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제도·경제학회(이하 학회)는 지난달 27일 전경련 컨퍼런스센터에서 '한국경제에 대한 신제도경제학적 이해'를 주제로 2014년 한국제도·경제학회 추계학술대회를 개최했다. 학회는 추계학술대회를 통해 한국경제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신제도경제학적 접근을 통해 한국경제를 개선하고 선진화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을 모색하고자 했다. 아래 글은 좌승희 한국개발연구원 국제정책대학원 교수가 발표한 '신제도경제학과 한국경제학계의 과제' 발제문이다. 미디어펜은 발제문을 6회에 걸쳐 연재한다. |
신제도경제학과 한국경제학계의 과제(2)
▲ 좌승희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 |
성장의 장기정체와 불평등의 심화현상에 대한 학계의 주류 생각은 크게 칼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모순론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불평등은 자본주의 모순이며 이를 교정하는 것은 당연하고 따라서 재분배 수정자본주의는 불가피하다. 불평등의 원인이 그러하니 정책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재분배 정책을 더 강화하고 더 생산적으로 하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일부 보다 정교한 주장들도 있다. 저성장추세의 원인은 저 출산 고령화가 원인이며, 양극화의 원인은 특히 선진국의 경우 세계화와 신흥공업국들의 부상에 따른 경쟁의 심화와 IT화 등 기술혁신에 따른 기술 양극화로 저기술, 저임 근로계층의 부적응과 탈락에 따른 중산층의 축소 등이 원인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주장들은 필자의 눈에는 문제의 원인을 설명한다(explain)기보다 문제의 상황을 그냥 기술(describe)하는 것에 불과하여 해법을 찾는데 크게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내생변수를 내생변수로 설명하는 꼴이니 그냥 동어반복의 토톨로지(tautology)가 되고 진짜 외생적 원인변수를 찾는 데는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 27일 전경련 컨퍼런스센터에서 열린 한국제도·경제학회의 2014년 한국제도·경제학회 추계학술대회 <한국경제에 대한 신제도경제학적 이해>의 전경. |
저성장과 저출산, 좋은 일자리 부족이 원인
우선 저 출산(과 그에 따른 고령화)문제를 생각해보자. 신고전파 성장론에서는 단순화된 모형의 경우는 인구증가율이 외생변수로서 성장률을 결정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인적자본이 더 적절한 설명변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인적자본은 근로자수와 그들이 체화한 지식(질)의 곱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저 출산으로 근로자수가 줄어들거나 정체된다고 하더라도 지식의 양이 증가하면 인적 자본의 크기는 오히려 증가할 수 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저 출산을 외생변수처럼 취급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은 출산율이야 말로 내생변수가 아닌가? 왜 출산율이 떨어지는가? 애를 낳고 키우는 비용이 증가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가임여성들의 경제참여가 늘어 애를 낳고 키우는 기회비용이 너무 높아지면서 가정경제학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애의 숫자는 줄이고 그 질을 더 선호하게 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가정(家庭) 안에서의 한계선택 문제를 넘어 가계주를 포함한 가계전체의 소득수준과 안정적 직장에 대한 비전의 악화로 인한 코너 해(corner solution)의 문제가 더 큰 장애요인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저 출산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가임기의 청년세대들의 안정적인 소득원인 직장이 온전치 못한 까닭이라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만혼이 일반화되고 자녀수 또한 소수화 될 수밖에 없다.
그럼 이 원인은 무엇인가? 바로 저성장에 따른 좋은 일자리 부족이 그 근본원인인 셈이다. 저 출산이 저성장의 원인이라 했는데 실상은 거꾸로 저성장이 저 출산의 원인인 셈이다.
한편, 저 출산이 불가피하다 하더라도 애들의 질 문제를 고려하면 저 출산 자체가 큰문제일 수도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전후 지난 50여년의 역사는 바로 인적자원이 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교육수준의 확대가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제 전 세계 선진국들에서는 대부분의 인간이 대졸자가 되는 세상이 도래할지도 모를 정도로 교육기회가 확대되었다. 그럼 교육수준의 향상이 얼마든지 인구감소 혹은 정체를 상쇄하여 인적자본을 유지, 확충할 수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진짜 문제는 교육의 질적 수준 하락
이런 시각으로 보면 진짜 문제는 일자리 창출을 막는 저성장과 교육의 양적 확대를 못 따라가는 질적 수준의 하락에 있다고 봐야 옳은 것이다. 물론 자녀의 수가 기펜재(Giffen‘s good, 빈자 재))이고 질은 사치재(luxury good)라는 가정경제학 가설을 따른다면 소득수준의 증가에 따른 자녀수의 감소효과는 자녀의 질, 즉 교육수준에 대한 수요증가로 어느 정도 서로 상쇄되리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성장률을 경정하는 인적자본의 증가여부문제는 교육의 양적확대에 부응하여 그 질이 얼마나 증가했느냐하는 문제에 귀착되게 될 것이다. 결국 인구증가의 감소 혹은 인구의 감소를 상쇄할 만큼 교육의 질이 향상되지 못한 것이 전체 인적자원의 성장기여를 낮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저성장의 원인은 후술하는 바와 같이 성장과 발전의 동기를 차단하는 정부의 반시장적 평등주의정책패러다임에 있고, 교육의 질 저하 또한 교육의 수월성을 포기한 평등주의적 교육정책 패러다임에 있는것이다.
