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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격호 별세] 껌으로 시작해 재계 5위 롯데 일군 신격호 명예회장이 걸어온 길

2020-01-19 18:29 | 김영진 부장 | yjkim@mediapen.com

19일 별세한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사진=롯데그룹

[미디어펜=김영진 기자] 롯데그룹의 창업주인 신격호 명예회장이 19일 오후 4시 29분 향년 9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신 명예회장의 별세로 '창업 1시대 경영인'시대는 막을 내리게 됐다.  

신 명예회장은 식민지시대에 일본 유학 중 소규모 식품업으로 출발해 한국과 일본 양국에 걸쳐 식품·유통·관광·석유화학 분야의 대기업을 일궈낸 자수성가형 기업가이다.

일본에서 기업가로 성공한 신 명예회장은 한·일 수교 이후 한국에 대한 투자의 길이 열리자, 1967년 롯데제과를 시작으로 호텔롯데, 롯데쇼핑, 호남석유화학(현 롯데케미칼) 등을 잇달아 창업하거나 인수하면서 롯데그룹을 재계 5위의 대기업으로 만들었다.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의 젊은 시절./사진=롯데그룹

신격호 명예회장이 걸어온 길

신 명예회장은 1921년 10월 4일(음력) 경남 울산 삼남면 둔기리에서 5남5녀의 맏이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에 배움을 열망하던 청년 신격호는 1942년 부관 연락선을 타고 도일하여 신문과 우유배달 등으로 고학생활을 시작했다. 남다른 부지런함으로 외지에서 문학도의 꿈을 불태우던 청년 신격호는 '조선인'이라는 불리한 여건을 성실과 신용으로 극복하고, 평소 그의 성실성을 눈여겨 보아온 한 일본인 투자자의 출자로 1944년 커팅 오일을 제조하는 공장을 세움으로써 기업 경영인으로서의 첫발을 내 딛게 된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본격적으로 공장을 가동해 보지도 못한 채 문을 닫게 되는 등 숱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뛰어난 안목, 신용과 성실성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도전해 오늘날의 롯데 신화를 창조해 냈다.

신 명예회장이 얼마나 신용을 중시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신 명예회장은 일본에 건너가 우유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학을 했는데, 비가 오나 눈이오나 어떤 경우에도 우유 배달시간이 워낙 정확해 유명했다고 한다. 소문이 나다 보니 주문이 늘어나 배달시간을 못 맞추게 되자 신 명예회장은 자기가 직접 아르바이트를 고용했다고 한다. 배달 시간을 정확히 맞추기 위해 아르바이트가 아르바이트를 고용한 것이다.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롯데제과 공장을 둘러보는 모습./사진=롯데그룹

이러한 신 명예회장의 신용과 성실성을 지켜본 '하나미쓰'라는 일본인이 사업을 해볼 것을 제의하며 당시 돈 5만 엔을 선뜻 내 주었다. 이 돈으로 첫 사업을 시작했는데, 미군기의 폭격으로 공장을 가동해 보지도 못하고 전소되고 만다. 어렵게 재기를 했으나 다시 폭격을 당해 전소되어 버렸다. 그래도 하나미쓰의 신 명예회장에 대한 신뢰는 변함이 없었다고 한다. 신 명예회장은 이후 재기에 성공해 1년 반 만에 이 돈을 모두 갚고 고마움의 표시로 하나미쓰에게 따로 집을 한 채 사 주었다고 한다. 

롯데의 탄생...진정한 사업가의 길에 들어서

1940년대 초 20대 초반의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팔이, 우유배달 등의 일을 하면서 일본 와세다 대학까지 고학했던 청년 신격호는 첫 사업이 폭격으로 공장이 전소되는 시련을 겪지만 허물어진 군수공장에서 비누를 만들어내면서 진정한 사업가의 길에 들어선다. 

워낙 물자가 부족한 시절이라 1년도 채 안되어 적지 않은 돈이 들어온다. 사업가 신격호의 타고난 재능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건 바로 이때부터다. 미군이 일본에 주둔하자 껌이 일본에서 갑자기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청년 사업가 신격호도 타고난 사업 감각을 발휘해 껌 사업에 뛰어든다. 워낙 껌이라면 없어서 못 팔던 시절이라 당시 신 명예회장은 큰돈을 번다. 그는 드디어 자본금 100만 엔, 종업원 10명의 법인사업체를 만들게 된다. 이때 회사 이름 '롯데'가 탄생한다. 문학에 심취했던 청년 신격호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이름에서 롯데라는 이름을 따온다. 신 명예회장의 감수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천재적 마케팅 감각

서구문명의 상징인 껌에 일본 성인들은 비난을 퍼부었지만 신 명예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당시 일본에서 껌의 핵심 타깃은 바로 어린이라는 점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롯데는 풍선껌 사업을 강화해 아예 풍선껌을 작은 대나무 대롱 끝에 대고 불 수 있도록 풍선껌과 대나무 대롱을 함께 포장했다. 당시에는 변변한 장난감이 없던 터라 롯데의 풍선껌은 그야말로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껌이라는 상품자체가 식품이라기보다는 심심한 입을 즐겁게 해주는 장난감이라는 제품의 핵심가치를 간파한 것이다.

