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 (29) - 트로이 영웅 아이네아스의 도전과 모험 베르길리우스(BC 70~BC 19)『아이네이스』
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
▲ 박경귀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로마의 건국 신화 만들기
아이네이스(Aeneis)』는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한 작품이다. 천재적 작가였던 베르길리우스(Publius Maro Vergilius, BC70~BC19)는 로마 건국의 영광을 찬미하고 번영을 기약하는 대서사시를 만들어 냈다. 그가 신과 영웅들이 활약한 찬란했던 그리스의 역사에서 그 뿌리를 찾은 건 어쩌면 당연했다. 보잘 것 없던 한촌(閑村)에서 이루어진 로마의 건국이 오랜 신탁의 예견과 탁월한 영웅의 모험과 고난 극복의 결과였음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베르길리우스는 로마 건국의 아버지의 뿌리를 500여 년 전의 트로이의 영웅 아이네아스(Aeneas)로 끌어 올렸다. 그는 패망한 트로이 왕족 아이네아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이탈리아까지 와서 새로운 나라를 창업한 일이 신의 신성한 뜻에 의한 것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아이네아스는 늙은 아버지 앙키세스를 어깨에 메고 패망한 트로이를 탈출한다. 이 과정에서 아내 크레우사가 실종된다. 아이네아스와 백성들은 이다 산으로 피신했다가 외국으로 탈출하기 위해 배를 건조하고 항해한다. 첫 번째 당도한 트라키아에서 불길한 징조를 본 이들은 델로스 섬에서 아폴론으로부터 “옛 어머니를 찾아 그곳에 정착하라."는 신탁을 받는다.
아버지 앙키세스를 어깨에 메고 아들 아스카니우스와 함께 트로이를 탈출하는 아이네아스. 하인리히 슐레이만은 신화집에서 이 장면 그림을 보고 트로이의 존재를 믿고 1871~1879년까지 트로이를 발굴하여 트로이 전쟁의 역사를 세상에 알렸다.
트로이 민족의 선조가 살았던 곳을 찾아 떠나는 대장정은 신의 계시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들은 크레타 섬, 카르타고, 시칠리아를 거쳐 헤스페리아(현재의 이탈리아)에 이른다. 신이 지명한 곳은 결국 라티움지역이었던 것이다.
험난한 바다를 헤치며 정착할 곳을 찾아 유랑하던 이들이 겪는 고초는 위대한 로마 건국을 위한 지난한 산고(産苦)였다. 힘겨운 여정에 지쳐 서로 반목하거나, 좌절하고 안주하려는 위기 상황을 새 나라를 건설해야 하는 신성한 소명으로 이겨나가는 과정은 또 다른 『오디세이아』이자 『일리아스』이다.
『아이네이스』의 중요한 플롯은 호메로스의 이 두 대서사시와 상당히 닮았다. 당시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던 영웅들의 이야기를 베르길리우스가 아이네아스를 통해 종합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이 점이 『아이네이스』가 로마인들의 감흥을 더 쉽게 끌어낼 수 있었던 요인이 아니었을까? 트로이 영웅들의 이야기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들에게 흥미로운 선망의 스토리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디세이아』가 귀향의 모티브가 주제라면 『아이네이스』 역시 먼 옛 조상들의 고향을 찾아가는 귀향의 여정이 중심이다. 하지만 오디세우스가 자신을 학수고대하는 왕국으로의 영광스런 승리자의 귀향이었다면, 아이네아스의 귀향은 옛 조상의 터전이었다는 인연만 있었을 뿐 반길 사람 하나 없는 미지의 땅을 떠도는 패망국 유민들의 귀향이었다. 이미 누군가의 터전이 되었을 땅으로의 귀향은 정착자에 대한 이방인으로서의 도전이었던 셈이다. 아이네아스의 모험의 여정이 애초부터 험난할 수밖에 없던 이유다.
패망 국가의 유랑집단이었던 이들이 맨 처음 자신들의 선조의 고향이었으리라고 믿은 크레타 섬에 당도하지만 결국 착오였음을 알게 된다. 두 번째 카르타고 해안에 도착하고 아이네아스는 이곳 여왕 디도와 사랑에 빠진다. 아니 디도의 사랑의 열병이 아이네아스를 붙잡았다고나 할까?
