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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의 삼성 “절정 다다른 대한민국 제조업 산증인”

2014-09-30 08:27 | 김규태 차장 | suslater53@gmail.com
   
▲ 김정호 프리덤팩토리 대표

이건희 회장과 정몽구 회장, 두 사람의 공통점은 무얼까.

첫째, 세계 초일류의 제조업 회사를 일구어낸 경영자라는 점이다.

두 번째는 장남이 아니었으며, 창업자인 아버지로부터 그룹 총수의 권한을 물려받는 것이 애초에 예정된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결국 그룹 총수로서 그 역할을 다하게 된다.

오늘은 제조업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한다.

우리나라의 평균 소득이 2만5천불인데, 지역별로는 8만불, 9만불의 소득을 올리는 지역이 있다. 바로 울산이다. 이에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울산에 위치한 각종 제조업의 산업 기반과 경쟁력이 세계 최고 수준이기 때문에, 울산 지역의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는 수많은 근로자들은 세계 최고의 근로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3대 제조업은 전자산업, 자동차산업, 석유산업이다. 오늘은 우리나라 3대 제조업의 주역, 3명에 대해서 나누려고 한다. 이건희, 정몽구, 최종현 3인이 바로 그들이다. 오늘은 글로벌 시장을 활용한 우리나라의 기업가들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둔 3인에 대하여 얘기하려 한다.

   
▲ <대한민국 기업가열전>제 10강, ‘제조업 절정에 달하다’의 전경 

글로벌 시장을 호령하는 기업이 월드베스트 수준에 올라있냐를 판가름하는 가장 명확한 척도는 해당 기업의 글로벌브랜드 인지도 및 그 가치이다. 매년 인터브랜드(Interbrand)라는 브랜드 컨설팅 그룹에서 세계 100대 베스트 브랜드를 꼽는다.

가장 최근의 기준인 2013년 인터브랜드의 세계 100대 브랜드 기업 발표에, 우리나라 기업의 브랜드는 3개가 들어가 있다. 8위인 Samsung(삼성전자), 43위인 Hyundai(현대자동차), 93위인 Kia(기아자동차) 등으로 모두 제조업이다. 우리나라의 지난 수십년 간의 산업화를 이끌어 온 가장 큰 주역이 제조업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먼저 삼성전자를 지금의 위치로 끌어올린 이건희 회장의 이야기이다.

1987년 이건희 회장(이하 이건희)은 작고한 이병철 창업주(이하 이병철)로부터 삼성의 경영권을 물려받게 된다. 6년의 시간이 흐르고, 1993년 어느 날,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고 했던 삼성 이건희의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이 세간에 알려진다. 그 이후 삼성에게는 어마어마한 변화가 일어난다. 이는 삼성뿐만 아니라 한국경제, 한국기업에 대한 급격한 변천이기도 했다.

   
▲ 이건희회장의 경영 화두와 삼성그룹의 변화 

1993년 이건희의 신경영 선언 이후, 삼성의 가치 확대는 2012년까지 20년간 연매출 29조원에서 380조원, 세전이익은 8천억에서 39.1조원, 시가총액은 7.6조원에서 338조원에 이르게 된다. 인력은 14만명에서 42만명으로 3배로 증가했지만, 삼성이 만들어내는 부가가치는 수십 배에 이르게 됨으로써 생산성의 급신장을 이루게 된다.

이건희 회장은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집에 있으면 부인 홍라희 여사와 함께 5분도 대화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집에서 혼자 비디오를 보거나, 책을 보거나, 애완동물과 함께 지낸다고 한다. 사람과 소통하기 보다는 동물과 소통하기를 즐겨할 정도이다. 이는 어릴 때부터 가족들과 함께 말할 기회가 많지 않았음에 연유한다고 한다.

   
▲ 삼성 창업주 이병철회장과 현 이건희회장은 메기효과를 강조한다. 논에 미꾸라지만 풀어놓으면 비실비실해지고, 생산량도 미약하지만, 천적인 메기를 풀어놓으면 미꾸라지도 튼실해지고, 메기도 더욱 많아지는상생의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경쟁의 중요성를 강조하는 비유다. 사진은 이병철회장 생전의 모습. 

어릴 무렵 이건희는 아버지 이병철과는 물론이고, 어머니와도 얘기를 많이 나눌 시간이 없었다고 한다. 1938년 삼성상회를 경영할 당시 만주와의 교역 사업은 물론이고 국수사업까지 함으로써 부모 모두 사업에 매진하느라 바쁜 시기였다. 이로 인하여 어린 이건희를 의령의 친척집에 맡겨서 온가족이 함께 살았던 시간이 짧았다고 한다.

