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상준 기자] ‘세계경영’ 신화의 주인공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지난 9일 별세했다.
1967년 열 평 정도의 작은 사무실에서 시작된 대우그룹은 김 전 회장의 긍정적인 사고와 열정으로 급속한 성장을 이뤘고, 한때 재계 2위의 황금기를 누리기도 했다.
세계경영을 외치던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넘치는 열정으로 일하던 대표적인 기업인이다. / 사진=대우그룹
그러나 대우그룹은 창사 30여 년 만에 닥친 외환위기에 공중분해 되듯 무너졌고 현재는 그룹이 쪼개져서 ‘대우’라는 이름만 남았다.
31살 청년 김우중은 1967년 3월22일 ‘대우실업’ 이름을 내걸고 셔츠 원단을 동남아시아에 수출하며 사업을 성장시켰다. 김 전 회장의 적극적인 영업과 정부의 수출진흥정책이 시너지 효과를 내며 대우실업은 급속 성장했다.
김 전 회장은 대한민국의 고도성장기에 발맞춰 인수·합병을 통해 ‘계열화·다업종’의 틀을 마련하며, 대우그룹의 토대를 구축했다.
1973년 대우는 대우기계, 대우건설 등 10여 개의 계열사를 인수하며 몸집을 불렸고, 1976년에는 대우조선을 토대로 대우중공업이 완성됐다. 또한 1978년 새한자동차 인수를 바탕으로 1983년 대우자동차를 출범하기도 했다.
김 전 회장은 1974년 대우전자를 설립한 이후 꾸준한 관심을 기울이며 대우전자를 그룹의 주력으로 키웠다. 이를 바탕으로 창사 15년 만에 고도성장한 대우실업은 1982년 기업명을 ㈜대우로 바꾸고 그룹 회장 제를 통해 그룹 형태의 기틀을 갖췄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대우자동차 티코와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 사진=대우그룹
1990년대에도 대우그룹은 성장 위주의 기업 전략을 이어갔다. 1993년에는 폴란드 자동차 공장을 인수하며 동유럽 시장을 본격적으로 개척했다. 또한 1997년 외환위기 직전에는 쌍용차를 인수하기도 했다.
대우그룹은 1998년 41개 계열사를 바탕으로 삼성·LG를 넘어 재계 2위 대기업이 되기도 했다. 임직원 수가 30만 명이 넘었으며, 해외사업장에서 근무하는 직원만 22만여 명에 달하는 글로벌 기업의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했다.
거칠 것 없이 사업을 확장하던 대우그룹은 외환위기를 맞이하며 급격하게 추락하기 시작했다.
대우그룹은 외형확대 위주의 기업 경영으로 내실을 다지지 못했고, 빚을 내면서까지 과도한 투자를 한 탓에 ‘차입경영’ 부문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됐다.
특히 외환위기로 국가신용등급이 하락하자 해외 채권자들이 상환 압박을 시작했고, 그 결과 해외 자산가치의 추락이 시작됐다. 사면초가에 놓인 대우그룹은 1998년 12월 계열사를 10개로 감축하는 구조조정을 발표했지만 고난은 계속됐다.
1999년 8월 주요 계열사 ‘워크아웃’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 대우그룹은 절체절명에 위기에 놓였다. 결정적으로 2000년 수십조 원에 달하는 분식회계가 적발되며 회생 불가의 길을 걷게 됐다.
대우그룹은 한국경제 고도성장기의 주연으로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부실경영·분식회계는 국가 전체의 위기를 초래하게 했다. 김 전 회장의 영면과 동시에 대우그룹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미디어펜=김상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