디도는 트로이 전쟁 영웅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아이네아스는 트로이 전쟁의 마지막 장면들을 상세하게 들려준다. 트로이 목마를 이용해 트로이 성으로 들어간 그리스 군과 트로이 군 간의 마지막 전투와 패망의 백성이 겪는 처참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일리아스』에서 다루지 않은 트로이 멸망의 순간이 이 책에 생생하게 전개된다.
아이네아스는 한동안 달콤한 생활에 빠진다. 하지만 그는 신들이 예정해 준 이탈리아로의 여정을 메르쿠리우스가 상기시켜 주자 디도를 뒤로 하고 최종의 정착지를 찾아 다시 떠난다. 아이네아스의 사랑을 놓칠 수 없었던 디도는 아이네아스의 체온이 담긴 소품들을 쌓아 불태우려던 장작더미에 올라 스스로 칼로 자결한 후 불태워진다. 남아달라는 그녀의 간절한 호소도 그를 설득시킬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이별의 슬픔을 죽음으로 마무리 했다. 아이네아스가 남았더라면 카르타고 왕국의 왕권을 차지할 수 있었을까? 새로운 트로이 왕국을 만들 수 있었을까?
▲ 디도의 죽음, 페테로 파울 루벤스 17세기 작품. |
게다가 주변 다른 왕국의 질시와 견제의 분위기 또한 심상치 않아지고 있었다. 이방인인 아이네아스와 그 일족이 주도하는 왕국이 만들어지고 유지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고 볼 수 있다. 아이네아스는 이런 불안정한 상황을 간파하고 신들의 계시한 보다 안전한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나선 것인지도 모른다.
새로운 건국의 땅을 찾아 나선 트로이의 영웅 아이네아스의 모험
오디세우스가 절세미인인 마술사 키르케와의 달콤한 생활을 접고 다시 귀향의 항로에 오르는 대목은 유사하다. 다만 키르케는 오디세우스에게 항해 과정에서 요정 세이렌의 유혹을 이겨낼 방책을 알려주며 흔쾌히 보내주지만, 디도는 아에네아스의 숙명적 여정을 수용하지 못하고 자신을 생을 마감한 점이 다르다. 키르케와 디도의 사랑의 깊이가 달랐기 때문일까?
이후 아이네아스의 모험은 계속된다. 시칠리아에서 아버지 앙키세스를 잃고 장례식을 성대히 치른다. 또 항해에 지친 여성과 노인들을 그곳에 정착하도록 하고 다시 항해를 떠나 헤스페리아의 해안에 당도한다. 이곳에서 그는 여사제인 예언자 시빌라의 인도로 저승세계로 들어가 죽은 아버지의 혼령을 만나 로마의 영광된 미래를 듣게 된다. 베르길리우스는 이미 당시까지 이루어진 역사를 앙키세스의 입을 통해 다시 들려줌으로써 5백여 년 전에 이미 로마 건국과 번영의 성취가 예정되어 있었음을 찬미하고 있는 셈이다.
앙키세스의 예언은 아이네아스에게 건국의 소명의식을 더욱 확고하게 해주고 험난한 여정을 헤쳐 나갈 용기를 준다. 마침내 아이네아스와 그의 백성들은 약속의 땅 라티움에 상륙한다. 본격적인 건국을 위한 투쟁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 땅에는 이미 라티니족이 왕국을 세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라티니족의 왕 라티누스는 자신의 딸 라비니아가 이방인과 결혼하게 되면 자신의 왕국이 대 제국으로 번성하게 된다는 신탁을 믿고, 그와 약혼한 루툴리족의 왕자 투르누스와 파혼하도록 하고 아이네아스를 받아 들이려 한다. 이것이 라티움 정착과정에서 전쟁의 씨앗이 된다.
약혼녀를 이방인에게 빼앗기게 된 투르누스와 그에 동조하는 라티움 인근 부족들의 동맹군은 아이네아스와 치열한 전쟁을 치른다. 『일리아스』의 전투 장면이 그대로 재현되는 듯하다. 라티누스가 중립을 지키는 가운데 투르누스는 폭정을 일삼다 쫓기어 온 에트루리아 왕 메젠티우스와 여전사 집단을 거느린 카밀라의 군세를 빌어 막강한 전력을 갖게 된다. 이에 대항하여 아이네아스는 당시 로마 지역의 한 언덕에 웅거하던 작은 성채의 주인인 에우안데르 왕에게 도움을 청하고, 그의 중개로 메젠티우스에 대한 증오심이 가득하던 에트루리아 왕국의 타르콘과 동맹을 맺는다.
