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민주주의체제의 보편화
▲ 좌승희 미디어펜 회장
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경제적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모순된 체제라 했다. 그래서 모두가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기위해 무산자의 혁명을 통해 공산주의, 사회주의 체제로 전환할 것을 주창하였다. 그래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인류의 절반가까이가 모두가 평등해 질 수 있다는 사회주의체제를 지향하였으나 40 여년의 실험 뒤 이제 북한을 빼고 모든 사회주의 체제가 실패하였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를 통해 선진화를 이룬 나라들은 지난 30~40년 동안 칼 마르크스가 지적한 자본주의의 모순인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겠다는 생각으로 수정자본주의 혹은 복지국가를 지향해 왔으며, 이제 오늘날 서구의 선진국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소위 사회민주주의라는 새로운 형태로 경제평등의 이념을 실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사회민주주의란 칼 마르크스적인 무력혁명이 아니라 민주적 방식에 의해 경제평등을 달성하겠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그 동안 후진국들마저도 일인 일표의 민주주의체제하에서 사회 민주주의적 정책체제를 지향하는 나라들이 늘어나고 있다. 한국마저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지난 20~30년 동안 이미 사회 민주주의적 요소를 경제사회정책 여러 곳에서 실험해 왔으며, 최근에는 노골적으로 경제평등을 지향하는 정책들을 좌·우파정당에 관계없이 모두 경쟁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제 우리 모두는 칼 마르크스의 제자가 되었다.
이렇게 보면 이제 경제적 평등이라는 사회주의적 이상은 칼 마르크스이후 공고하게 인류의 지배적 이념, 혹은 세계관으로 자리 잡은 듯하다. 자본주의가 모순된 체제라는 생각은 이제 일류의 보편적 이념이 된 듯하다. 그래서인지 자본주의를 더 평등한 체제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저서들이 항상 인기 있는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
그런데 전후 60년을 회고해 보면 이러한 인류의 경제평등을 위한 꾸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이제 더 정체되는 경제성장과 더 악화된 경제적 불평등, 최근 유행어로 경제양극화, 그리고 일자리부족으로 삶은 더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일부에서는 이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때문이라 하지만 실상은 모두가 바로 그 자본주의를 바꾸거나 청산하고 보다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를 위한 정책을 추진한다고 애를 써 온 것이 지난 20세기 후반이 아니었든가?
지난 반세기야 말로 민주주의가 끝없이 신장되면서 국가가 국민의 생활을 책임진다고 나서서, 재분배정책을 통한 복지제도의 확충으로 경제적 평등을 달성하고자 매진해온 것이 아니었든가? 도대체 인류는 이제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
시장은 경제적 차별을 통한 동기부여장치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시장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는 시장은 무엇인가? 시장은 경제적 차등과 차별을 만들어 냄으로써 이를 통해 동기를 부여하는 장치이다. 이루어낸 성과에 따른 차등과 차별이 없이 일할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길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에 대해 성적을 차등하지 않고 모두를 다 공부 열심히 하게 할 방법은 없다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동기부여는 경제발전의 필요조건이다. 이러한 시장의 경제적 차별화기능 때문에 시장에 참여하는 모두는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시장은 그래서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소비자들은 좋은 제품과 서비스를 공급하는 기업을 골라 이들에 열심히 구매력(돈)으로 투표한다. 그래서 경제적 차등을 만들어낸다. 중소기업을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시장에서는 대기업의 제품을 더 사랑하는 것이 시장의 현실이다. 이렇게 해서 훌륭한 기업에의 경제력집중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은행은 돈을 잘 버는 기업과 개인에게만 더 싼 금리로 더 많은 자금을 지원하는 장치이다.
