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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문화예술 옷 입히기 공공미술 , 실패하는 까닭은?

2014-12-03 10:27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 조세형 서울시립대 교수
‘호반의 도시’ 춘천. 산과 물이 어우러져서 문자 그대로 한 폭의 산수화를 그린 듯 낭만을 느끼게 하는 도시가 춘천이다.

최근 춘천은 도시재생을 위하여 지역 이곳저곳에 문화예술의 옷을 입히는 작업을 해 왔다. 그 가운데 ‘낭만골목’ ‘번개시장’ 등의 프로젝트는 소위 공공미술(public art)이라는 공통적인 영역으로 대중에게 접근하는 방식을 쓴 바 있다.

문화예술에 대해 전반적으로 관심이 생기면서, 필자는 근래 붐이 일기 시작한 공공미술의 영역도 눈여겨보게 되었다. 전국 각지에서는 이미 벽화 그리기, 골목 프로젝트 등의 형태로 그러한 작업들이 진행되어 왔는데, 그간의 사례들을 살펴보니 성공한 경우도 있지만 실패한 경우들이 더 많았다. 그래피티처럼 대중들에게 가장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는 예술장르로 발전 가능성이 충분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할 방안은 없는 것일까?

먼저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공공미술의 현재 모습을 몇 군데 소개해 보기로 한다. 서울 동숭동의 낙산공원 벽화마을의 경우는 시각적으로 테마가 있고 창의성이 돋보이는 개성 있는 벽화들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주변경관과 잘 어우러진 조각작품들은 대중들에게 낯설지 않은 친숙함으로 다가가면서 공공미술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듯했다. 또, 통영 동피랑 벽화마을의 경우도 지역주민의 참여로 소박하면서도 독창적인 하모니를 느끼게 해주었다.

서울과 통영의 두 벽화마을이 성공한 데는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울의 경우, 낙산공원 자체가 하나의 콘텐츠일 뿐 아니라 한양 성곽길과도 연관되어 역사성에 기반한 스토리를 충분히 갖추고 있어 관심이 지속된다. 동숭동과 혜화동의 큰 상권과도 자연스레 연결되고 꾸준히 관리도 되고 있다.

통영의 경우, 규모는 서울보다 작지만 더 극적이다. 서울 아니면 시골이라는 우리나라 현실에서 그만한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중앙시장의 상권과 연결되고 지역주민의 참여가 활발하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통영 전체가 가진 스토리텔링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국의 영웅’ 이순신 장군과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 등의 빅 스토리, 꿀빵과 욕설 카페 등의 스몰 스토리. 이 둘이 어우러짐으로써 지속적으로 <김약국의 딸들>의 현장과 같은 특정한 ‘장소’가 환기된다.

   
▲ 강원 춘천시 효자동 낭만골목에 관광객들을 위한 벽화그림이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뉴시스
이에 비추어볼 때 공공미술의 실패 이유는 자명해지는 것 같다.

첫째, 결과물 자체가 지닌 공공미술로서의 예술성이 문제이다. 뚜렷한 주제도 없이 마치 어린아이가 그려놓은 만화그림 같은 수준의 벽화도 있었다. 더구나 그 벽화들은 불과 몇 달 전에 그린 것인데도 버려진 동네처럼 지저분하고 정리되지 않아 철지난 바닷가 마을의 횟집처럼 황량한 느낌마저 주었다. 사람들이 자기 동네를 벗어나 굳이 다른 동네까지 찾아가는 이유는, 그래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미적 욕구가 채워지기 때문이다.

둘째, 공공미술작품과 그에 부대되는 행사들의 지속성이 문제이다. 프로젝트 초기에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다가 몇 차례의 페스티벌로만 인식되는 데 그치는 경우도 있다. 아티스트들과 지역주민 사이의 소통이 원만하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아티스트들과 관람자들 사이의 수준 차이라는 문제는 공연, 전시 등 문화예술행사에서 숙명에 가깝지만 할머니들이 모인 자리에서 행위예술을 하는 식이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예술가들이 너무 계몽적으로 “너희들을 가르칠 거야”라는 태도로 나가도 안 되고, 거꾸로 지역주민의 수준이나 취향을 따라가기만 해도 안 된다.

