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37) - 상상과 풍자 속에 담긴 권선징악의 교훈
루키아노스(Lukianos, 120? ~ 180?)의 『진실한 이야기』
▲ 박경귀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서기 120년경에 태어난 루키아노스(Lucianus)는 주로 아테네를 무대로 활동하면서 그리스 고대 문학의 패턴과 현격하게 다른 공상적 풍자 소설 작품을 80편이나 남겼다. 그가 쓴 대표작인 『진실한 이야기』에는 <아바타> 등 다수의 영화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는 장면이 여럿 포함되어 있다.
루키아노스는 아주 독특한 이야기꾼이었다. 그가 희랍어로 쓴 많은 작품들은 로마 시대의 대표적인 소설가인 아풀레이우스의 『황금 당나귀』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의 『진실한 이야기』가 한국에 소개된 첫 번째 작품일 만큼 그의 작품은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 다행이 희랍어 원전 번역으로 나왔다.
『진실한 이야기』에는 모두 6편의 단편이 실렸다. ‘진실한 이야기’ 1~2와 ‘저승 가는 길, 또는 참주’, ‘죽은 자들의 대화’ 등이 있다. ‘진실한 이야기’는 현실의 ‘진짜’ 이야기는 아니다. 루키아노스의 자유로운 상상력의 산물이다. 루키아노스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가 겪는 일 가운데 실제로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이야기가 많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식인 거인들, 외눈박이 퀴클롭스 이야기, 동료들이 키르케의 약을 먹고 돼지로 변한 일 등등.
루키아노스는 소설의 앞머리에서 자신도 호메로스 못지않게 마음껏 허풍과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겠다고 선언하고 시작한다. 자신의 소설이 진실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라는 점을 애당초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는 ‘진실한 이야기’(?)인 셈이다. 그는 드러내놓고 환타지를 만들어냈다. 루키아노스는 고대 그리스 문학에 파격적인 장르를 선보인 것이다.
어쨌든 ‘진실한 이야기’는 일단의 모험가들이 바다를 항해하다 풍랑을 만나 표류하고, 달나라에까지 이르며 겪는 이야기다. 그곳에서 달의 종족 군대에 합세하여 태양의 종족 군대와 싸우는 이야기들이 전개된다.
나는 공룡을 타고 전투하는 <아바타>의 한 장면이 연상되는 ‘독수리를 탄 자’들이 나오고, ‘나무 인간’, ‘구름 켄타우로스’가 등장한다. 배 전체가 거대한 고래의 뱃속에 삼켜져 그 안에서 다른 종족과 전투를 하는 이야기까지, 황당해 보이는 이야기들이 ‘아주 진지하게’ 호메로스의 대서사시의 장면들처럼 펼쳐진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 서사시처럼 운명과의 비극적 대결이나 인간의 본질에 대한 심오한 통찰이 담긴 것은 아니다. 그런 전통적 서사시의 메시지는 과감히 던져버렸다. 유쾌한 상상을 바탕으로 흥미진진한 환상의 세계를 펼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이 펼치는 이야기는 당대로서는 기발하다싶을 정도의 풍부한 상상력에 기초하고 있지만, 그들의 전투, 일상, 관습, 신화 등 모든 세부 소재는 고대 그리스의 문명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공간적, 기술적, 문화적 제약을 받지 않은 별나고 기이한 소재를 뒤섞은 자유롭고 유쾌한 공상소설이다. 고대기에 이런 상상력을 펼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작가는 고대의 서사시처럼 인간에게 무언가 교훈을 주고자 하는 압박감으로부터도 완전하게 자유로운 듯싶다. 인간들은 현실 세계를 벗어난 다른 세계로 간다고 해도 우호적인 친구나 적대적인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여전히 사랑하고 전투하며 승전가를 부른다. 신을 섬기고 때로 쾌락을 즐기는 패턴도 변함이 없다. 다른 세상에서 또 다른 그리스적 삶을 체험하는 그리스의 모험가들의 흥미진진한 공상적 스토리가 담겨있다.
‘진실한 이야기 2’에서는 호메로스가 헤시오도스와 달리기 경주를 하거나, 아킬레우스와 소크라테스가 전우가 되어 적을 물리치는 이야기도 나온다. 신화와 역사가 여기 저기 뒤섞인 채 고래의 배 속에 있는 숲과 바다를 헤쳐 나가는 그리스인들의 모험담이 펼쳐진다.
