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의춘 미디어펜 발행인 |
피케티 이론은 돈이 돈을 벌게 되므로 자본가와 부자들의 돈을 세금으로 몰수해서 불평등을 개선하자는 것이다. 지난 300년간 유럽국가를 보니 자본가들의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높았다는 것이다. 자본가들은 계속 부를 축적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계속 빈곤에 시달리다는 것이다. 이를 방치하면 자본가가 영원히 잘사는 세습자본주의가 이어질 것이라는 이론이다.
피케티가 제시한 부와 소득의 불평등 개선방안은 조세정책이다. 부자들의 최고 누진세율을 80%로 높이고, 자본에 대해서도 10%의 세금을 부과하자는 것이다. 80%소득세율은 소득의 대부분을 몰수하는 것이다. 징벌적 과세는 전세계가 동시에 실시해야 실효성을 거둔다는 주장도 했다. 특정국가만 이를 시행하면 부자들이 다른 나라로 탈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도 이런 황당한 징벌적 과세가 유토피아에 불과하다는 것을 실토했다. 그럼 왜 이런 엉터리 이론을 내놓았는가? 무책임한 선동가인가?
피케티가 한국에서 인기를 끄는 것은 좌파들의 준동 때문이다. 경제민주화로 무장한 좌파학자들과 정치인, 좌파매체들이 피케티로 장사하려는 책략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좌파들은 노무현정부이후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배척했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건설한다는 유토피아를 실현하겠다며 평등주의경제정책을 내걸었다.
노무현과 그 후계자들은 한국사회를 가진 자와 못가진자, 1%대 99%, 대기업과 중소기업, 강남과 강북 등으로 편가르기를 통해 나라와 사회를 극단적으로 분열시켰다. 삼성과 현대차 등 대기업을 각종 반시장적 규제로 못살게 굴었다. 골목상권 침해방지, 일감몰아주기규제, 금산분리, 순환출자 규제를 통한 그룹경영 발목잡기, 중기적합업종제 부활 등이 잇따라 도입됐다. 정부와 정치권, 사법부까지 민노총 등 정규직 노동귀족의 특권보호와 비정규직의 정규직 강요 등으로 대기업들의 국내 투자의욕을 상실케 만들었다.
평등주의 경제이데올로기 문제는 박근혜정부도 자유롭지 못하다. 대선에서 좌파 정책어젠더인 경제민주화를 기치로 반기업적, 반시장적인 공약들을 양산했기 때문이다.
한국 좌파들은 부의 불평등과 양극화심화, 경제력집중 확대 등을 이슈로 내걸고 있다. 이같은 문제는 친시장경제, 신자유주의에서 비롯됐다는 핑계를 대고 있다. 정글자본주의, 피도 눈물도 없는 탐욕자본주의가 양극화를 부채질한다는 것이다. 이를 해소하려면 작은 정부, 큰시장을 모토로 하는 시장경제에 재갈을 물려야 한다는 논리다.
▲ 프랑스 사회주의경제학자 피케티 열풍이 한국에서 불고 있다. 그가 쓴 <21세기자본>은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 언론계도 무분별하게 그의 극단적인 사회주의경제이론을 주목하고 있다. 부자들에게서 80%의 소득세를 부과해 양극화를 해소하자는 주장은 선동에 가깝다. 모두를 빈곤하게 만드는 위험한 이론이다. 성장이 더욱 필요한 한국경제에 극단적인 악영향을 미칠 뿐이다. |
좌파들은 양극화가 반시장적인 과도한 규제와 정부실패에서 비롯됐다는 것은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본가의 탐욕과 시장만능주의가 더 큰 문제라는 것만 부각시키려 한다.
경제민주화로 장사를 해온 좌파들에겐 피케티 이론이야말로 자신들의 편향된 이데올로기를 정당화시켜주는 것이다. 언론들도 피케티띄우기에 동조하고 있다. 시장경제창달을 모토로 내건 매일경제마저 최근 피케티를 초청해서 포럼을 개최했다.
