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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률 靑 수석, 이번엔 폭력혁명 찬양 발언 논란

2014-11-30 09:01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 조우석 문화평론가
김상률 청와대 교문수석의 황당한 반미(反美), 반제(反帝) 신념이 논란을 증폭시키고 있지만, 통념과 배치되는 그의 또 다른 반사회적 성향이 확인됐다. 기성 체제를 뒤엎기 위해 물리적 저항을 포함한 일련의 폭력 찬양 발언이 그렇고, 레스비언-게이 등 동성애 옹호도 비판의 도마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런 성향은 그의 저술인 <차이를 넘어서>(2005년 숙명여대 출판국) <폭력을 넘어서>(2008년 숙명여대 출판국)를 꼼꼼히 재점검한 결과 명백해졌다. 폭력 찬양과 동성애 옹호의 소신은 대학 시절 그의 전공인 영문학에서 유행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탈(脫)식민주의(post–colonialism)의 학문담론 형태로 표현되고 있지만, 위험성은 여전하다.

현실정치에 적용될 경우 불법 탈법의 사회혼란을 조장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실제로 그의 발언은 "한국사회 변혁운동의 기본노선은 폭력혁명이다", "혁명의 결정적 시기에 무장봉기를 일으킨다"는 통진당 의원 이석기의 폭력혁명론-종북주의와 한 끗 차이로 분석된다. "북핵(北核)은 약소국 생존을 위한 비장의 무기"라는 김 수석 최악의 발언도 우연이 아닌 셈이다.

   
▲ 김상률 청와대 교문수석의 저술 <폭력을 넘어서>(2008년 숙명여대 출판국)

"정의 회복 위한 '신성한 폭력'이 따로 있다"는 황당한 소신

김 수석은 저술에서 "정의를 회복하기 위한 신성한 폭력(divine violence)이라는 게 따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게 그가 품고 있는 소신의 핵심인데, 신성한 폭력이란 현실세계에서 말하는 비합법적이고 비이성적인 폭력 등과는 질적으로 다르며, "순수하고 합법적"이라고 애써 강조한다.

실은 신성한 폭력이란 용어는 좌파 성향의 20세기 비평가 발터 벤야민에게서 빌려왔는데, "대상의 치명적이며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며, 국가권력의 총체적 소멸을 추구한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것이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의 '저항적 폭력'과 같은 뜻이자, 알제리 지식인 프란츠 파농이 말했던 탈 식민의 혁명적 폭력과 같다는 장황한 설명도 곁들였다.

폭력 찬양은 관념의 유희가 아닐까? 이에 대한 비판은 지나가는 소리로 한 걸 침소봉대하는 매카시즘적 공격은 아닐까? 전혀 안 그렇다. 그는 신성한 폭력이란 정말로 "불가피했던 혁명" 으로, 서구사회를 흔들었던 1968년 학생혁명의 정신이었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좌파 이데올로기에 대한 공감을 표시하는 것도 우연이 아닌데, 그는 "계란을 깨지 않고서는 오믈렛 요리를 만들 수 없다"는 레닌의 말도 인용한다. "모든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마오쩌둥 말도 슬쩍 흘린다. 김 수석의 폭력 찬양의 세계관은 빼도 박을 수도 없이 내면화된 논리이자 멘탈리티라는 건 의심할 필요가 없는데, 심지어 성경 말씀도 인용한다.

   
▲ 김상률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김상률의 미친 논리 속에서 "북핵은 좋은 폭력, 미국은 나쁜 폭력"?

성경 인용은 사회 통념과 위배되는 자기의 글에 대한 물타기 작업 혹은 조심스러운 은폐 작업의 일환이다. 그는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는 마태복음을 인용하며 "이상적 낙원이란 용기와 신념이 있는 인간들의 저항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탈선적이고, 정신착란에 가까운 섣부른 해석도 곁들인다.

김상률의 폭력 찬양을 단순화시키면 이렇게 된다. 미국의 건국 자체를 "폭력의 시작"이라고 규정했고, 이라크를 공격한 부시 행정부를 비판한 그의 눈에는 이런 종류의 '나쁜 폭력'을 종식시키기 위한 '좋은 폭력'이 따로 존재한다. 북한 핵무기도 '좋은 폭력'일 수 있다는 논리 비약은 이때 이뤄진다. 결국 신성한 폭력에 대한 강변은 극단적 상대주의의 늪에 빠진 관념의 사치에 다름 아니다.

때문에 좌편향된 속류(俗流) 지식인이거나, 얼치기 포스트주의에 길을 잃은 바보가 김상률이다. 사실 그의 저술에서는 육화된 자기만의 목소리나 해석은 없고, 생경한 관념과 짜깁기 행위만이 존재한다. 포스트주의는 서구에서는 1970년대 이후 저들의 필요에 의해 등장했던 지식사회의 궤도수정이었는데, 그런 큰 그림에 대한 이해는 그에게는 자취도 없다.

