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 (41) - 개성과 취향에 맞는 자기만의 독서법을 찾아라
헤르만 헤세(1877~1962)의 『독서의 기술』
▲ 박경귀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그가 위대한 문학작품을 낳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학력은 중졸학력 인증 검정고사에 합격한 것이 전부다. 그는 16세부터 시계공장 수습사원, 출판사 견습생과 제국서점 보조점원을 거쳐 26세까지 고서점 점원으로 일했다.
그는 정규 학교교육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광기에 가까운 문학적 열정으로 자신의 내면의 방황과 성찰에서 우러나오는 무수한 시와 작품을 써냈다. 그의 작품이 갖는 독창적 영감과 날카로운 심리묘사는 엄청난 다독을 통해 얻어진 숙성된 사색에서 나온 게 아닐까?
“스스로의 정신으로 만들어낸 수많은 세계 중 가장 위대한 것은 책의 세계다.” 그는 사람들이 사업과 자신의 취향에 바치는 열정만큼 독서에 대해서도 시간과 열정을 바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과거에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것은 사제 계층의 전유물이자 신성한 비술이었다. 하지만 인쇄술의 발달로 의지만 있다면 누구나 독서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헤세는 책읽기의 기본자세로 “읽는 글에 대한 경의, 이해하고자 하는 인내, 수용하고 경청하려는 겸손함”을 요구한다. 특히 ‘좋은 판본’을 경외심을 갖고 읽어야 한다. ‘고전’ 시리즈를 일괄 구입하기 보다는 작품마다 가장 훌륭한 판본을 묻고 찾아내 읽는 정성이 필요하다. 올바른 지적이다. 헤세의 주문을 고전 읽기에서 더욱 유념해 실천하면 좋을 듯싶다.
사실 동일한 고전에 대한 수많은 번역판본이 있을 때, 그저 분량이 적거나, 값이 싸거나, 출판사의 브랜드만 보고 책을 고르는 독자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고전의 경우 당해 고전의 원전 번역인지, 다른 언어 번역본을 다시 번역한 중역(重譯)인지 살필 일이다. 또 번역자의 전문성과 권위도 확인해야 한다. 나아가 책의 일부를 발췌한 소략한 책보다 기왕 읽을 바에는 분량이 많더라도 완역본을 찾아 읽는 게 바람직하다.
“책이 없다면 가난한 집이다.” 훌륭한 독서가는 훌륭한 장서가이기도 하다. 자신이 읽는 책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는다면 이 또한 독서의 즐거움을 배가시킬 수 있다. “누가 어떤 책을 얘기하면 눈 감고도 척척 집어낼 만큼” 소장도서의 소재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면 이 또한 아니 즐거울까? 집안의 장서는 자라나는 자녀들을 독서 생활로 자연스럽게 이끄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 헤르만 헤세, 사진 Gret Widmann. |
이 책은 독서의 기술을 체계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저술된 것은 아니다. 여러 해에 걸쳐 쓴 헤르만 헤세의 단편적인 문학과 독서생활에 대한 수필 가운데 독서와 연관성이 높은 글들을 추려 엮은 책이다.
그러다 보니 독서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보다 헤세의 다양한 문학론이 더 많이 나온다. 20세기 초의 독일 문단의 젊은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 비평가와의 대담, 글쓰기에 대한 자신의 철학, 문학과 비평의 긴장 관계에 대한 짧은 글도 포함되었다. 이런 글들은 헤르만 헤세의 작가 정신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소재가 된다. 문학과 독서에 관한 많은 자극과 영감을 받기에 적합한 책이다.
독서가가 특히 주목할 만한 대목은 헤세가 제시하는 문학 고전 목록이다. 헤세는 ‘세계문학 도서관’이란 조금 긴 글에서 그리스, 로마 고전부터 현대까지 동서양 최고의 문학 작품들을 무수하게 소개하고 있다. 작가인 자신이 직접 읽고 영감을 받았던 책들인 듯싶다.
헤세의 200여권을 넘는 세계문학도서 목록을 따라가며 세계의 문학작품 읽기에 나서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시, 수필, 소설, 서사시 등 그의 추천 장르도 다양하다. 공자, 맹자, 묵자, 여불위를 추천하는 것도 이채롭다.
일단 나는 헤르만 헤세가 추천한 책들을 나의 도서예정 목록에 올렸다. 문학 장르는 따로 목록을 만들지 않고 있었는데 수십 권이 추가되었다. 국내에 판본이 있는지 한 권 한 권 확인하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린다. 약 60% 정도는 우리말 번역본이 나와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하지만 상당수의 책들은 아직까지 국내에 소개되지 않고 있다.
물론 헤르만 헤세의 독서 취향이 국내 독서가들의 기호와 잘 맞지 않는 측면이 있어서일 수도 있다. 우리에게 아주 생소한 책들도 적지 않다. 서구의 문화적 배경이 우리와 다른 까닭에 책의 선호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헤세는 전문가들의 우수추천도서 목록에 연연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독자 자신의 취향에 맞게 개성 있는 도서를 선별하여 읽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작가, 한 시대, 한 사조의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섭렵하는 의미 있는 독서법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헤세의 추천 도서 목록도 참조용으로 활용하고, 자신만의 도서목록을 만들어 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결국 독서의 기술에 왕도는 없다. 독서의 유형이나 독서의 방식, 소장의 방법 모두 개성과 취향에 맞게 선택하면 된다. 자신의 삶의 정서와 사고를 윤택하게 해주는 책이라면 어느 것이라도 무방하다. 독서는 책과의 사귐이자 시공을 초월한 저자와의 교제다.
“책은 진지하고 고요히 음미하고 아껴야 할 존재다.” 사람과 교제하듯 책을 존중하고 그 책의 내면을 음미할 때, 책도 나에게 다감하게 그리고 내밀하게 다가올 수 있을 것 같다. 겨울의 긴긴 밤을 책과의 즐거운 만남으로 채워보는 것은 어떨까.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 ☞추천도서: 『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 헤르만 헤세 지음, 윤지선 옮김, 뜨인돌(2013, 10쇄), 284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