이벤트와 미디어로 소비자의 눈길을 끌어당긴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껌 포장 안에 추첨권을 놓고 당첨된 사람에게 1000만 엔을 준다는 광고를 내놓기도 했다. 결과는 롯데 껌을 사기 위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상점 앞에 길게 줄을 서게 만든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기발한 마케팅 기법을 고안해내고 자신 있게 밀어붙인 사람은 바로 신 명예회장 본인이었다. 신 명예회장의 천재적 마케팅 감각은 경영학 강의와 교재에서 도움을 받았다기보다는 그의 감수성과 창의성에서 나온 것이다. 

1961년 신 명예회장은 일본 가정에서 손님 접대용 센베이가 초콜릿으로 대체될 기미가 보이자 초콜릿 생산을 결단한다. 초콜릿 산업은 과자 사업 중에서는 중공업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만큼 제조방법이 까다롭다는 얘기다. 

신 명예회장은 유럽에서 최고의 기술자와 시설을 들여오면서 초콜릿 시장을 장악하고 이것이 롯데가 종합메이커로 부상하는 밑거름으로 된다. 이후 롯데는 캔디, 비스킷, 아이스크림, 청량음료 부문에도 진출해 성공을 거듭한다.

1965년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입국하는 모습./사진=롯데그룹

일본서 껌과 초콜릿 팔아 고국에 투자...1967년 롯데제과 설립

"새롭게 한국 롯데 사장직을 맡게 되었사오나 조국을 장시일 떠나 있었던 관계로 서투른 점도 허다할 줄 생각되지만 소생은 성심성의, 가진 역량을 경주하겠습니다. 소생의 기업 이념은 품질본위와 노사협조로 기업을 통하여 사회와 국가에 봉사하는 것입니다." (1967년 한국 롯데제과 설립 당시 신격호 롯데회장 인사말)

일본에서 사업을 일으킨 신 명예회장의 꿈은 조국 대한민국에 기업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신 명예회장은 기업보국 이라는 기치아래 폐허의 조국 어린이들에게 풍요로운 꿈을 심어주기 위한 계획에 착수해 한·일 수교 이후 한국에 대한 투자의 길이 열리자, 1967년 롯데제과를 설립해 모국투자를 시작하였다. 

롯데제과에 이어 롯데그룹은 1970년대에 롯데칠성음료와 롯데삼강(현 롯데푸드)으로 국내 최대 식품기업으로 발전했으며 롯데호텔과 롯데쇼핑을 설립해 당시에 불모지나 다름없던 국내 유통·관광 산업의 현대화 토대를 구축했다. 또 호남석유화학(현 롯데케미칼)과 롯데건설 등으로 국가 기간산업에도 본격 진출했다.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롯데호텔 설립 추진 회의를 주재하는 모습./사진=롯데그룹

1970년 관광 불모지에 대규모 호텔업 투자

'한국의 마천루!' 1973년 당시 동양 최대의 초특급 호텔로 장장 6년간의 공사 끝에 문을 연 롯데호텔에 붙여진 찬사였다. 지하 3층, 지상 38층의 고층 빌딩으로 1000여 객실을 갖춘 롯데호텔 건설에는 6년여 기간 동안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에 버금가는 1억5000만 달러가 투자됐다.

호텔 사업 구상은 신 명예회장과 롯데그룹에 대단한 모험이었다. 당시에는 산업기반이 취약한데다 국내에 외국손님을 불러올 국제 수준의 관광 상품도 개발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관광업 자체의 민간투자가 저조한데다 산업정책의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려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부존자원이 빈약한 우리나라는 기필코 관광입국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신 명예회장의 신념이었다. 이러한 신 회장의 결단으로 탄생한 롯데호텔은 2010년 러시아 모스크바에 한국 호텔로는 처음으로 해외 체인을 오픈할 만큼 성장했다.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롯데쇼핑센터(현 롯데백화점 본점) 오픈 테이프커팅을 하는 모습./사진=롯데그룹

롯데쇼핑의 탄생

한국전쟁 이후 경제개발과 국토재건 사업에 집중해온 우리 정부는 1970년대 후반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7~1981)을 진행했다. 국민소득이 향상되면서 자연스럽게 소비 욕구와 구매 패턴이 다양해졌지만, 유통업을 대표하는 백화점의 수준은 선진국에 비해 미흡했다. 