정치인이나 학자, NGO들은 돈을 잘 못 버는 어려운 기업과 개인에게 더 많은 대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경제현실은 은행이 이와 반대로 일을 잘해야 예금자나 국민경제에도 도움이 된다. 그래서 은행도 잘 하는 기업과 개인들을 더 선호함으로써 경제력 집중에 기여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증시 투자자들은 항상 잘하는 기업의 주식만을 선호한다. 그래서 잘하는 기업에 더 많은 자금을 공급하여 경제력집중을 조장하는 셈이다. 또한 훌륭한 인재들은 좋은 기업만을 선호한다. 기업도 또한 차별적으로 좋은 인재와 제휴기업을 선택한다. 강한기업에 선택된 인재와 제휴기업은 미래를 보장받는다. 그래서 학생들은 스펙을 쌓느라 애를 먹기도 하는 것이다.
이래서 시장에서 우리 모두는 이성적으로 원하든 않든 결국은 훌륭한 경제주체를 선택하여 자원을 집중시킴으로써 경제력 집중과 더 나아가 경제적 불평등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경제발전은 어디서 오는가? 바로 이러한 경제적 불평등, 즉 경제적 차등과 차별을 통해 모두를 동기부여하여, 더 열심히 부의 창출에 나서도록 유인함으로써 경제발전이 가능해지는 것이며 시장이 바로 이런 기능을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란 바로 이런 시장의 자연스러운 진화결과이며 따라서 이 세상이 아름답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항상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경제적 불평등은 아름답지는 않지만 시장의 변화를 지속시키는 필요조건이다. 그러니 경제적 불평등이 없이는 경제역동성도 부의 창출노력도 이끌어 낼 수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 셈이다. 칼 마르크스는 경제적 차등을 없애 동기부여가 없어져야 모두 잘사는 행복한 사회가 된다고 한 셈이니 이 세상의 이치를 잘못 본 셈이다.
양극화는 모두 가난해지는 하향평준화 과정이다.
그동안 인류는 경제적 평등이라는 정치적 이념에 따라 시장의 동기부여기능을 차단하는 일을 열심히 하면서 경제발전을 바라고 부유한 삶을 기원해 온 셈이다. 지금 인류가 부딪치고 있는 많은 경제문제들, 특히 양극화의 문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문제라기보다는 경제평등주의 이념을 추구해온 민주주의정치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시장이 경제적 차등을 초래하기 때문에 불완전하다고 하여 이를 인위적으로 보다 평등한 사회로 바꿔보겠다는 민주정치의 노력이 오히려 조그만 차이를 더 크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동기부여가 안 되는 사회, 즉 경제적 차등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는 경제정체를 피할 길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2:8이니 1:9니 하는 “양극화”는 경제평등을 추구하는 민주주의 정치 하에서 경제정체로 인해 모두가 가난해지는 과정으로 오히려 경제의 “하향평준화”현상이라고 불러야 옳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는 악이고 민주주의는 선이다?
그동안 인류는 자본주의 경제, 즉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경제적 불평등을 가져오기 때문에 악이고 민주주의는 평등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선이라며 하느님처럼 믿어 왔다. 그러나 경제적 평등을 추구해온 민주주의는 오히려 가난의 보편화에 기여하고 있지 않은가?
이제 던져야 할 질문은, “그럼 모두가 같아지지는 않지만 모두의 발전을 가져오는 자본주의 시장은 악이고 모두가 평등하지만 모두를 가난하게 만드는 평등지향 민주주의는 선인가?”라는 질문이다. 오히려 지금은 “자본주의 x.0” 이라 하여 또다시 우리의 삶의 현장을 평등주의적 이념의 잣대로 제단하려 할 것이 아니라, 민주정치가 그동안 초래한 경제적 왜곡과 불평등의 심화현상을 풀어내기 위해 “민주주의 x.0” 을 고민해야 할 때는 아닐까? 이에 대한 답도 인류의 미래를 위한 선택도 결국은 각자의 몫이 아니겠는가. 선택에 따른 결과 또한 각자의 몫이어야 함은 물론이다. /좌승희 미디어펜 회장, KDI 국제정책대학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