피케티이론은 모두를 평등하게 만들자는 것이지만, 결과적으론 모두를 가난한 사람으로 만드는 사악한 이론이다. 좌승희박사(KDI국제정책대학원 초빙교수, 전 한국경제연구원장)는 피케티식의 경제평등은 빈곤의 보편화만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좌승희 등 공저, <피케티의 21세기자본 바로읽기> 참조) 그는 “피케티는 경제를 모르는 경제학기술자일뿐”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좌박사는 “좌파 경제평등주의가 신격화 혹은 도그마가 되면 오히려 도와주려는 수많은 ‘가진 것이 많지 않은’ 사람들을 더 궁핍의 나락으로 내몰 수 있음을 잊어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피케티는 마르크스의 “흥하는 이웃이 있어 내가 망한다”라는 잘못된 자본주의 이념을 실증자료를 통해 확신시키려 했다. 하지만 설득력있게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피케티 세습자본주의 폐단은 전제가 잘못된 것이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이 사회갈등의 원인이고, 사회갈등은 성장에 장애가 되므로 징벌적 과세 등 강력한 재분배정책을 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본주의 문제는 피케티가 주장하듯 자본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시장위에 군림하는 1인1표 민주주의, 평등민주주의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등민주주의에 의해 왜곡된 자본주의를 구하는 것이 더욱 시급한 과제다.
한국 좌파들이 피케티를 경제민주화의 도그마로 받들 경우 경제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줄 것이다. 압축성장과 대조적인 압축퇴보로 갈 것이 불보듯 뻔하다. 가진 자에 대한 증오와 질투, 시기심을 부채질하기 때문이다. 부자와 기업가를 괴롭히는 평등경제정책은 기업가정신을 위축시킨다. 투자와 일자리창출도 저해한다. 시장과 소비자들로부터 선택받은 대기업과 기업가들에게 과도한 세금를 물리고, 규제를 가하면 경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경제적 자유와 재산권보장이 후퇴하고, 재분배정책과 결과적 평등을 추구하면 동기부여가 차단된다. 경제발전도 정체될 수밖에 없다. 박정희의 개발연대 30년간 고도성장을 구가한 것은 열심히 일해서 성과내는 개인과 기업에게 인센티브와 동기부여를 주는 신상필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평등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정치를 경제화시킨 것도 한강의 기적을 창출한 핵심요인이다. 박정희이후의 역대정권은 경제의 정치화를 통해 평등과 분배중시 정책을 지향했다. 저성장의 기조가 그때부터 본격화했다.
피케티이론은 지금과 같은 번영을 중단하고, 농경사회로 회귀하자는 것과 같다. 성장을 멈추고, 옛날 사회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인류를 재앙에 빠뜨린 마르크스망령을 제거하는 것도 중요하다. 21세기 마르크스로 부각된 피케티의 오도된 이데올로기도 하루속히 극복해야 한다.
불평등문제는 올바른 이념과 정책에 의해서 풀어가야 한다. 일시적인 경기부양대책만으론 절대 저성장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최경환부총리가 공격적인 재정정책과 금리인하정책을 구사하고 있지만 구조적인 성장침체를 해소할 수는 없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경제민주화, 경제평등주의 정책을 고수하는 한 일본식 저성장탈출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87년 민주화바람이후 대기업 경제력집중 규제, 중소기업에 대한 1/n식의 획일적인 지원, 수도권규제및 지역균형정책, 소득재분배정책, 학교평준화정책 등 분배와 평등주의 정책이 장기간 이어졌다. 기업과 개인의 자율과 창의를 짓밟는 사회민주주의, 수정자본주의, 경제민주화가 한국경제의 역동성을 퇴화시켰다. 1인1표의 민주주의 시대를 맞아 표를 우선시하는 포퓰리즘적 정책이 난무했다.
