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정욱 숭실대 겸임교수 |
어쩌면 그 특성상 문화ㆍ예술은 애초부터 좌파의 상속물일지도 모르겠다. 아시다시피 문화라는 단어(일본 사람들이 붙인 한자 말고 영어)는 밭을 갈다, 경작하다는 뜻의 라틴어에서 왔다. 경작이란 무엇인가. 갈아엎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문화는 항상 불온하고 전복적이며 체제 타격적이다. 체제를 칭찬하는 예술은 전체주의국가에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절대 예술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2014년 현재 대한민국의 문화 지형도는 1925년 KAPF(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 결성 이래 90여 년간 펼쳐진 좌익 문화예술 운동의 총체적 황금기다. 아주 빛이 반짝반짝 난다. 6.25 전쟁 직후 좌익 예술은 궤멸 상태에서 4.19를 통해 가까스로 회생한다(물론 상징적인 표현이다). 본격적인 문화 예술에서의 좌익화는 70년대 공장과 교회, 농촌으로 예술이 침투하면서 공동체 놀이(마당극, 풍물) 등을 통해 민족문화와 결합하면서 이른바 민중문화라는 이름으로 전개된다.
그 이론적 기반은 ‘창작과 비평’에서 댔다. 그때까지만 해도 운동에서 계급성은 뚜렷하지 않았다. 혹은 드러내기가 불편했거나. 5.18을 기점으로 체면치레할 필요가 없어졌다. 국가는 노골적으로 타격을 가해야 하는 지배계급의 권력 집행 기구로 인식되었다. 왜. 자국민에게 군대가 총을 쏘았으므로. 애초에 전통적 마르크시즘에는 사회라는 개념이 없다. 그것은 다만 이데올로기로 봉합되어 있을 뿐이고 계급 간 갈등은 물 밑에서 항상 진행 중이다. ‘빨갱이’ 낙인이 무서워 소심하게 내걸었던 계급투쟁이 전면화 된다.
▲ 남정욱 숭실대 겸임교수가 지난 25일 자유경제원 주최 <무엇이 편향을 부르나:출판시장, 정부의 위태로운 큰 손> 교육쟁점토론회에서 패널로 참석해 문화예술 출판계의 좌편향된 실태를 비판하고 있다. |
노동문학은 박노해와 백무산이 열었다. ‘노해’는 노동 해방의 약자고 ‘무산’은 짐작대로 무산無産 계급의 그 무산이다. 영화는 모든 좌익 예술 운동의 핵심이다. 레닌은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으며 러시아 혁명의 진행 과정에서 유효하게 활용했다. 하긴 무지한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다스 카피탈’을 이해시키기는 난감했을 것이다.
좌익 영화는 대학에서 출발한다. 서울대 영화 서클 얄라성이 그 진원지였다. 그 집단에서 장선우(꽃잎), 박광수(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홍기선(이태원 살인사건)이 나왔다. 5.18을 다룬 ‘황무지’와 노동운동 프로파간다물이었던 ‘파업전야’는 그 초기 작품이다.
노래가 빠질 수 없겠다. 최초의 반항적인 노래 운동은 노가바(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노래를 찾는 사람들’로 대중성을 확보한다. 이렇게 집회 현장에서 읊고(문학), 틀고(영화), 노래하는 ‘좌익 예능 종합 세트’는 문화 운동의 저변을 장악해 나간다.
이 투쟁의 이론적 기반을 다지고 전파의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이 출판이다. 조심스럽게 마르크스, 레닌주의 해설서를 출판하던 70년대를 지나 원전을 바로 찍어내는 시기 역시 5.18 직후다. 정권은 판금도서라는 이름으로 이 확산을 저지해보지만 복사기의 시대가 열리면서 무력화된다. 70년대 이념 도서들은 대체로 해직언론인들이 그 담당자였다. 정권이 거리로 내쫒은 저항세력이 출판이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5.18 이후에는 핵심 운동 세력 중 출판이 적성에 맞는 인물들이 그 역할을 승계한다. 훨씬 더 계급적으로 뼛속까지 혁명적으로. 출판이란 만들어내는 사람과 그것을 읽어주는 사람이 있을 때 유용하다. 5.18 이후 전국적으로 확대된 운동권 심파(동조자들의 약자)들이 그 엄청나게 늘어난 소비자였다. 그리고 그 소비자들이 부모가 되면서 이제는 그 자녀들에게 좌익적 성향의 책을 사주고 읽힌다.
명분은 명료하다. 아이들에게 정의감을 심어주고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갖게 해주기 위하여. 그렇게 대한민국 출판계는 좌익적 세계관으로 물들고 점령된다. 서점에 나가보면 약간 경악 직전이다.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아동용 전태일과 마르크스와 게바라와 마오쩌뚱과 그람시를 읽는다. ‘항일 독립 투쟁의 별 김일성 장군’ 같은 책이 수년 내에 서점에 등장하는 쪽에 내 팔 한쪽과...아니다, 뭐 대단한 거라고 그런 데 소중한 신체를 걸겠는가. 그냥 출판해라.
우려할 일인가. 그렇기도 하고 안 그렇기도 하다. 모든 국민은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첨언하자면 모든 국민은 그 수준에 맞는 출판을 가진다. 대한민국은 더 이상 선진국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 나라다. 민족사 5천년을 관통해 온 가난이라는 유전자가 다시 활개를 치는 중이다. 그냥 이 수준에서 멈추고(우리는 그 동안 지나치게, 격에 안 맞게 잘 살았다) 주저앉으면 된다.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일부 용감한(‘깨인’이 아니다) 출판사들이 반대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백년동안’이라는 출판사는 이름대면 알만한 대형 출판사의 브랜치(곁가지 브랜다)다. 거기서 대한민국 정체성이라는 총서가 나오고 있다. 군소 출판사가 아니라 대형 출판사에서 이런 움직임이 있다는 것은 상징적으로 반갑다. 뭐 많이 팔리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한쪽으로 몰려가고 비정상적으로 내려앉은 대한민국 문화 지형도에서 대항 진지(陣地) 하나 정도는 있다는 위안 정도가 그 효능이겠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뚱의 정책 중 30퍼센트는 잘 한 일이지만 70퍼센트는 실수였다. 그러나 70퍼센트의 실수보다 30퍼센트의 잘한 일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짧은’ 개인이 ‘긴’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이래야 정상이다. 역사는 겸손해지기 위해, 반성하기 위해 배우는 것이지 분노하고 증오하고 혐오하고 낫으로 찍어내기 위해 배우는 것이 아니다.
박정희를, 이승만을 잔혹하며 파탄적인 독재자와 개념 없는 친일파로 몰아붙이는 나라에 미래 같은 건 없다. 모든 선택의 책임은 그 스스로에게 돌아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가난하고 초라하며 폐쇄적이고 빈곤한 지력(知力)을 가진 나라의 국민이 될 것이다. 나는 좀 빠졌으면 좋겠지만.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