여기에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행정 쪽의 문제도 개재해 있다. 문화예술 예산의 공공미술 항목에는 아티스트에게 돌아가는 인건비는 책정되어 있지 않고, 재료비조차 실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무조건 무료로 봉사해야 하는 분위기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아티스트들의 창의성에 대해 적절히 그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양질의 공공미술 서비스를 지속적으로 참여하도록 하기는 힘들고, 그 작업은 일회적으로 소모된 다음 그냥 버려지고 마는 구조가 고착된다.

작가들의 적극적인 참여도 필요하다. 우리나라 미술시장에 거품이 끼어 있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아는 사실이다. 누보 레알리슴(Nouveau Realisme)의 창단 멤버로서 현대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빌레글레(Jacque Villegle 1926- )의 작품도 몇 천만 원이면 사는데, 우리나라의 젊은 작가 작품도 수천만 원을 넘는 것이 현실이다. (누구에게나 예술을 즐길 권리가 있는데, 돈 있는 몇몇 사람들이 미술작품을 독점한다면 과연 그 미술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의식의 연장선에서 공공미술작업의 대가를 너무 지나치게 요구한다면 심각한 일이다.

프랑스에서는 그 비슷한 프로젝트가 있으면 자기 재료를 가지고 가면서까지 자발적으로 동참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자기 작품을 알린다는 차원에서 참여하는 것도 좋은 일이고, 함께할 때 또 다른 자기 세계를 찾는 기회도 생기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리나라의 경우는 불러주지 않고 돈 안 주면 올 생각이 없고 관심도 없다. 공공미술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하지 못하고 그 결과 작가도 시민도 가치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작가들도 행정가들도 서로 한 발씩만 양보하면 된다. 작가들의 문제가 무조건 비싸게 부르는 데 있다면, 행정 쪽의 문제는 돈을 쥔 입장에서 아쉬운 소리를 하는 사람들에 대해 시혜적 태도를 보인다는 점과 예산이 경직되어 있다는 점이다.

담당자들에게 자꾸 얼마의 예산을 절감하면 실적이 얼마라고 하는 식으로 강제해서도 안 된다. 작가들은 예산 삭감이나 정책의 일관성 문제로 공공기관의 지원을 불신하고, 공공기관은 정상적으로 프로젝트를 운영할 수 없도록 만드는 일부 작가들의 경비사용의 문제로 전체 작가들을 불신한다. ‘총체적 난국’이라 할 만하다.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고 지속적인 관리를 하기 위해서는 전문성을 갖추고 작가와 행정가 사이를 매끄럽게 연결할 기획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공무원들은 정책의 큰 틀을 세우고 예산의 원활한 수립, 집행, 관리 등을 잘 수행하는 일이 본임무가 되어야 한다.

   
▲ 서울시 유학생 자원봉사단, KT 대학생봉사단 등 내·외국인 대학생들과 서울시립대 학생 등이 지난달 1일 서울 용산구 동자희망나눔센터 옆 계단 벽면에 '우리동네 희망나무'를 주제로 벽화를 그리고 있다. /뉴시스
문화예술 프로그램과 정책은 대개 해외 사례를 바탕으로 만들어지는데, 그 겉모습만 흉내낼 뿐 정작 내부적인 문제는 해소하기 힘들다. 기획자는 그 전문성을 인정받는 가운데, 작가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기획하고, 한 배를 탄 사람들이라는 생각으로 서로 한발씩 양보하면 될 것이다.

전주의 남부시장은 전통시장으로, 젊은이들에게 저렴하게 임대해서 지역을 활성화시켜 보자고 하는 마을프로젝트가 수행된 지역이다. 젊은 사람들이 자기네 감각으로 자유스럽게 간판을 만들도록 했고, 아이디어 상품들도 많다.

처음에는 젊은 아티스트들이 와서 공연을 하고 시장사람들도 함께 즐겼는데, 무료로 와서 공연하는 것은 역시 한계가 있었다. 젊은 사람들이라고 해서 기대를 가지고 몰려왔지만, 그 다음에는 더 이상 안 가게 되었다. 몇 차례의 페스티벌 정도로밖에는 인식이 안 된 것이다.