“나는 가정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것이 이건희의 솔직한 고백이다. 어린 이건희는 초등학교 5학년 시절, 일본에 가서 공부하기까지에 이른다. 나이 차가 컸던 형들과도 함께 긴 시간을 보낸 적도 없었다. 이건희 회장은 말이 없었으며, 어린 시절 혼자였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건희는 고등학교 입학 후 힘이 장사였다는 이유와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고등학교 레슬링 부에 들어가게 된다. 사람들과 살을 맞대면서 함께 부대끼는 레슬링 부 시절, 이건희는 살아가면서 가장 재미있다고 느꼈던 시간을 거기서 보내게 된다. 최초의 인간적 관계랄까, 사람들과 사귈 유일한 기회이기도 했다. 이는 수십년의 세월이 흘러, 이건희 회장이 한국레슬링협회장으로 임하며, 한국 레슬링의 발전에 일임을 담당했던 이력과도 연결된다.

   
▲ <대한민국 기업가열전>제 10강, ‘제조업 절정에 달하다’의 전경 

시간이 흘러 이건희는 성년이 되었다. 그런데 아버지 이병철은 이건희에게 그룹의 경영권을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니는 기업은 안 맞다. 매스컴(중앙일보, 동양방송)이나 해라!”라고 아들 이건희에게 얘기할 정도였다.

여기서 기업이란 공장을 운영하는 제조업을 뜻했고 당시 이병철의 입장에서 기업의 구체적인 모습은 제일제당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병철에게 있어서 언론은 기업이 아니었다. 그렇게 이건희는 (기업이 아니라고 치부되는 곳에서 일을 하라는 아버지의 방침대로) 1966년 동양방송 이사로 삼성에 입사하게 된다. 이건희는 동양방송 방송국에서 드라마 편성하는 것을 담당했다.

하지만 이건희가 동양방송에 입사하던 1966년, 삼성의 기업사에 두고두고 치욕이 되는 ‘사카린 밀수사건’이 일어난다. 박정희 주도의 군부세력 정치자금 및 정계와의 관계로 인해 일어난 사건이었지만, 이에 대한 책임은 정치인들이 아니라 ‘삼성’만 지게 된다.

이로 인하여 당시 이병철 회장은 책임지고 경영 일선에서 사퇴하게 된다. 물론 표면적으로 뒤로 물어난 것이었고, 회사 밖에서 보기에는 맏아들 이맹희 씨(이하 이맹희)에게 경영권이 넘어가게 된다.

그런데 1966년 경영권을 물려받은 이맹희가 요즘 말로 ‘오버’하게 된다. 회사를 좌우하는 권력이 자신에게 있다고 여기고, 본인이 직접 경영 전반을 좌우하려고 나서게 된 것이다.

여기에 둘째 아들 이창희씨(이하 이창희)가 삼성과 관련된 좋지 않은 얘기를 갖고서 청와대에 투서하는 사건까지 발생하게 되었고, 이 사실은 이병철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하여 이병철은 맏아들 이맹희와 둘째 아들 이창희에 대한 기대를 접게 된다.

이병철은 경영권을 맡고 있던 이맹희를 불러, “니 직책이 몇 개고. 벅찬게 많제. 니가 뭐 하고 있는지 다 써갖고 와라”라고 얘기했으며, 직책을 써갖고 온 이맹희에게 이병철은 “이것도 빼고 저것도 빼고”라고 하면서 결국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종용했다.

둘째 아들 이창희를 불러서는 “다시는 안 볼테니 나가라”라고 갑작스레 얘기를 하게 되고, 그 직후 이창희는 개인짐도 제대로 못 챙기고 멕시코로 가게 된다.

   
▲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이맹희 제일비료 회장 

이후 1973년, 이병철은 “맹희도 안되겠고 창희도 안되겠다. 건희 니가 해야겠다”라며, 후계자로 지목한 이건희에게 경영자 수업을 시킨다. 그런데 이병철의 후계자 교육방식은 여러모로 독특했다.

회장실 바로 옆에 작은 사무실을 하나 주고, 거기서 이건희에게 우리나라의 모든 신문에서 삼성과 관련된 기사를 스크랩하고 정리해서 이병철 자신에게 주는 것이었다.

이처럼 그룹의 후계자에게 회사신입사원이나 할 법한 일만 시키던 이병철은 이건희에게 글씨를 하나 써주었다. ‘호암’이라는 글자였다. 이병철 자신의 호이기도 했던 호암은 “잘 들으라”는 중의적인 의미를 담기도 한다.

