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규태 기자] 잊을만 하면 반복되는 디지털 성범죄, 범죄자 추적 및 영상 삭제가 어려운 해외 플랫폼이 가장 큰 구멍으로 꼽힌다. 소위 '법의 사각지대'다.
과거 대표적 사례는 소라넷이다. 앞서 지난 2016년 6월 폐쇄된 불법 음란물 사이트 '소라넷'은 17년간 운영되었고 누적 회원은 100만 명에 육박했다. 국내가 아니라 해외에 서버를 둔 방식이었다. 당시 영상물 유포에 성폭행 모의까지 사이트에서 이루어졌지만 1명만 처벌 받은 바 있다.
현재 디지털 성범죄 상당수는 한 주소로 고정된 사이트가 아니라 일종의 메신저 플랫폼을 통해 이루어진다. 텔레그램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온 국민의 공분을 자아냈던 n번방의 경우, 'AV스눕'이라는 블로그를 통해 텔레그램 '고담방'으로 들어가고 이 고담방을 통해 텔레그램 'n번방'으로 들어가는 구조였다.
성착취물 공유 텔레그램대화방인 'n번방' 운영자 '갓갓' 문형욱(24)과 함께 피해자를 협박한 안승진(25)이 6월 23일 검찰로 송치되기 위해 경북 안동시 안동경찰서에서 나오고 있다./사진=연합뉴스
또다른 플랫폼은 여러가지다. 트위터와 같은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비롯해 디스코드(게이머들이 주로 이용하는 채팅앱으로 전세계 사용자 3000만~5000만으로 추정)가 꼽힌다. 페이스북과 연동되어 있는 인스타그램을 비롯해 텀블러, 핀터레스트 등 가해자들은 플랫폼을 가리지 않는다.
이런 플랫폼에서의 성범죄 유형은 가지각색이다. 여성의 신체 어디든 원본만 있으면 이를 다양하게 재가공해 성희롱하는 합성 또는 딥페이크(인공지능 기반 제작 기술로 합성인지 실제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영상물)가 난무한다.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성관계 영상 합성의 끝판왕을 보여준다.
문제는 임시 차단조치조차 이행하지 않는 해외 플랫폼에 대한 별도의 제재 규정이 없다는 점이다.
현재 정보통신망법 및 전기통신사업법에 따르면, 인터넷사업자는 불법촬영물 등 불법정보 유통을 금지하고 있지만 디지털 성범죄에 주로 쓰이는 해외 플랫폼은 해당되지 않는다.
사적 검열 문제와 더불어 자국 플랫폼이 아닌 경우 규제 집행이 어려운 실정이다. n번방 사건에서 텔레그램이 주요 통로로 쓰인 배경은 본사 위치조차 알려져 있지 않고 각국 정부 요청에도 쉽게 응답하지 않는 폐쇄적인 운영 특성 때문이었다.
애초에 텔레그램은 정부의 사적 검열로부터 사용자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됐다. 텔레그램은 성범죄 등 불법 콘텐츠에 대해 자체적으로 삭제한다는 입장에서 신고 채널을 운영하면서 매일 200여 건의 성 범죄물을 삭제하고 있지만, 피해자들 입장에선 턱도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IT보안업체 선임연구원인 백승환 씨(39)는 본지의 취재에 "해외 플랫폼을 무조건 차단하는 식의 대응은 한계가 있다"며 "텔레그램과 같은 보안 메신저에서 새어 나오는 성범죄에 대해 완벽하게 대응하긴 힘들다. 영원한 방패는 없다. 언젠가는 그것을 뚫을 창이 나올 것"이라고 우려했다.
백 연구원은 "관련법 개정으로 함정수사도 가능해진 마당에 경찰이 사후 차단에만 신경 쓸게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사전 예방에 나서야 할 것"이라며 "업계 얘기를 들어보면 수사기관 노력 여하에 따라 적발 가능성이 달라진다"고 전했다.
본지 취재에 응한 경찰 사이버수사대 관계자는 "디지털 성범죄는 플랫폼을 통해 빠른 속도로 피해가 확산 재생산되는 구조"라며 "해외 플랫폼 사업자에 대한 사전적 조치의무 강화와 적극적인 규제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문제의 디지털 성범죄물에 대해 삭제를 통보해도 그 삭제 차단을 시행하는 것은 플랫폼 사업자의 몫이다. 경우에 따라 세계시간 시차도 있고 주말이나 휴일에 즉각 조치가 불가능한 실정"이라며 "또한 규제를 대폭 강화할 경우 자의적인 정보 차단이 남용되거나 사적 자유를 침해하는 검열 문제가 남는다"고 덧붙였다.
이어 그는 "해외 플랫폼 사업자가 우리 정부 당국으로부터 의무를 부여 받은 후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때 단계별로 어떻게 해야 할지 논의하고 이를 확정 지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성착취 동영상 제작 및 유포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25)./사진=연합뉴스
지난 5월 7일 국회입법조사처는 이와 관련해 '디지털 성범죄 정보 유통 관련 플랫폼 규제 현황 및 개선 과제' 보고서를 통해 "해외 플랫폼의 실효적 규제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플랫폼의 법적 책임 규정과 관련해 "디지털 성범죄 정보의 구성요건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며 "해외의 경우 형사가 아닌 민사적 책임을 통해 규율하고 있다"고 전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플랫폼에 대한 사후적 규제(성범죄물 발견 시 삭제하지 않으면 형사 처벌) 강화의 타당성을 검토해야 한다"며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해외 플랫폼의 자체 가이드라인을 최대한 적용해 자율적인 삭제를 요청하고 국내법에 근거해 해외 플랫폼의 자율적 협력이 확대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시정요구 결과에 따르면, 2019년 2만 5900여 건의 디지털 성범죄 정보 심의 중 무려 2만 5800여 건(99.6%)이 접속차단 조치다. 디지털 성범죄의 주요 유통 경로가 해외 플랫폼임을 반증한다.
향후 해외 플랫폼에 대한 현실적 규제방안이 마련될지 주목된다. 시간이 갈수록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들의 눈물은 멈추지 않고 있다. 해외 플랫폼에 기생하는 악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