피케티는 사회주의경제학자이다. 프랑스 사회당 올랑드대통령의 경제참모였다. 사회주의자의 시각에서 극단적인 분배와 평등어젠더를 제안한 것일 뿐이다.사회주의자학자의 그저그런 뻔한 이론을 한국에서 장사해먹으려는 좌파들이 문제다. 언론과 국민들이 좌파들의 책동에 넘어가선 안된다. 피케티의 이론인 한국경제를 압축퇴보로 이끌 뿐이다. 절대 채택해선 안되는 사악한 정책이다. 모두를 궁핍하게 만드는 급진적 사회주의이론이기 때문이다.
피케티의 80% 징벌적 과세론은 인간의 동기유발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다. 마르크스와 공산국가들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한 만큼 분배받는다는 선동을 21세기에 재현시킨 것이다. 사회주의와 공산국가들의 평등 분배정책이 얼마나 처참한 실패를 초래했는지는 지나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공산국가 북한의 실상을 보면 더욱 실감할 것이다.
경제번영은 피케티식의 평등 분배, 부자세금폭탄으로는 달성할 수 없다. 열심히 일해서 성과를 내는 개인과 기업에 대한 동기부여를 촉진하는 차별화한 경제시스템만이 성장과 번영을 이끌어갈 수 있다. 좌승희박사는 “사회주의는 불평등을 차단함으로써 모두를 평등하게 만들었으나 모두 망하는 극단적인 양극화를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 좌승희 박사가 저술한 경제서적들. 좌박사의 신국부론은 세계경제학에서 처음으로 성공한 사람과 조직에 대해 성과와 인센티브를 주는 경제차별화가 번영과 성장을 가져온다고 역설했다. 영미 주류학계가 이념과 제도를 배제한 채 진공의 경제학에 함몰돼 있을 때 좌박사는 이념과 발전제도, 기업경제의 차별화원리의 중요성을 제창했다. 좌박사의 차별화 이론은 개도국과 신흥국의 경제발전에 중요한 이론이 되고 있다. 주류경제학에 맞선 독창적이고 합리적인 경제이론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노벨경제학상에도 도전할 만한 이론이다. 한국만이 좌박사의 선구적 이론을 주목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학계와 언론계의 사대주의가 심각한 수준이다. |
성과에 미흡한, 평등한 보상은 모두로부터 성장의 유인을 앗아감으로써 일 안하는 사회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성장의 인센티브가 없는 경제는 제대로 작동될 수 없다. 획일적인 분배와 평등정책, 경제민주화는 성장과 발전에 적대적이다. 그것은 화려한 것같고, 선으로 포장돼 있지만, 결국 모두를 지옥으로 이끄는 문이다.
성과에 따른 차이와 불평등을 수용하는 경제시스템만이 다시금 성장과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 한국에서 경제민주화정책을 강화할수록 저성장과 가계부채, 양극화, 실업문제는 심화할 것이다. 양극화를 해소하겠다는 평등정책이 되레 불평등, 양극화를 심화하는 모순을 낳고 있다.
좌승희박사의 경제적 차별화이론은 이런 점에서 새삼 주목을 끈다. 좌박사는 이미 20여년전부터 성과보상과 신상필벌의 경제체제만이 번영과 성장을 가져올 곳이라고 설파했다. 2006년에 펴낸 <新국부론>(굿인포메이션, 2006년)에서 차별화정책이야말로 국부를 창출하는 패러다임임을 강조했다. 국민을 부자와 빈자, 양지와 음지, 기득권층과 비기득권층으로 나누는 것을 경계했다. 남보다 열심히 일해서 성공한 부자와 양지, 기득권층을 폄하하고, 서민과 음지, 기득권층을 무조건 우대하는 것은 발전역행적이라고 경고했다. 대한민국이 저성장의 경제위기에서 벗어나려면 평등주의국가전략에서 하루속히 벗어나야 한다고 촉구했다.