1970년대 우리나라 백화점은 대부분 영세하고 운영방식이 근대화 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격호 명예회장은 국가 경제의 발전과 유통업 근대화에 앞장서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백화점 사업에 도전하게 된다. 

롯데쇼핑센터(현 롯데백화점 본점) 건립공사는 1976년 시작해 1979년 12월에 완료됐다. 규모는 연면적 2만7438㎡, 영업면적 1만9835㎡에 지하1층, 지상 7층에 이르렀다. 이는 기존 백화점에 비해 2~3배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롯데쇼핑센터는 개점 당시부터 고객의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으며 이후 우리나라 1위 백화점의 위치를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기간산업에 투자 석유화학 산업으로의 진출

애초에 신 명예회장은 기간산업에 투자해 모국의 경제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뜻을 품고 있었다. 특히 제철사업에 관심이 많았지만, 정부가 제철사업은 국영화한다는 방침을 정하면서 이러한 희망을 접어야 했다.

이후 호남석유화학을 인수하면서 비로소 신 명예회장은 중화학 기업에의 꿈을 이루게 된다. 호남석유화학은 정부가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의 일환으로 여천석유화학단지를 조성하면서 설립한 국영기업이었다. 단지조성 후 정부는 호남석유화학을 민영화한다고 발표했고, 롯데는 공개입찰을 거쳐 1979년 이를 인수하는데 성공했다. 그해 호남석유화학은 여천단지 내 3개의 공장을 완공하고 고밀도 폴리에틸렌(HDPE), 폴리프로필렌(PP), 에틸렌옥사이드(EO)와 에틸렌글리콜(EG)의 상업생산을 시작하며 우리나라 석유화학산업을 이끌어 나가게 됐다.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잠실 롯데월드 개관식에 참석한 모습./사진=롯데그룹

호남석유화학은 케이피케미칼 등 국내 유화사와 말레이시아의 타이탄케미칼 등을 인수하며 롯데그룹 성장의 한 축으로 성장했고, 2012년 '롯데케미칼'로 사명을 바꾸고 글로벌 화학기업으로 도약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랜드마크, 롯데월드타워

서울 잠실에 테마파크를 포함한 대규모 관광위락시설 '롯데월드'를 건설하는 동안, 신 명예회장은 또 하나의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석촌호수 서호를 중심으로 건설되는 롯데월드와 함께, 석촌 동호를 중심으로 종합관광단지(당시 명칭 '제2롯데월드')를 건설해 잠실 지구를 한국의 랜드마크로서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복합 관광명소로 키워내겠다는 것이었다.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롯데월드타워 공사 현장을 방문한 모습./사진=롯데그룹

이를 위해 롯데는 1982년 제2롯데월드사업 추진 및 운영 주체로 '롯데물산'을 설립하고, 1988년 1월에는 서울시로부터 사업 이행에 필요한 부지 8만6000여㎡를 매입했다. 그리고 다음해 실내 해양공원을 중심으로 호텔, 백화점, 문화관광홀 등을 건립하겠다는 사업계획서를 서울시에 제출하였으나 일부 조건 미흡으로 반려되었다. 

이후 사업 허가를 받기 위한 지난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각종 교통, 도시계획 등의 이유로 사업계획이 잇달아 반려되었다. 단순한 백화점이나 쇼핑시설, 아파트 등을 건설하면 충분히 사업성이 있는 부지였지만, 신 명예회장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소를 짓겠다는 일념으로 제2롯데월드의 건설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2011년 지상 123층 높이 555m의 초고층빌딩을 포함하여 80만5782㎡에 이르는 '롯데월드타워' 전체 단지의 건축 허가가 최종 승인되었다. 우여곡절끝에 2014년 10월 롯데월드몰과 아쿠아리움을 시작으로 시설들이 순차적으로 오픈하였으며, 2017년 4월 3일 롯데 창립 50주년을 축하하며 초고층빌딩을 포함한 롯데월드타워가 그랜드 오픈했다. 30여 년에 걸친 신 명예회장의 집념이 결실을 맺은 순간이었다.

우리나라 최고층 건물이자 최대 규모의 쇼핑몰로 탄생한 롯데월드타워는 고용 창출 및 지역경제 활성화에 이바지하는 한편, 서울의 랜드마크로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며 국내 관광산업 활성화에 앞장서고 있다.

[미디어펜=김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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