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윤광원 기자] 이번 추석연휴에 JTBC 특선영화 '안시성'을 보았다.
필자는 안시성의 고구려군사가 5000명이라는 데 주목했다. 5000명이 당나라 20만 대군을 격파했다는 게 영화의 골자다.
그런데 이 5000명이란 숫자가 과연 맞는 것일까. 영화에 '팩트'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적절치 않고, '영화적 허구'에는 시비 걸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 번 들여다본다.
기록에 안시성 고구려군의 숫자가 나와있는 것은 없다. 심지어 성주 이름이 정말 '양만춘'인에 대해서도 시비가 있다. 정식 역사서에 없는 이름이다.
학계에서는 고구려 정규군의 규모를 대략 30만 내외로 보는 것 같다.
당시 요동지역에는 수백 개의 성이 있었다. 그 중 안시성은 요동성, 오골성과 함께 '넘버 3'에 드는 성이다. 100개의 성에 1000명씩 군사가 있었다면, 10만이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안시성의 고구려군이 5000이었다는 영화의 설정에는 수긍이 간다. 그렇다면 요동의 최대 군사기지 요동성에는 많아야 1만 내외의 병력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매우 이상한 팩트가 있다.
중국 역사서인 '구당서'와 '신당서'에는 요동성의 병력 기록은 없지만, 성이 함락된 후 5만의 고구려군을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미 패전해 성이 함락된 뒤인데, 5만 병력이라니...
이런 의문은 고구려의 의무 초등교육기관인 '경당'을 생각해야만 실마리가 생긴다.
학교 역사교과서에서도 나오는 경당은 지방 각 촌락마다 있었던 것으로, 기본적인 글 읽고 쓰기와 함께 칼쓰기, 활쏘기 등 기초 군사훈련도 받았다.
이렇게 무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이 성이 완전 포위돼, 함락되면 다 죽는 걸 알면서도 그냥 집에서 공포에 떨고만 있었을까? 요동성에서 5만명이 학살됐다는 소식은 그들을 격동시켰을 것이다.
당시 안시성의 성민은 10만명이었다고 한다. 그 중 절반은 남자이고, 노약자와 어린이를 뺀 남성들은 대부분 어떤 식으로든 전투에 참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성벽에 의지하면 공포심은 줄고 안전성은 배가 된다.
여성들도 상당수 싸움터에 섰을 것이다. 실제 영화에도 여성 전투부대가 등장한다.
이래야 요동성 '5만의 미스테리'가 풀린다.
정규군이 30만이라면, 이런 백성 '예비군'은 200~300만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가 수나라 100만 대군과 당나라 정예군에 당당히 맞서, 동북아의 강대국으로 군림했던 '밑거름'이었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고대 로마제국으로 가보자.
불후의 명저 '로마인 이야기'를 집필한 시오노 나나미의 신작 '리더이야기'의 일부다.
"첫째 감동 요소는 로마는 존망의 위기에 놓인 시기에도 '17세 이하의 미성년' 남자는 절대 징병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버지는 전장에서 쓰러질지언정, 아들은 평소와 다름 없이 학교에 다녔다"
로마시민에게는 직접세가 없었다. 대신 병사로서 조국을 위해 싸우는 의무가 있었다. 이른바 '피의 세금'이다.
이 시민들이 로마 군사력의 핵심이었다. 바로 당시 '세계 최정예 부대'였던 로마 군단들이다.
당연히 당시 학교에는 군사훈련이 기본이었을 것이다.
그 뿐이 아니었다.
시민 군단병만으로는 세계 제국으로 팽창하는 로마에는 병력이 턱 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정복지인 속주에서 모병된 '보조병'들이다.
보조병은 로마제국 군사력의 3분의 2를 차지했는데, 이들은 군단병과 똑 같이 급료를 받고, 군복무가 끝나면 로마시민권을 부여 받았다.
피지배민족 출신이지만, 실력과 노력만 있으면 원조 '로마귀족 출신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던 것.
시오노 나나미는 이런 '개방성'이 세계 제국 로마의 원동력으로 평가한다.
제국의 토대를 닦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45년, 의료와 교육에 종사하는 의사와 교사에 대해서는 '출신지나 피부색에 관계 없이 로마시민권'을 준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들은 전문직종으로 대우받았으므로, 속주민들은 이 자리를 얻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고대의 '자유시장경제'가 형성된 것.
즉 교육은 '경쟁과 시장의 힘'으로, 도시국가 로마를 세계 제국으로 팽창시키는 '원동력'이었다.
최근 여권에서는 중진 의원 '물갈이' 설이 힘을 얻고 있다.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은 자신의 이름이 그 명단 안에 들어가자, '불출마'는 생각해 본 적이 없으며 지도부와 논의해 본 적도 없다고 선을 그었다.
교육이 정치와 휩쓸리게 되면, 그 나라에는 희망이 없다. 고구려도, 로마도 교육은 독립적이었다.
[미디어펜=윤광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