에트루리아인의 선조들은 소아시아의 리디아에서 건너온 것으로 알려진 만큼 트로이의 왕족이었던 아이네아스에게 우호적이었던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결국 이탈리아 정착민들과 소아시아 지역에서 건너 온 이방인 집단이 전쟁을 하는 양상이 됐다. 투르누스에게는 이탈리아 종족들이 단결하여 조국을 지켜내야 한다는 명분이 있었다. 아이네아스는 어머니의 땅에 다시 정착하라는 신의 계시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전쟁은 영웅들의 죽음을 낳는 법, 아이네아스가 동맹군을 구하러 간 사이 투르누스는 아이네아스의 아들 아스카니우스가 이끄는 트로이 진영을 포위하고 고립시킨다. 이에 포위망을 뚫고 아이네아스와 연락을 취하려 목숨을 걸고 기습했던 젊은 청년 니수스와 에우리알루스는 수많은 적병을 죽인 후 결국 전사한다.
로마의 에우안데르 왕의 아들 팔라스는 투루누스에게 죽임을 당한다. 아이네아스는 투르누스의 선봉장인 루카구스, 그리고 에트루리아의 패주(敗主) 메젠티우스를 죽인다. 맹활약하던 라티움 최고의 여전사 카밀라는 아룬스의 화살에 의해 죽는다. 카밀라의 활약은 『일리아스』에 나오는 여전사 ‘아마조네(ama-zone)’를 연상시킨다.
양군의 피해가 심각해지자 아이네아스는 투르누스와의 단독 대결로 결판을 낼 것을 제안한다. 그는 승자가 라비니아와 결혼하며, 트로이인들은 로마의 에우안데루스의 도시로 물러나고 투르누스도 물러나며 라티누스는 통치권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라티누스의 중재 하에 신들을 증인으로 삼아 아에네아스와 투르누스는 맹약을 다짐했다. 더 이상 군사들의 희생을 막으려는 아이네아스의 결단은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일대 일 대결에서 투르누스가 불리할 것으로 판단한 루툴리족이 약속을 깨고 선제공격을 함으로써 전투가 재개된다. 전투 와중에 불의의 화살을 맞은 아이네아스가 신의(神醫) 이아픽스의 치료로 회생하고, 투르누스를 추격하여 그를 죽이며 대서사시가 마무리된다. 투르누스와 아이네아스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치열한 전투, 그리고 힘과 전투력에서 밀린 투르누스의 도주와 아이네아스의 끈질긴 추격전과 간헐적인 전투 장면의 묘사가 볼 만하다. 이 대목은 『일리아스』의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전투 장면을 연상시킨다.
▲ 아이네아스와 투르누스의 대결, 아이네아스가 투르누스를 압도하는 모습이다. Luca Giordano의 17세기 작품. |
『아이네이스』는 아이네아스가 패망한 트로이의 백성들을 이끌고 피난처를 떠도는 험난한 여정을 그리고 있다. 난민의 지도자라고 볼 수 있던 아이네아스가 패망집단을 분열시키지 않고 끝까지 이끌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군사와 백성들에게 새 나라 건설의 꿈을 제시하고, 좌절과 위기에 처할 때마다 끊임없이 신이 부과한 거룩한 소명을 상기시킬 수 있었던 불굴의 의지와 리더십이 아니었을까?
아이네아스가 이탈리아에 정착할 수 있었던 힘은 그의 군사적 역량의 탁월함에도 기인하지만, 트로이 전쟁의 영웅이었던 그의 명성이 이탈리아인들에게 호의적으로 작용했던 것도 도움이 된 것 같다. 이탈리아 중남부 지역과 경쟁 관계에 있던 소아시아 지역 연고를 가진 에트루리아인들과 라티움족 가운데 세력이 미약했던 테베레 강 지역의 에우안데르의 협력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도 이들 지역이 정치적, 군사적으로 라티움 지역과 경쟁과 갈등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아이네아스는 이런 현실적 정세를 간파하고 이들과 동맹을 이끌어 낸 것은 아니었을까? 아이네아스의 판단력과 용기가 또 하나의 승인(勝因)이었던 것 같다.