이병철 회장실에 있던 그림은 일종의 자화상 ‘목계’이다. 목계라는 격언의 뜻은 “싸우지 않아도 상대방들이 스스로 도망간다”이다.

이병철 회장실에 걸려있던 ‘목계’ 자화상의 의미, 호암의 중의적인 뜻을 되짚어 보건데, 이건희에게 구체적으로 뭘 시킨 적이 전혀 없었으며 단지 삼성과 관련된 모든 소식만을 관찰하고 접하도록 했던 이병철의 교육 방침은, 침묵하고 경청하는 지혜를 젊은 이건희에게 심어준 것이라 여겨진다.

이건희는 그룹의 후계자였지만, 그에게 실권은 전혀 없었으며 아버지의 경영 전반을 따라다니면서 보고 듣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건희(당시 부회장)의 뜻을 이병철(당시 회장)이 처음으로 받아들인 일이 1982년 일어난다. 반도체사업에 투자를 하기로 결정했던 일이었으며, 이건희 부회장은 자신에게 있던 지분 모두를 투자하여 한국반도체를 인수하게 된다. 당시 한국반도체는 전자시계 회사에 불과했다. (이야기는 다음 칼럼으로 이어집니다.)

   
▲ <대한민국 기업가열전>제 10강, ‘제조업 절정에 달하다’의 전경 

 

김정호의 프리덤팩토리, 이번 이야기는 프리덤팩토리와 자유와창의교육원이 함께 기획하여 제공하고 있는 강의시리즈, <대한민국 기업가열전>의 제 10강, “제조업 절정에 달하다”의 강연 일부를 김규태 미디어펜 연구원이 요약 정리한 것이다. <대한민국 기업가열전> 제 10강은 29일 여의도 전경련 컨퍼런스 센터 다이아몬드홀에서 열렸다.

‘자유와창의교육원’은 6월 26일(목) 시장경제교육의 진흥을 목적으로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에서 개원하였다. 자유와창의교육원은 우리 사회의 오피니언리더와 일반 시민들의 경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경제의 기본원리에서부터 한국경제발전사, 기업의 이해, CEO 특강 등 다양한 테마를 주제로 교육하고 있다.

시민주주 731명의 참여로 시작한 주식회사 형태의 민간씽크탱크 ‘프리덤팩토리’와 마찬가지로, 자유와창의교육원은 우리 헌법의 기본정신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본 가치로 삼고 있다. 그동안 전경련 차원의 교육이 군, 경찰, 교사, 공무원, 법조인, 언론인 등에 한정된 측면이 있었지만, 동 교육원 개원을 통해 기업체 임직원은 물론 일반시민, 대학생, 청소년까지 교육의 폭을 넓힐 계획이다. 교육 내용도 시장경제 원리, 한국경제 발전사, 기업의 이해, 창업가 열전, 경제현안 이슈 등이 공통 과목으로 구성되는데, 그동안 이렇게 시장경제와 관련된 내용을 전문적이고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곳이 없었다는 점에서 개원의 의미가 있다.

송병락 서울대 명예교수가 초대 원장을 맡았으며, 교수진도 다양한 분야에서 초빙했다. 이승훈 서울대 명예교수, 안재욱 경희대 교수를 비롯하여, 박재완 前기재부 장관, 손길승 SK텔레콤 명예회장, 김현준 삼성 전무, 김명환 GS칼텍스 부사장 등이 주요 교수진으로 참여한다. 전현직 CEO들이 교수진으로 참여해 기업 현장의 목소리를 전달함으로써 우리 사회에 기업과 기업인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이론과 실제가 접목되는 ‘살아있는 교육’을 진행할 계획이다.

자유와창의교육원의 첫 강의는 7월 7일(월) 시작한다. 김정호 프리덤팩토리 대표(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가 ‘대한민국 기업가열전’이라는 주제로 매주 월요일 저녁 7시부터 약 두 시간 동안 진행하며, 총 13주차로 구성되었다. 김 대표는, 1세대 기업가인 ‘인삼 상인 임상옥’부터 ‘이병철, 구인회, 정주영’ 등을 거쳐 ‘SM 이수만, YG 양현석, JYP 박진영’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기업가들의 파란만장한 스토리를 펼친다. 대학생 및 일반인 누구나 참여가능하며, 신청은 www.fki.or.kr에서 가능하다. 참가비는 학생 1천원, 일반인 5천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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