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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숭호의 돌아보기]대한민국 '어른'이 또 한 분 줄어들었다

2019-08-07 16:16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정숭호 칼럼니스트·전 한국신문윤리위원

"교수님, 기초과학이 왜 중요합니까?"
"그런 질문들을 때마다 내가 왜 이공계를 선택, 유기화학자가 되었는지 아느냐고 되묻지. 징병에 안 뽑히기 위해서였어. 일제말기 일본당국이 전쟁에 곧 질 줄 내다보면서도 이공계 전공자를 군대에 보내지 않은 건 기초과학의 맥을 잇기 위해서라고 봐야 해. 그렇게 장래를 내다보았기 때문에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고 나서도 곧 부흥할 수 있었던 것이지. 우리나라는 뭐했나. 그동안 수십 년을 과학입국 운운하면서 실질적으로 한 일 뭐있나. 수십 번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그때뿐이었지."

2000년 4월 썼던 김용준 고려대 명예교수 인터뷰 기사의 앞부분이다. 나는 나의 이 글을 그가 향년 92세로 세상을 떠난 이틀 뒤인 지난 6일, 19년 만에 읽게 되었다. 그날 페이스북에는 그의 별세를 아쉬워하는 장부승 일본 관서대 교수의 추도문이 실려 있었다. 장 교수는 거기에 내가 썼던 그 인터뷰 기사를 링크시켜놓았다.

어린아이처럼 천진했던 표정과 밝고 높은 목소리, 작은 몸 때문에 더 크고 활발해 보였던 손짓 등등…. 고인의 모습을 회상하며, 써놓고는 20년이 가까이 잊고 있었던 내 글을 다시 읽었다. 자기표절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 그가 나에게 해준 말, 한국인들에게 해준 말은 아직도, 아니 한국이 대혼란에 빠져있는 지금, 오히려 더 유효하다는 생각 때문에 그대로 옮기고 싶어졌다.

한국학술협의회 이사장과 대한화학회 회장 등을 지낸 원로 학자 김용준 고려대 명예교수가 지난 4일 오전 향년 92세로 별세했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배움'에 있어서는 젊은이 못지 않은 왕성한 활동력을 지닌 김용준 교수가 고려대 과학도서관을 이용하던 생전 모습. /사진=연합뉴스


"한국의 기초과학정책은 말뿐이었다"고 비판을 시작한 고인은 "요즘 박사학위 딴 젊은이들을 보면 불쌍하다"는 말도 했다. "나만해도 60년대에 박사를 따 평생 그거 하나로 엔조이하면서 살아왔지만 요즘 박사들은 길거리 개똥 취급도 못 받는 것 같아. 그렇게 어렵게 박사를 딴 사람이 곧 10만 명이 된다는데 자리를 못 찾아 보따리 장사나 하고 있으니 말이 되는 소리야. 있는 인재들도 쓰지 않으면서 사람이 없다고 딴 소리만 하니 기초과학은커녕 무슨 학문이 발전하겠어?"라는 거였다.

"박사가 너무 많아 모두 취업시키려면 돈이 엄청 들 텐데요?"라는 내 질문에는 "전투기 두 대만 안사면 그들 모두를 활용할 수 있을 거요. 국방부 예만 들어서 안됐지만…"이라고 답했다. 자신의 경험이나 제자들의 경우를 봐도 학위를 마친 직후가 가장 머리가 활발하게 돌아 제일 알맹이 있는 연구가 진행됐는데, "학위를 갓 마친 젊은이들을 이렇게 마구 놀리는 나라는 지구에서 우리나라 밖에 없을 것"이라고 한탄했다.

교수들을 '괴롭히는' 교육당국의 행태도 그의 큰 걱정거리였다. "교수는 놀아야 창의적인 결과를 내놓을 수 있는 직업이야. 학자를 말하는 영어 'Scholar'는 원래 라틴어로 '여가'라는 말이 어원이지. 학문을 하려면 여가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야. 그냥 놀라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갖고 고통스럽게 자신의 분야를 연구하라는 말인데 교육부가 교수들을 들들 볶으면서 그냥 고통스럽게만 만들고 있으니 학문발전이 될 리가 없지. 아인슈타인이 살아서 한국에 왔다고 해봐. 어느 대학에서도 못 붙어있을 거야." 교육당국이 논문발표 실적을 교수들의 평가기준으로 삼고 있으니 평생 17편의 논문밖에 쓰지 않은 아인슈타인이 제 아무리 실력이 있다한들 한국서 배겨나기 어려웠을 거라는 말이었다.

"교수나 박사라고 모두 똑똑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엉터리 교수도 많고 일부에서는 교수망국론, 박사무용론도 나오는데, 검증과 평가는 해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말꼬리를 잡아보았지만 "학교에 맡기면 검증은 스스로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물론 학생을 학생으로 보지 않고 학생 머리 하나를 돈뭉치로 보는 대학운영자들이 많지만 그런 대학은 조만간 도태될 것이니 문제가 안 돼"라고 말했다.

"그보다는 대학이 시장바닥된 걸 걱정해야 해. 왜 교수가 벤처사장이 되어야 하나. 학교 분위기가 온통 장사 속으로 돌아가잖아. 학문은 언제 해. 자기 학문을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궁리하고 다른 이론과 붙여보고 그러면서 새 이론이 나오고 새 학설이 성립되고 노벨상을 받을 만한 신물질도 개발되는데 교수들이 앞장서서 벤처, 벤처 하니 학문이 제 길을 갈 리가 없지. 이게 우리나라 수준이야, 학교에 쓸 돈 없다지만 정치하겠다고 출마한 사람들 좀 보소, 없다는 돈이 어디서 나왔는지 온통 돈으로 난리법석이야. 정치가 저러니 학문이 발전될 턱이 없지."

몇 가지 숫자와 사회상이 업데이트되지 않았을 뿐, 19년 전의 인터뷰 같지가 않다. 그가 세상을 뜨지 않고, 생존해 있어서 오늘 인터뷰를 다시 한다고 해도 다른 말을 해줄 것 같지가 않다. 앞길을 비쳐주는 등불이 있는데도 눈을 감은 채 어둠 속으로 찾아들어간 게 지금의 대한국민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이제 그런 등불을 들어줄 사람이 몇이나 남았을라나. /정숭호 칼럼니스트·전 한국신문윤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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