셋째, 지역주민의 참여와 이익배분이 문제이다.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포함한 행사가 일회적으로 끝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 동네 주민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없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재즈 인 막시악 페스티벌 Jazz in Marciac Festival’에서는 행사기간 동안 장사하려는 동네사람들에게는 참가비 할인혜택이 있다. 동네사람들은 거의 장사를 하고, 그 페스티벌만 기다린다. 동네의 농수산물과 먹거리들을 내놓고 팔기도 하는데, 어린애들부터 할아버지까지 그 페스티벌을 위해 준비한다.

행사의 성공 기준을 예산 절감에 두는 우리나라 행정관행은 이 경우 문제가 된다. 가령 행사에 오는 행상들한테 자릿값을 받아서, 애초 예산이 10억 원이었는데 수수료로 1억 원을 받았으니 10%의 예산을 ‘절감’했다고 하자. 그러면 지역주민의 참여는 배제되고 ‘그들만의 행사’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참여주민들의 ‘칭찬스티커’와 같은 것이 어떨까? 예산 10%의 절감보다 참여주민들의 칭찬이 더 고과에 반영되도록 하는 것이다.

문화예술과 관련된 밤문화의 조성 또한 이익의 배분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주 남부시장의 경우는 바르셀로나의 밤문화가 새벽까지 활성화된 것을 참조하고 있다.

파리의 ‘카페 드 플로 Cafe de Flore’는 사르트르(Jean-Paul Sartre)와 보봐르(Simone de Beauvoir) 이래 문인과 화가들이 참여하여 작가들의 동네인 생제르망(Saint-Germain)의 카페문화를 선도하였고, 런던의 펍은 뮤지컬 관람 후 감동을 나누는 장소로 애호되어 공연문화와 밤문화의 결합을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가 되었다. 그리고 아티스트들과 예술을 사랑하는 대중의 공간과 함께, 고급스러운 문화의 소비를 바라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도 필요하다.

문화예술운동은 크고 작은 곳에서 ‘전문가 집단과 아마츄어 집단이 함께’ 움직여야 성공할 수 있다. 페스티벌은 기본적으로 즐기는 행사이며, 관객들과 같이 노는 터를 제공하는 행사이다. 이때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동참의 인식을 고양해주는 것도 효과적일 것이다.

세느강 옆에서 벌어지는 축제인 ‘파리 플라쥬 Paris Plages’ 등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지역운동은 스스로 좋아서 그 일을 하는 집단(인디밴드, 자발적 단체 등)과 그를 통해서 경제적 이익을 얻는 집단이 ‘다양하게 섞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끝으로, 이른바 ‘민관산학’의 협력 문제를 거론하며 마무리짓기로 한다. ‘민’인 상인들은 당장 집세 한 달에 얼마 나가는지가 발등의 불이고, ‘관’인 지자체는 예산과 지역갈등 따위의 문제가 불거지지 않기를 바라며, ‘산’이라 할 수 있는 공공미술 작가들은 계몽하려는 의도를 앞세우고, ‘학’인 연구자들은 이런 문제에 무관심하다. 그렇지만 달리 생각할 여지도 충분하다. 얘기했듯이 ‘민’은 다양하다.

그런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조직해줄 필요가 있다. ‘관’은 실적에 문제가 없도록 해주는 대신 예산운용의 유연성을 달라고 해야 한다. ‘산’은 잘난 체하지 말고 소박하게 출발하면 된다. ‘민, 관, 산’의 이러한 문제들을 통틀며 방향을 잡아주는 것은 기획자의 역할이다. 아, ‘학’을 빼놓아서는 안 된다.

필자 같은 인문학자들이 실천할 수 있는 영역 아니던가. 지역운동과 결부된 문화예술 프로젝트는 ‘공공미술과 가치’의 문제, 그리고 공간재구성과 지역개발 등에 필수적인 ‘공유도시’ 개념 등 이론적 논의와 함께 현장과 이론의 접점을 찾는 일이 꼭 필요한 단계가 되었다.

이렇게 공공미술을 둘러싼 ‘민관산학’이 조화를 이루어 갈 때 우리 문화예술 또한 발전해 나갈 것이다. /조세형 서울시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인문대학장 겸 도시인문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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