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관사 대웅전 [사진=미디어펜]
구름정원길은 불광동 북한산생태공원에서 진관생태공원 앞까지, 5.2km 구간이다.
또 이어지는 9구간 ‘마실길’은 동네 이웃집에 놀러간다는 뜻의 ‘마실’이란 이름이 붙었다.
‘은평뉴타운’과 인접한 걷기에 전혀 부담 없는 평지 길로, 초입에서 은평구 보호수인 느티나무와 은행나무들을 볼 수 있는데, 특히 마을을 지키는 ‘당산나무’ 격인 느티나무는 높이 15m, 둘레는 3.6m가 넘으며 아름드리 가지를 뻗고 있다.
특히 북한산의 대표 계곡 중 하나로 꼽는 진관사(津寬寺) 계곡과 삼천사(三川寺) 계곡을 품고 있어, 찾는 사람들이 많다.
구름정원길이나 마실길은 국립공원관리공단이 붙인 이름이다. 필자도 꼭 그렇게 부를 필요가 있을까. 더욱이 오늘 걸을 길은 두 구간이 겹쳐있어, 한 구간 명칭으로 부르기도 어렵다.
그래서 ‘다섯절(五寺)길’이라 부르기로 했다. 왜일까?
이 구간에는 불광사(佛光寺)에서 시작해 선림사(禪林寺), 진관사, 삼천사 등의 명찰들이 있다. 또 사이에 정진사, 봉은사 같은 작은 사찰도 숨어있다. 그러나 둘레길에서 꽤 많이 올라가야 하는 삼천사는 가지 못했다. 그래서 다섯절길이 되고 말았다.
지하철 3호선 불광역에서 2번 출구로 나와 좌회전, 구기터널 방향으로 10분 남짓 쭉 올라가 한국행정연구원 앞을 지나면, 구름정원길 입구인 북한산생태공원이 왼쪽에 있다.
북한산 능선의 서쪽 첫 번째 봉우리인 족두리봉이 올려다 보이는 공원에서 출발한다.
공원 왼쪽 아파트단지를 끼고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불광사 입구가 나오고, 그 오른쪽으로 돌아가니, 구름정원길 구간 입구가 있다.
둘레길을 걷기 전 불광사부터 들렀다.
불광사 미니 법당 [사진=미디어펜]
불광동이라는 이 동네 이름은 이 곳에 옛날 불광사란 절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됐다. 전설에 따르면, 고려 때 몽골이 침입할 당시, 지금의 불광동인 ‘독박골’은 조정에 진상하는 항아리를 굽던 곳으로, 항아리에 부처님의 백호광명(白毫光明)이 반사되는 것을 본 몽골군이 물러갔다고 한다.
이 때부터 이 동네는 불광리 혹은 독박골이라 불리며, ‘호국불교의 성지’로 여겨졌다.
지금의 불광사는 1947년 김도준 화상이 재건한 것으로, 아주 규모가 작은 아담한 절집이다. 본당도 나무들 때문에 현판이 보이지 않을 정도고, 건물은 법당과 부속건물 단 2채 뿐이다.
사진만 한 장 찍고, 앞서간 일행들을 서둘러 따라간다.
경사도가 별로 없는 족두리봉 옆을 돌아가는 산길이다. 나무데크길과 나무계단, 흙길이 번갈아 이어진다.
문득 왼쪽으로 조망이 트이고, 전망명소가 나타난다. 은평구 일대의 아파트 숲이 굽어보인다.
조금 더운 날씨다. 작은 시냇물이 흘러내리는 곳에서 일행 후미가 쉬고 있다. 나도 잠시 쉬다가, 다시 발걸음을 재촉해 따라간다.
문득 마른 계곡 오른쪽에 작은 한옥지붕이 보인다. 바로 정진사다.
좀 더 내려가니, 주택가 입구에 소공원이 나타난다. 수리마을 수리공원이란다. 불광동 수리마을은 북한산 수리봉에서 이름이 비롯된,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진 산기슭 동네다.
동네안길을 돌아가니, 다시 산길로 오르는 계단이 나온다. 계단을 올라 둘레길을 따라간다.
왼쪽 길옆에 기이한 작은 돌비석 3개가 모여 있다. 토착 민속신앙의 유물인 듯하다. 같이 걷던 여 도반(道伴)이 “이 구간에 저런 게 많아서, 외국인에게 가장 추천할 만한 둘레길 코스라더라고요”라고 귀띔하는데, 주의력이 부족해서인지 다른 것들은 미처 못 봤다.
얼마 더 가니, 제법 큰 계곡이 나타난다. 사람들이 손을 물에 담근다. 길 옆 문인석 하나가 말없이 그들을 지키고 있다. 그 바로 아래가 선림사 입구다.