포스트주의는 18~19세기 제국주의 경영에서 오는 폐해를 점검하는 거대한 지식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철학자 미셸 푸코, 영문학자 에드워드 사이드 등의 등장 이후 철학-문화인류학-영문학으로 파급됐다. 유감스럽게도 국내에서는 1980년대 말 상륙한 뒤 좌파 성향의 문화연구로 치달았는데, 김상률은 거기에 편승하는 기회주의적 아류의 한명이다.

   
▲ 청와대 김상률 교육문화수석이 영문학과 교수 시절 집필한 저술 내용. /YTN 화면 캡처.

또 하나의 황당 발언 "동성애 편견을 씻어주는 게 인문학"

그걸 재확인해주는 게 동성애 옹호다. 그에게 LGTB(레스비언-게이-트랜스젠더-바이섹슈얼의 이니셜)는 강력한 지지의 대상인데, 그걸 옹호하는 게 인문학의 사명이라는 턱없는 설명도 곁들일 정도로 그는 심취한 모습이다.

그들을 비정상으로 바라보는 사회적 억압이나 편견이란 "문화적 폭력"이자 "무지의 감옥에 갇혀있는 일일 뿐"이라서 자신이 하는 인문학은 사회적 다수자들의 정신을 해방시키는 일이라고 강변도 한다.

김상률이 <위대한 게츠비>의 작가 피츠제럴드와 헤밍웨이를 작품 속에서 인종 차별만이 아니라 성차별을 무시로 했던 작가로 지목하고, 동시에 <댈러웨이 부인>을 썼던 작가 버지니아 울프와, <디 아워즈>란 현대소설에서 울프를 재창조한 커닝햄에게 묻지마 찬사를 보내는 것도 그 대목이다.

<댈러웨이 부인>는 양성애적 사랑에 빠진 주인공을 내세우고 있고, 영화로도 만들어진 <디 아워즈>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을 쓴 작가는 자신의 몸을 사슬로 감은 채 남성중심주의에 사로 잡힌 부시 행정부를 비판하는 현실참여형 지식인이자, "동성애와 이성애의 이분법을 넘어서 인류 보편적 삶의 문제를 천착한 사람"이라는 극찬도 그는 한다.

사실 그가 학위를 했던 뉴욕주립대 버펄로 캠퍼스는 동성애 옹호의 소굴로 유명한데, 그런 분위기에서 입력시켰던 관념의 유희를 귀국 후 강단에서 현대영미소설, 미국 소수자 문학 등의 강좌를 했고, 그걸로 학생들을 오염시켜온 셈이다. 그의 정신세계는 서울시장 박원순과 닮은꼴이다. 동성애를 삽입한 서울시민인권헌장에서 보듯 좌파와 동성애는 친연성이 높은데, 김상률도 그 중의 하나다.

'쓸모있는 바보' 김상률은 사퇴밖에 답이 없어... 청와대는 결단하라

결론이다. 김상률을 지켜봤던 한 영문학 교수는 "한마디로 데데한 사람"이라고 잘라 말했다. 사람 자체가 시시하며, 학문도 보잘 것 없는 아류라는 뜻이다. 서구의 지적 유행을 문화적 맥락이나 연계도 없는 이 땅에서 조야한 형태로 떠들어온 것만 해도 부끄러운데, 공직을 맡을 자격은 더욱 없다. 교육문화 행정 총괄하는 교문 수석 자리는 언감생심이다.

좌파에게 길 터주는 중도(中道)주의의 함정에 빠지기 일쑤인 전형적인 사람이 그이다. 그가 높이 평가하는 레닌은 그런 부류의 데데한 지식인을 쓸모있는 바보들(useful idiot)이라고 했다. 사회주의 선전에 놀아나는 서구 좌익 혹은 리버럴 지식인을 그렇게 조롱하며 뒤에서 조종하고 활용을 했다.

섣부른 좌파 신념 속에 북핵을 옹호하고, 폭력혁명을 찬양하는 그는 부끄러워서라도 청와대를 스스로 나와야 한다. 청와대가 쓸모있는 바보들의 은신처가 아니지 않은가. 쓸모있는 바보 축에도 못 끼는 좌파 몽상가인 그를 중용한 청와대도 반성해야 한다. 잇따른 인사실책 중 김상률 건은 최악이다. 빠른 시일 내 그를 정리하는 게 지금 상황을 수습하는 첩경임은 물론이다. /조우석 미디어펜 논설위원,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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