2쇄), 343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