헬레네가 등장하고, 오디세우스의 모험 행로와 유사한 모험이 전개되기도 해서 고대 그리스의 역사와 신화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루키아노스와 함께 유쾌한 상상여행을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의 몇몇 대목을 패러디한 것 같은 장면도 볼 수 있다.
루키아노스의 풍자적 재능은 다른 작품에서 두드러진다. ‘저승 가는 길, 또는 참주’는 죽어서 저승으로 가는 상황에서도 이승의 권력과 부, 욕망에 연연해하는 어리석은 인간 메가펜테스(Megapenthes)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탐욕을 질타하고 도덕적 삶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죽은 자들의 대화’ 역시 현세에서 유명했던 수많은 영웅호걸과 철학자들이 저승에서 나누는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꼬집고 있다. 이승에서 참주의 권력을 누리던 자는 저승에서도 그런 권력을 과시하려 하지만, 모두 허깨비의 망발에 불과한 애처로운 짓이다. 여러 대화를 통해 인간이 이승에서 그토록 집착하며 추구했던 것들이 저승에서 얼마나 가치 없는 것들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루키아노스는 죽은 자들의 대화를 통해 권력자 뿐 아니라 소크라테스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들도 조롱한다. 알렉산더 대왕과 그의 아버지 필립포스가 서로 자신이 더 뛰어난 영웅이라며 말씨름을 하는 장면도 같은 맥락이다.
또 필립포스가 알렉산더에게 페르시아를 정복한 후에 알렉산더가 페르시아 복장을 하거나, 페르시아 식으로 신하들에게 부복(仆伏)할 것을 요구하고, 나아가 페르시아 여인들과 그리스 병사들의 합동 결혼을 추진한 것 등을 질책하는 장면도 주목을 끈다. 아마 루키아노스는 당시 그리스 세계에 떠돌던 알렉산더 대왕에 대한 몇 가지 의혹이나 풍문을 소설로 담아낸 것 같다.
저승에서의 심판을 통해 인간이 징계를 받는 장면을 묘사한 것도 흥미롭다. 저승에 간 모든 이들은 이승에서의 온갖 죄악이 문신처럼 각인된 몸의 상태로 저승의 심판관 라다만튀스(Rhadamanthys)의 심판을 받는다. 이승에서의 재력가, 권력가, 잔혹한 참주보다 소박하고 무욕의 삶을 산 사람이 오히려 저승에서 당당하고 자유롭다.
궁색하지만 정직하게 살았던 구두장이 미킬로스가 심판관들에게 환대받고 온갖 범죄를 저지른 참주 메가펜테스가 징벌을 받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도 저승까지 따라간 권선징악의 경고다. 영혼 불멸을 믿었던 그리스인들의 철학이 그 바탕이 되고 있다.
▲ 죽은 자들을 심판하는 사후의 심판관들, 가운데가 미노스, 그의 오른쪽이 라다만티스, 그의 왼쪽에 앉은 이가 아이아코스이다. Ludwig Mack(1799-1831), 1829 작. |
하지만 루키아노스 역시 현세주의자로서의 고대 그리스인의 사유를 그대로 잇고 있다. ‘아킬레우스와 안틸로코스의 대화’에서 아킬레우스는 저승 세계에서는 “열등한 자건 탁월한 자건 동등하게 죽은 자이고, 완전히 평등”하다며, 차라리 살아서 이승에서 종살이라도 하는 것이 낫다는 푸념을 한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오디세우스가 저승으로 내려가 아킬레우스를 만났을 때 나눈 대화를 연상시킨다.
루키아노스가 저승에서도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가여운 인간 군상들을 그린 이유는 당시 로마의 번영기에 접어들어 점차 타락하기 시작한 당대인들에게 주는 경고이자 교훈이었던 것 같다. 풍자의 대상인물들이 모두 그리스인들이고 이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보면, 로마에 속주가 되어버린 고대 그리스의 과거 영광의 스토리에 대한 비판도 담긴 것 같이 느껴진다.
아무튼 루키아노스가 그리는 인간들의 탐욕과 죄악에 대한 풍자, 그리고 신화와 역사에 등장하는 영웅과 명사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흥미진진한 또 다른 변형된 신화와 전설이 된 것 같다.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 ☞추천도서: 『진실한 이야기』, 루키아노스 지음, 강대진 옮김, 아모르문디(2013), 272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