즉 모든 사람이 경제사회적으로 평등한 사회, 노력과 성과에 크게 관계없이 소득, 즉 보상도 같아야 하고 교육기회도 같도록 해줘야 한다는 평등주의적 이념이 모든 문제의 원인인 것이다. 성장의 유인과 동시에 교육의 수월성 추구 유인이 사라진 경제는 전 사회의 역동성하락과 저성장을 피할 길이 없는 것이다. 수긍이 안 되면 아름다운 이상을 내걸었던 사회주의가 왜 망했는지 회고해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 1987년 체제 이후, 헌법에 경제민주화 개념이 포함되어 개정됨으로써, 대기업에 대한 다양한 규제, 중소기업에 보편적 지원, 수도권규제와 지방에 대한 획일적 지원, 저소득층에 대한 전방위적 지원을 담은 재분배정책, 교육평준화정책이 이루어졌다. |
소득 양극화는 구조조정 유연성의 문제, 이는 제도라는 장애 때문
다음으로 세계화, 신흥공업국의 추격, 기술혁신에 구조조정이 못 따라가기 때문에 소득 양극화가 생긴다는 주장을 살펴보면 이 또한 전형적인 동어반복의 토톨로지를 못 벗어난 주장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 주장이야 말로 바로 자본주의경제의 최대 장점이라는 경쟁의 확대와 기술의 혁신이 바로 양극화의 원인이라는 맹랑한 주장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결국 칼 마르크스의 자본주의모순론을 지지 강화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던져야할 보다 근본적인 질문은 바로, 그럼 왜 선진국들은 구조조정의 유연성을 잃게 되었나? 하는 것이다. 답은 명백히 구조조정을 어렵게 하는 제도적, 정책적 장애 때문이 아닌가.
고임금구조, 평등주의적 이념이 문제의 배경
그럼 이런 구조조정의 장애요인의 근본 배경원인은 무엇인가? 필자는 결국 사회적 약자인 근로자를 보호해야하고 저소득계층을 보호해서 칼 마르크스가 말하는 자본주의의 불평등의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는 평등주의적 경제, 사회정책이념이 궁극적인 배경요인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이러한 이념을 배경으로 노조라는 사회적 제도가 만들어지고 노조의 정치, 사회적 힘을 바탕으로 한 생산성을 넘는 고임금구조가 바로 신흥공업국과의 경쟁에서 밀리게 된 요인이 아니던가? 개방과 기술혁신에 따른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기득권 경제, 사회세력의 중심에 노조가 있다. 이렇게 보면 칼 마르크스의 이념을 실천하겠다는 사민주의 이념이 바로 이 배경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왜 새로운 변화에 자조적으로 적극 대응하지 못하고 정치와 법의 힘을 빌리고 복지의 보호를 받고자 안주하는 국민들이 만들어지는 것인가? 바로 민주정치의 이름을 빌어 사회주의를 실현하겠다는 사민주의 정치가 포퓰리즘 정책들을 양산하고 정치경제사회 곳곳에 시장의 작동을 막는 장애물들을 높게 쌓아왔기 때문인 것이다.
불평등심화 문제의 근본원인은 그래서 자본주의의 본질적 모순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바로 정치적 평등을 넘어 경제적 평등을 지상과제로 하는 변종민주주의인 사회민주주의에 있는 것이다.
한국이라고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온갖 형태의, 성장하는 기업을 역차별하는, 사업의 크기, 분야, 지역에 따른 차별적 대기업규제, 무소불위의 전투적 기득권 노조, 하향평준화를 초래하는 획일적 중기육성정책과 지역 균형정책, 학생들의 공부하려는 의지를 저상시켜온 교육평준화정책 등이 난무한다.
이처럼 기업과 지역, 개인, 학생들의 성장의 유인을 차단해온 평등주의 경제정책체제하에서 대기업들의 해외탈출, 중소기업과 지방, 개인, 학생들의 하향평준화는 불가피한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 마르크스에서 피케티에 이르기까지 좌파 학자들의 시장경제 비판의 주된 초점은 '자본’에 맞추어져 있다. 그들에 따르면 자본이 근거 없이 노동가치를 몽땅 차지하고, 또 자본이 자기증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시장경제(market economy)에 자본주의(capitalism)라는 별명을 붙였고, 자본주의를 타도하자고 했다. |
포퓰리즘 민주주의가 문제일까,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문제일까
결국 저성장, 일자리부족, 저출산고령화, 가계부채 증가, 중산층의 몰락과 양극화는 이로 인한 필연적 결과이다. 지난 30년 민주주의라는 이름하에 포퓰리즘으로 치달은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가 바로 이 모든 정책의 원인임을, 이념도 제도도 없는 우리 경제학만 모른 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려된다.
이런 가운데 오늘날 세계경제의 공통 화두는 바로 이런 경제적 불평등을 초래하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자본주의를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그 동안 해온 재분배 정책을 더 적극적으로 해서 좀 더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내외적으로 자본주의 개혁 주장이 난무하고 가장 인기 있는 화두가 되고 있다.
예컨대 피케티(2014)의 80-90% 부유세 과세를 위한 세계 공동전선 주장(0.5-1%의 고소득계층에 80-90%, 5-10%의 소득계층에 50-60%의 한계세율로 과세)이나 아나톨 칼레스키(2012?)의 소위 자본주의 4.0 주장이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이라든가, 소위 경제양극화(economic polarization)가 인기 있는 정치경제이슈가 되고 있음이 이를 반증한다.
그러나 여기서 던져야할 올바른 질문은 오늘날의 경제문제들이 자본주의경제의 본질적 문제인가 아니면 그동안 자본주의 시장을 교정해야한다고 각종의 반시장적 경제제도를 양산해온 포퓰리즘 민주주의 정치인가하는 질문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좌승희 한국개발연구원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미디어펜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