좌박사의 경제적 차별화원리는 국부를 창출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패러다임이다. 이 세상은 열심히 노력해 성공하고 발전을 이루어내는 사람을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우대하는 차별화의 장이다. 우리의 삶 자체가 차별화의 연속이다. 국민들이 스마트폰에서 갤럭시S5와 G3, 아이폰6에 열광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팬택의 베가제품도 성능은 비슷하지만, 고객들이 잘 사지 않는다. 팬택이 법정관리로 들어간 이유는 시장, 고객들이 삼성과 LG 애플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평등주의 시각에선 획일적으로 삼성과 LG 애플제품을 기계적으로 분배해야 한다. 그런데 소비자들이 이를 수용할까?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현대차 기아차가 GM과 르노삼성 쌍용차에 비해 더 팔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소비자들이 현대차 기아차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우리의 삶은 차별화의 연속이다. 시장 자체가 차별화를 이뤄가는 역동적인 장이다. 시장이란 차별자들의 집합체로서 남보다 좋은 성과를 내는 경제주체만을 우대하는 차별화의 장이다.(좌승희, <신국부론>참조)
국부창출과 국가발전을 이루려면 박근혜정부도 스스로 노력해서 성공하는 자를 우대하는 차별화원리에 주력해야 한다. 잘못된 평등주의를 혁파하지 않고는 한국경제의 선진화, 성장과 번영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경제민주화에 함몰되면 우리는 중진국 함정에 다시 빠질 가능성이 높다. 우리 모두가 바라는 선진국 진입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 만큼이나 어려워질 수 있다.
좌박사의 경제차별화원리는 이처럼 시대를 앞선 선구자의 외침이었다. 세계경제학계의 변방인 한국에서 일찌감치 평등민주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국부창출과 발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창했다. 영미 주류경제학이 이데올로기가 없는, 진공의 경제학에 빠져 있을 때 외롭게 올바른 경제제도와 이데올로기의 중요성을 개진했다. 좌박사의 경제차별화정책은 신흥국과 개도국의 경제개발에 복음과도 같은 이론이다. 주류 경제학이 놓치고 있는 기업과 경제제도, 이념의 문제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류경제학의 치명적 약점은 이념과 제도를 사상(捨象)했다는 점이다. 과학화만을 지향했다. 주류학자들은 완전경쟁시장모형만을 하느님처럼 추앙했다. 도달 불가능한 열반의 경제학, 니르바나경제학에 취했다. 완전경쟁시장 모형은 철저하게 이념과 제도를 배제했다. 현실과 괴리된 추상화한 경제모형으로 전락했다. 주류학자들은 현실의 이념이나 경제제도, 체제문제에서 해방됐다. 동일한 스승에게서 배운 제자들이 정치적 취향에 따라 우파경제학자도 되고, 좌파경제학자도 되고 있다.
좌박사는 이미 파키스탄 등 동남아 국가등에서 차별화원리를 강의했다. 개도국과 신흥국관료및 학자들의 반응도 무척 고무적이다. 개도국 경제개발에 가장 유용한 패러다임이기 때문이다. 그는 <신국부론>에 이어 <진화를 넘어 차별화로>(지평), <경제발전의 철학적 기초>(서울대출판문화원), <발전경제학의 새로운 패러다임>, <좌승희박사의 대한민국 성공경제학>, <하룻밤에 읽는 이야기 한국경제>, <명령으로 안되는 경제><진화론적 재벌론>등의 역작을 내놓았다. 한국경제의 발전경험을 바탕으로 경제번영과 성공의 발전원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책들이다. 좌박사의 책들을 읽으면 가슴이 뜨겁다. 위대한 경제사상가의 혼과 열정, 고뇌가 느껴진다. 주류경제학에 맞서 새로운 경제발전원리를 정립하려는 독창적 사상이 뿜어져 나온다.
