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윤광원 기자] 아마도 본 기자는 대한민국에서 EBS-TV의 교양강연프로그램 ‘클래스e’의 가장 열렬한 시청자 중 한 명일 터다.
기자는 본래부터 교양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 등을 좋아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독서를 거의 손에서 놓은 처지에서, 그나마 계속 공부를 하게 해 주는 스승이 인터넷 ‘정보의 바다’, 트래킹마니아로서 걸으면서 보고 듣고 생각한 것들, 그리고 TV의 교양프로그램들이다.
세종시 오피스텔 숙소에 혼자 앉아, 열심히 뒤져보는 것도 교양프로그램이다.
기자는 일부러 인터넷을 신청하지 않았다. 정부세종청사가 바로 옆인데다, 급하면 모바일로 해결해도 된다. 또 몇 푼 되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아끼고 싶다.
특히 가정의 인터넷은 케이블TV라는 ‘마약’을 부른다. 독거노인(獨居老人)이 뭘 하겠는가. TV 리모콘을 손에서 놓을 수 없다. 주말 수원의 본가에 가면, 기자도 필경 그렇게 되고 만다.
그러나 여기선 공중파 외엔 볼 수 없다. 함정에 빠뜨리는 유혹이 거의 없다.
그러다보니, 웬만하면 뉴스 아니면 교양프로그램을 보게 되고, EBS를 파고들면서 클래스e에 매달리게 된다.
그런데 정말 이해할 수 없는 현실과 마주했다.
다른 강사들은 안 그런데, 단 두 명만 강의 태도가 전혀 달랐다. 강의 내내 단 한 번도 일어선 적이 없다. 1강부터 마지막 강의까지...또 발까지 꼬고 앉아있는 자세로 일관했다.
A는 여교수였다. 예술교양 관련이었는데, 자세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한번 보고 끊었다.
B는 국내 최고 권위의 모 대학 교수인 공학자다. 일반인들에게 인공지능(AI)에 대한 상식과 개념을 심어주는 강의를 하고 있는데, 원래는 반도체 전공이었다고 했다.
기자도 AI에 대한 상식 충전은 당연 시급하기에, 보기는 불편해도 참으면서 들어보려 노력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권위주의(權威主義)가 극성이던 유신과 5공 시절 학교를 다녔던 기자도 앉아서 수업을 하는 선생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아마 일제 때도 그랬을 게다. ‘낯설음에 대한 반감’일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왜 저 두 남녀 교수만 저럴까?
A와 B의 명예를 건드릴 의도는 추후도 없다는 점을 전제하고, 얘기를 이어가본다.
그들도 강의실에선 당연히 서서 가르칠 것이다. 다만, 오프라인 공간의 학생들이 아니라 TV를 사이에 둔 시청자들이다보니, 나름 친근감 있고 자연스런 분위기를 만들고 싶어서일 게다.
그러나 그게 자연스러울 리 없다는 걸, 본인들은 정말 모르나보다.
심지어 강의의 시작과 끝에서 인사할 때도, 일어나기는커녕 다리를 꼰 자세 그대로 고개만 까딱하고 만다. 그게 부자연스럽고 불편한 동작인지를 당사자들이 잘 안 텐데도...
대학교수는 우리 사회의 대표적 지성인이자, 엘리트들이다. 권력자(權力者)이기도 하다. 적어도, 문하의 대학원생들에게는...
교수(敎授)는 가르침을 내려주는 사람이란 뜻이다. 가르치는 사람이니, 일반인에게는 고마운 스승일 수 있지만, 이 사람에게 배워야 하는 사람에겐 당연히 ‘갑’이다.
물론 교수들도 시대가 변하면서, 옛날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권위를 내려놓고 제자들과, 또 외부 사람들과 마음을 열고 소통하고자 노력한다. 강의 방식이나 스타일도 '일방적 주입식'은 옛말이다.
판단컨대, A와 B도 그러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적어도 클래스e에서만은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대학 총장까지 지낸 이원복 선생이 자신을 '교수'라 하지 않고 항상 '만화가'라고 소개하는 것도 눈여겨볼 만 하다. [사진=미디어펜DB]
반면, 전혀 다른 교수도 이 프로그램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먼 나라 이웃나라’로 유명한 만화가이자, 덕성여대 석좌교수인 이원복 선생이다.
이 선생은 학습만화, 특히 ‘만화세계사’라는 새로운 세계를 개척한 분이다. 그것도 나라별로 다 따로따로 작품을 만들어냈다.
개별 국가로 들어가기 전 첫 강의를 들으면서, 역사가들에게선 찾아보기 어려운 ‘통찰력’이 느껴졌다. 시대와 대륙을 초월한, 역사에서 ‘보편적 지혜’를 찾아낸 것으로 보인다.
사실 전문 역사학자들은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전공분야를 깊게 파고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선생은 어떻게 저런 '혜안'을 얻을 수 있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가 다루는 것은 '학습만화'다. 만화라는 장르를 통해, 각국의 역사를 이야기로 풀어낸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학습만화가 팔리려면, 우선 학부모들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부모들이 재미있으면서도 유익하고, 학교로 학원으로 바쁘게 다니는 아이들에게 사서 읽힐 가치가 있다는 평가를 받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려면, 교수로서의 권위를 내세우려하면 안 된다.
눈높이는 다른 교수처럼 학생에 맞춰서도 안 되고, 학부모에 맞춰서도 안 된다. 만화의 '최종 소비자'인 아이들에 맞춰야 하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눈으로, 그들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는 말이다.
밑바닥까지 한 없이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춰야만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출 수 있고, 학부모들은 오히려 우러러보게 마련이다.
바로 이것이 이 선생의 ‘진정한 힘’이 아닐까.
21세기 ‘포스트 코로나시대’의 '리더십'도 이런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눈높이를 사람들의 높이에 맞추려하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제 딴에는 노력한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여전히 보수적이고 권위적이다.
그게 자신도 모르게 몸에 깊숙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연말연시에 가장 많이 쓰는 건배사 중에 이런 게 있다. ‘통통통’이다. 바로 ‘소통’ ‘신통’ ‘방통’이다. 소통으로 통합하고 통찰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말로만 통(通)을 떠들어서야 무엇이 되겠는가.
입으로만 통을 외치는, 리더가 되고 싶은 세상 모든 ‘꼰대’들(기자도 포함)에게, 신축년 새해에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눈높이 맞추지 말고 밑바닥에서 우러러보시라”
[미디어펜=윤광원 기자]