은평구 진관동 ‘힐스테이트’ 단지와 인접한 선림사는 고찰은 아니지만, 꽤 큰 절집이다.
선림(禪林)이라는 이름은 ‘깨달음의 숲’을 뜻한다. 북한산의 웅장한 산세를 보며 고요한 숲 사이에서 수행하는 곳이니, 절로 마음의 평화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지난 1966년에 김유주 ‘본심화 보살’이 토지를 시주했고, 1991년 328명의 신도들이 시주를 모아 중창했다고 한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이 고시공부를 했던 곳으로, 고시생들 사이에 영험한 절로 소문이 났다.
다시 계곡을 건너 왼쪽길로 올라간다. 잠깐 조망이 트이면서, 북한산 향로봉이 눈앞이다.
둘레길을 따라가다가, 왼쪽 조망이 좋은 곳으로 잠시 빠져나왔다. 고양시의 낮은 산줄기가 손짓한다. 소공원으로 들어가니, 북한산 연봉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정상 백운대를 비롯해 의상봉, 원효봉, 용출봉, 향로봉, 보현봉 등등이 나란히 서 있다.
잠시 쉬면서 간식으로 허기진 배와 지친 몸을 달래고, 다시 길을 나선다.
길 왼쪽에 내시부(內侍府) 상약 신공(申公) 묘역임을 알려주는 돌비석과 무덤 상석이 있다. 조선 인조 때 궁중에서 쓰는 약에 대한 일을 맡은 상약(尙藥) 신공의 무덤 터다. 이 일대에 내시들이 많이 묻혔음을 실감한다. 잠시 후 길 오른쪽에는 아무 것도 없이 상석 하나만 외롭다.
이윽고 구름정원길이 끝나고 마실길이 시작된다. 생태다리 앞이다. 도로를 따라가야 한다.
도로 왼쪽에 큰 느티나무가 보인다. 나이 약 260년 된 노거수 보호수다. 그 안쪽에도 보호수가 여럿 있다.
이 곳은 ‘은평한옥마을’이다.
천 년 전인 고려 때 이미 점지된 천복지지(天福之地)의 명당이라고 한다. 이 곳 한옥들은 모두 수 억 원 대를 호가한다. 살림집도 있지만, 각종 문화공간이나 식당과 카페 등도 꽤 많다.
여기는 진관사 입구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동 불암(佛岩), 서 진관, 남 삼막(三幕), 북 승가(僧伽)’라 불렸던 진관사는 조선시대 한양 근교 4대 사찰 중 하나였다. 신라 진덕여왕 때 창건됐다는 설도 있지만, 고려 현종(顯宗)이 왕이 되기 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진관조사에 보답코자 지은 절이라는 게 정설이다.
특히 현종은 진관사에서 거란의 침입을 막아달라고 부처님께 빌고자 최초의 대장경을 판각했는데, 이를 ‘초조대장경’(初彫大藏經)이라 한다. 한국 최초, 세계 2번째의 대장경이다.
일제 때는 백초월(白初月) 스님을 중심으로, 항일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
당시 백초월스님이 사용한 진관사 태극기는 ‘일본을 누르고 독립을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일장기 위에 덧그렸는데, 2009년 칠성각 해체.복원 과정에서 이 태극기를 비롯한 20점의 독립운동 자료가 발견됐다. 진관사 태극기는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458호이기도 하다.
진관사 입구에서 왼쪽으로 내려가면, 진관사계곡이 있고, 그 오른쪽에는 수령 210년 된 보호수 느티나무가 있다.
조금 더 가면 삼천사 계곡이 나온다.
삼천사 계곡은 북한산 전체에서 가장 수량이 많은 계곡으로 손꼽힌다. 그런데 여전히 계곡은 식당들이 점령하고 있다.
삼천사는 포기하고 다시 진관사 입구로 역행, 진관사로 올라간다.
입구 오른쪽에 봉은사 가는 길이 있지만, 무시하고 진관사 산문을 통과했다. ‘마음의 정원’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진관사의 캐치프레이즈다. 부도탑들과 극락교, 두 번째 일주문을 지난다.
오른쪽 바위에 마애불이 새겨져있다. 진관사 마애 아미타불이다.
진관사 대웅전(大雄殿)은 절 규모에 비해 소박하고 아담한 편이다. 그 주변에 다른 법당들이 둘러서 있다. 오른쪽으로 돌아 나오니, 장독대에 100여 개가 넘을 듯한 옹기들이 질박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아래쪽 전통찻집은 초가지붕과 흙벽으로 지어진, 정겨운 모습이다.
“종교를 넘어...마음의 정원 진관사”라는 나무패 3개가 매달린 터널을 지나, 진관사를 나왔다. 은평한옥마을을 지나면, 대로에서 버스로 3호선 구파발역이나 연신내역으로 나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