나아가 자신의 딸 라비니아와 이방인이 결혼하게 되리라는 신탁의 대상이 바로 아이네아스인 것으로 판단한 라티니족의 왕 라티누스 역시 아이네아스의 이탈리아 정착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신탁이 아이네아스에게 행운을 가져다 준 것은 틀림없다.
만약 이런 신탁이 없었고 라티누스가 아이네아스에게 적대적이었다면 그의 이탈리아 정착은 더욱 험난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라티누스가 자신의 딸과 결혼할 영웅이 자신의 국가를 융성하게 이끌 것이란 신탁 때문에 아이네아스를 받아 들인 것일까? 오히려 라티누스 자신의 정세 판단에 따른 희망을 신탁으로 가탁(假託)한 것은 아닐까?
베르길리우스에 시성(詩聖)의 영예를 안긴 ‘아이네아스’
또 이런 추정을 해보면 어떨까? 기원전 13세기~12세기경의 이탈리아 반도 내의 고대 왕국들의 문물과 발전 정도는 매우 낮은 수준이었을 것이다. 당시 미케네 왕국을 중심으로 날로 발전해 나가던 그리스 문명에 비해, 이탈리아 반도 내의 왕국들은 왕권도 확고하지 않았고 국력 또한 미미한 상황에 머문 부족국가였을 가능성이 높다. 소아시아에서 건너온 에트루리아인들이 이탈리아 북서부 연안지역에 터 잡은 이래 기원전 4세기까지 이탈리아 반도에서 가장 우월한 문명을 과시하고 있었던 점이 이를 반증한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궁벽한 지역이었던 테베레 강 하구의 습지와 언덕에 BC 753년에 로마가 창건되고 이들이 BC 4세기 경 에트루리아 주요 도시를 정복하고 선진 문화를 흡수하면서부터 비로소 번성하기 시작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 한다. 따라서 로마가 건국되기 500여년 전의 라티움 지역의 왕국들의 문화 수준과 국력이 더 없이 빈약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라티니족이 이아네아스를 받아들인 것은 어쩌면 당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물과 뛰어난 군사력을 갖고 있던 그리스 미케네 문명을 위시한 전 그리스 동맹군과 대적했던 트로이의 선진 문물과 군사력을 받아들여 힘을 키우려던 전략적 선택이 아니었을까?
아이네아스의 유랑과 로마의 건국 사이에는 500여년의 시간 간격이 있다. 엄격하게 볼 때 직접적인 건국의 아버지라고 보기 어려운 트로이 인들을 로마 건국의 시조로 찬미하게 한 것도 자신들의 뿌리를 돋보이게 하려던 의도가 아니었을까?
『아이네이스』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베르길리우스의 창작물이다. 고대의 구전을 정리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나 『오디세이아』와 달리 『아이네이스』는 전해지는 몇몇 신화와 설화를 엮어 로마 건국의 대서사시로 창작해 낸 것이다. 따라서 작품 속에 다분히 로마인들의 희구와 자부심을 가득 담을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어찌됐든 결과적으로 로마인들은 베르길리우스의 덕분에 영웅 아이네아스를 얻었고 로마 건국의 영광스런 신화를 갖게 되었다.
베르길리우스가 이 작품을 쓰는데는 무려 11년이 걸렸다. 그러고도 완성하지 못했던 이유는 이야기의 전후 관계를 치밀하게 구성하려 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구전을 정리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상력에 의한 창작 활동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암곰처럼 시행(詩行)들을 거칠게 낳아 그것을 혀로 핥아서 예쁘게 모양을 내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을 만큼 퇴고(推敲)에 철저한 작가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만족하지 못하여 죽으면서 이 작품을 불태워 버릴 것을 유언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이 작품의 가치를 간파하고 즉시 출간토록 했다. 세계의 제국이 된 위대한 로마에 걸 맞는 신의 계시와 영웅적 스토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후 이 작품은 로마를 이해하기 위해 읽어야할 전범(典範)이 되었다. 베르길리우스는 시인으로서 큰 명성을 얻었고 “사후에는 거의 미신적인 명성”을 누리게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시성(詩聖)의 대우를 받았다. 이만큼 그의 작품이 서양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말해준다.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 ☞추천도서 :『아이네이스』, 베르길리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숲(2012, 4쇄), 60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