좌박사의 차별화원리는 개도국과 신흥국의 경제발전에 중요한 가이드라인이 된다는 점에서 노벨경제학상을 받을 만한다. 그동안 노벨상은 영미의 주류경제학자에게만 주어졌다. 좌박사의 차별화이론은 주류경제학계의 니르바나적인 모순을 지적하고, 실사구시적인 경제이념을 제시했다. 세계 경제학계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발전의 원리를 이토록 제시한 이론이 있었는가? 발전을 원하는가? 그럼 경제적 차별화원리를 수용하는 길밖에 없다. 더불어 평등하게 살고 싶은가? 그러면 평등주의 길을 택하라. 그러나 성장정체와 하향평준화는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좌박사가 더욱 주목받는 이유는 또 있다. 주류경제학이 소홀히 다뤄온 기업이 경제발전역할을 제대로 조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는 ‘시장경제’라고 하기보다는 ‘기업경제’라고 할 만큼 기업의 역할이 중요함을 새롭게 제시했다. 경제학원론에는 기업부문이 없다.
한국만큼 한국학자의 선구자적 이론을 무시하는 나라가 없다. 오로지 영미 경제학자와 외국에서 활동하는 장하준같은 잡탕 한국학자를 추종하는데만 열을 올린다. 학계의 사대주의는 너무나 심각하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폴 크루그먼이나 조지 스티글리츠 등 케인지언이나 그레고리 맨큐 등만 언급한다. 시장경제진영에선 하이에크, 미제스를 떠받들고 있다. 주류경제학에 맞서는 토종경제학자의 외침에 대해선 주목하지 않는다. 박정희 압축성장을 일관되게 설명하는 것도 좌박사의 차별화경제이론이다. 자유주의학자들의 설명으론 도저히 박정희식 경제개발을 수미일관하게 설명할 수 없다.
학계와 언론의 사대주의 경향은 최근 앵거스 디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를 대서특필한 데서 잘 드러난다. 디턴 교수는 최근 <위대한 탈출>이란 책을 한국어판으로 번역 출간했다. 디턴은 이 책에서 “불평등은 경제성장의 인센티브”라는 점을 강조했다. 마침 피케티의 <21세기자본>이 좌파의 주목을 받는 상황에서 디턴교수의 불평등이론은 우파의 관심을 끌었다.
모경제신문은 디턴교수와의 와이드인터뷰를 실었다. 그의 이론은 이미 좌박사가 지난 30여년간 고민하고, 책까지 써서 제안한 경제차별화원리와 대동소이하다. “성장은 빈곤과 결핍에서 탈출시키는 원동력이다.” “불평등은 성장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또다른 성장과 진보를 이끌어낸다.” “한국에서 사회적으로 분배요구가 성장욕구보다 커진다면 과거를 돌아봐야 할 것이다.”
디턴교수의 이같은 주장은 좌박사가 차별화원리를 통해 일찌감치 한국사회에 던진 화두다. 이를 제3세계와 개도국등에 전수하기도 했다. 신흥국에선 좌박사의 차별화원리에 경청하고, 주목하는데, 유독 한국에선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있다.
우리가 우리학자를 존중하지 않으니, 주류학계가 어떻게 주목할 것인가? 주류경제학의 문제점과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한 좌박사의 차별화원리는 다시금 재평가받아야 한다. 경제학계도 마냥 영미학자들만 추종하지 말고, 토종을 제대로 예우하고, 평가할 줄 알아야 한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를 배출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 언론계의 자성도 필요하다. 꼭 미국의 유명대학 교수라야 대서특필한다.
좌박사의 차별화이론이 영미학계에 번역돼 제대로 소개되면 큰 반향이 울릴 것이다. 주류경제학에 충격을 줄 수 있다. 한국학자의 위대한 이론에 귀를 기울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미디어펜=이의춘 발행인 jungleele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